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어머니는 가난한 과부의 아들과 열열한 연애를 했고 불구덩이 같은 그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아침마다 벽으로 돌아 앉아 숱이 듬성듬성한 희고 긴 머리를 빗어 곱게 쪽을 찌셨다. 그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할머니의 경건한 의식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의 쪽진 머리는 어린 나의 눈엔 하얀 찹쌀떡같이 작고 연약해 보였다. 유일한 액세서리였던 은비녀를 꽂고 돌아앉으시는 할머니는 곱고 꼬장꼬장한 데가 있었다.
어머니도 우리 5남매도 할아버지를 본 적은 없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했다. 할머니가 말하길 할아버지는 역맛살이 껴서 전국을 돌아다니다 젊은 날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후 그 많던 재산을 하나씩 팔아먹으며 과부와 어린 아들은 살았고 어머니가 시집와 보니 솥단지마다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부지런했고 뭐든지 금방 배웠으며 용감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할머니가 원한 것은 단 한 가지, 손이 귀한 집에 아들을 낳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겐 아들을 낳는 재주는 없었다. 첫딸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서운했지만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을 때는 정말 서운해했고 셋째 여동생이 태어나자 할머니와 아버지는 등을 돌려 앉았다고 한다.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잘못이 명백했던 어머니는 할머니 앞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꿀꺽 삼킬 때가 많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입을 꾹 다물었던 어머니의 그 얼굴들을 나는 기억한다. 항상 4명의 어린 딸들이 그 치마폭을 잡고 쪼르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인생에도 '드디어'란 단어를 쓸 날이 온 것이다. "두둥" 3대 독자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남동생의 탄생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시원한 단비 같은 해갈이었다. 우리 모두는 3대 독자 아기 앞에 모여들어 재롱을 피우며 아기의 미소를 보려고 행복한 애를 썼다.
할머니는 닭고기를 먹지 못했다. 젊은 날 닭고기를 먹고 열이 나면서 털이 뽑힌 닭처럼 온몸에 오돌토돌한 좁쌀이 올라와 죽다 살아났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닭고기 냄새조차 싫어했다. 우리 집 밥상에는 보통의 날에도 특별한 날에도 닭고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물론 가난한 시골 살림에 고기반찬은 드물고 귀했으나 할머니가 있는 밥상에서 닭고기는 구경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