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2

내가 좋아했던 내 모습 찾기

by 꼬당

병원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약때문인지 그동안 부쩍 잠이 많아졌고, 병원에서는 571문항에 달하는 테스트를 숙제로 내주었다. 일주일 동안 약속 장소에서 지인을 기다리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밥을 먹으면서 틈틈이 571문항을 풀었다. 병원에서는 그 테스트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요일에 병원을 다녀왔으니, 그 다음 주 화요일쯤에 모든 문항을 다 풀었다. 옛날의 나였더라면 결과가 궁금해서 하루라도 빨리 상담 받고 싶어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무덤덤해졌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서일까? 내 자신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롭고 흥미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긍정적고 희망찬 미래를 꿈꿨는데, 현재는 그런 것들이 비관적으로 다가온다. 나도 한때는 햇살처럼 밝은 사람이었는데…….




571문항 테스트가 알려주는 나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다. 다른 항목들은 평균에 가까웠지만 유독 예민지수만큼은 산처럼 솟아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이 예민함으로 인해 겪었던 불편한 일들이 있었는지 물어보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바로 생각 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몇 가지가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무례한 말투나 행동이 참 거슬렸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무례하게 말하지?' 혹은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들이 불편했다. 또한 A를 계획하고 B를 계획하면, 무조건 A를 하고 B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의사 선생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환자분은 자신의 생각에 끌려 다니고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예민해진 것 같아요. 저와 함께 이 예민함을 무뎌지게 하는 연습을 해볼까요?"라고 하시며 내 예민함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볼지 물어보셨다. "저는… 타지역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보고 싶어요. 공간이 바뀌면 제 마음도 바뀌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왜 그러지 못하고 있나요?"라고 물으셨다. 나는 "해고당하면서 생긴 여러 가지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했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고 싶은 걸 먼저 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셨다.


사실,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꽤 놀랐다. 내 입장에서 선생님의 말은 "무책임하게 그냥 다 미뤄놓고 하고 싶은 것부터 하세요"라고 들렸다. 일을 미뤄놓고 다른 일을 먼저 하게 된다면 마음이 참 불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선생님의 솔루션에서 위안을 얻었던 점은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미루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무책임하게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평생 살아오면서 대문자 J인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만약 이런 생각이 나를 옥죄고 있다면 차근차근 바꿔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아침과 저녁에 먹는 약을 일주일 분량으로 처방받았다. 약의 양도 조금 늘었다. 참 신기했다. 이렇게 자그마한 아기 손톱만한 알약들이 사람의 기분을 좌지우지한다는 게. 사실 먹어도 잘 모르겠다. 이 약들이 내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플라시보 효과아냐? 라며 혼자 쿡쿡 웃기도 했다. 조만간 한 달 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지역에 1박 2일이라도 놀러갈 계획을 세워야겠다. 이렇게 따뜻하고 좋은 날, 집에 박혀서 나를 옥죄는 생각들을 하기엔 내 인생은 너무나 화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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