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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Feb 08. 2022

니체의 미치광이

미치광이는 무엇을 부르짖었는가

그대들은 밝은 아침에 등불을 켜고 시장으로 달려가 쉴 새 없이 이렇게 외치는 미치광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


주변에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서 있었으므로, 그는 더 많은 조소를 일으켰다. 길이라도 잃은 것인가? 누군가가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길을 못 찾고 헤매는 것인가? 또 다른 이가 말했다. 아니면 그는 숨는 것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여행을 하던 것인가? 이민을 위해 온 것인가?—이렇게 그들은 소리치고 웃었다. 미치광이는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내가 가르쳐주리라.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였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전부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쓸어내어 버릴 스펀지라도 주었는가? 우리가 이 지구를 해로부터 풀어주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이제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아직도 위쪽이 있고 아래쪽이 있는가? 우리는 끝없는 허무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빈 공간의 흐름을 느끼지도 못하진 않는가? 계속해서 추워지지는 않는가? 밤이 우리를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아침에도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사토장이[8]들이 신을 땅에 묻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직도 신이 부패해 가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 또한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즐거운 학문- 프레드리히 니체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에서 중요한 것은 신이라는 존재의 유무가 아니다. 무신론을 이해시키려는 시도가 아닌 그 시절 종교가 사람들에게 드리우는 가치가 무너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유러피안 그리스도교에서 신의 상징성은 인간의 모습을 본뜬 모습으로 이내 진짜 죽임을 당하고 이는 또 다른 시작을 담당한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종교는 변모해 내세에서의 구원을 죽음 후 사후세계에서 완성시킬 수 있다는 약속을 덧입게 되고 결국 나아가 종교적인 ‘양심’이란 가면 아래 개인의 색채까지 지워버리는 도덕적 통제까지 탑재하게 된다.


우주 만물 속 커다란 자연의 신비를 만들어 낸 신의 모습은 이제 인간의 자잘한 속내와 사소한 시기, 질투, 방탕, 오락 같은 것까지 다 엿보는 그런 속 좁은 염탐꾼이 되어버렸다. 신은 인간의 행동과 생각 이 모든 것을 관할하는 미천한 직함을 달게 되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아이의 천진난만과 무지함으로 내뱉는 직설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소득이라고 할 정도로 종교적 가치는 인간의 삶에 모든 곳에 그 손을 뻗히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종교의 변천 과정에서 인간이 이드를 말살시키고 슈퍼 에고를 찬양하며 절대적인 사회적 안정을 찾으려는 욕망이 투영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몽운동 이전의 그리스도교가 이상으로 삼던 가치들은 너무나 통속적이고 인간다워 기괴하기 짝이 없다.


신앙생활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했지만 이제 무종교인  관점에선 신이 없는가 있는가는 나에게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이 있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인생에 일어나는  모두가 우연의 연속일 뿐이고  또한 그에게 기대하는  없으니 관심조차 없다. 하지만 인간 따위 헤아릴  없을 스케일의 우주를 만들어낸 신이라고   언제고 이제 와서 미물이나 마찬가지인 인간  사람  사람의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설계했다는 인간 중심적인 오만한 상상에선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풍파가 모질어도 얼마나 두렵길래  세상 만물을 창조한 전지전능 신이  인생 하나하나 모든  보살펴  것이라는 착각도 아닌 망상에 젖어 살아야 하나.  안에 피어나는 두려움의 본질은 그것에 시달리는  자신만이 마주해야 하고  스스로 알아차려야만 한다. 나라는 존재가 없던 시절에도 세상은  돌아갔었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없던 시절에도 세상은  순리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단순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은 결국 운명의 소용돌이 안에서 인간의 발목을 잡게  것이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내려와서 죽임을 당했다는 그런 극적인 장치 또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교회 안으로 끌어와야 하는 인간의 필요에 의함이 아닌가?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종교를 설파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범주 내에서 신을 설명하기보단 이제 아예 구체화된 형상까지 만들어 입혀 버렸다. 인간의 상상 속에서 몸뚱이를 가지게 된 신은 그렇게 사사건건 인간의 희비에 간섭하는 그저 그런 염탐꾼이 되어버렸다. 신의 모습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이 신에게 육신을 주고 그 육신을 틀에 가두어 썩어 문드러지게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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