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3.
늦은 시간. 나의 문제점은 집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 집중이 짧다는 점. ‘10대 때보다 신경 쓸 일들이 많아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변명이라고 반박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지.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들은 그때도 많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상하길 즐겼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생각들. 혹은 책장에 있는 책들을 구경하거나 몰래 게임하는 등 공부 외적으로 신경이 세어나갔다. 돌이켜보면 공부가 별로 체질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학원에서 요즘 무슨 교육을 받는지 조금만 밝히자면(이것도 좀 부담이네.) 간단하게 성격이나 기질 같은 것을 배운다. 이런 저런 성격들. 이게 아이들이나 부모님들 뵐 때, 즉 일할 때 필요한 정보인데 자연스럽게 나에게 적용하게 된다. 나는 어떤 성격인지 어떤 기질인지. 뭔가 셀프 사주보는 기분이기도 하고, 전부터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맞을 때도 있고 그렇다. 반성도 많이 되고 어릴 적 주변인들에 대한 작은 원망이 생기기도.
자존감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시기는 20대 때인 것 같다. 집단 안에 있으면 완전 인싸는 아니더라도 인싸와 아싸 사이, 인기가 많진 않아도 친한 무리가 있는 생활을 했었다. 외로울 일도 없었고 그냥 마음 맞는 친구들이랑 있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굳이 자존감이니 자신감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자존감에 대해 감각적으로 인식한 시기는 아마 재수할 때였을 거다. 특목고 출신이니 명문대학교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겼던 거만했던 나의 콧대가 크게 꺾인 일이었다.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3년간 자랑스러운 타이틀로 여겼던 학교가 뭐랄까 나의 존재를 멍청이로 만드는 족쇄가 된 기분이랄까. 그런 수치심과 자기혐오감, 의기소침함이 1년을 채웠다. 학원 도시락이 맞지 않아 체중은 12키로가 빠져 과호흡과 빈혈이 왔다. 친구를 사귀지도, 만나지도 않았고 카톡, 페이스북 모두 삭제했다.(그 당시에는 인스타그램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모든 정보를 차단했는데도 불구 고등학교 동창들의 소식은 종종 귀에 들어왔다. 누구는 어디 대학 갔다더라, 무슨 동아리를 한다더라, 미팅을 했다더라... 괴로웠다. 외롭게 공부만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근데 슬픈 일일까 비극인걸까 나는 긴장을 말도 안 되게 심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청심환은 아무런 티가 나지 않는... 시험장에 가서 긴장만 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수시, 정시, 수능, 실기 등 여러 시험을 거쳤지만 해결책은 결국 찾지 못했고 트라우마의 연속일 뿐이었다. 당시 죄인의 기분이었던 나는 부모님을 대하는 것도 부끄럽게 느꼈던 것 같다. 아무튼, 재수를 지독하게 했으니 긴장을 그렇게 했어도 현역 때보단 훨씬 나았다. 대학도 딱 그 정도로 갔다. 모교 고등학교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학교지만 인지도가 있는, 사는데 도움도 해도 안 되는 그런 인 서울 대학교.
재수할 때의 습관이 몸에 배어 나는 학교생활을 우수하게 해나갔다.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특목고를 나온 성과가 일반고 출신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신나게 튀어나왔다. 나는 동기 중 우수 학생이었다. 등수 안에 들고 장학금도 탔다. 실력과 열정이 모두 인정받았다. 그런 인정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던 것 같다. 모두가 나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느낌이었고 우월한 존재가 된 것 같아 그런 만족감에 취했다.
후로 10년이 되어가는 지금, 돌이켜보면 안쓰럽게 보인다. 인정에 취해 똑바로 생각할 시간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그렇게 진로를 쉽게 선택해도 되는 것이었나. 예고를 간 것 자체가 진로 선택의 폭을 확 줄여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세부 전공을 선택할 때부터 나는 이성적일 필요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나는 그저 당시에 나를 즐겁게 하는 쪽으로 선택을 해왔다. 갑자기 며칠 전에 썼던 마시멜로우 글 예시가 떠오르네. 근데 이게 연관되는 게 맞아 보인다. 나는 인내력이 좋지 않아 보인다. 완전 없진 않겠지. 그런데 유혹엔 참 약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도 못하고 후회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게 돌이켜보면 유혹을 쉽게 견뎌내지 못한 과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럴 수가. 내가 옛날에 똥을 쌌는데 그게 떨어지면서 미래의 내가 아래에 가서 맞은 짝이다. 어쨌든 그렇다고 내가 20대 중반까지는 크게 게으르게 살지는 않았으니까. 인정에 취해서 정말 열심히 했다. 노력하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거만함을 기본옵션으로 달았다. 그 당시에는 예술 전공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거라고 생각했다. 교양수업 때 컴공과가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고루한 전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몇 년 후 나는 그 생각 자체가 얼마나 얼간이 같은지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 열심히 허우적거리다가 근본이 잘못 된 것임을 깨닫고 몇 년 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20대를 보냈다는 회고의 결론이 나왔다.
30대의 끝에선 이런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이성적이고 냉철하며 참을성 있는, 현명한 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