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우리들의 하루에 대하여

익어간다는 건 단단해지는 일

by 느린꽃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먼저 우리가 배우는 일은 사실 ‘살아가는 법’인지도 모른다.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는 그 첫 순간부터 우리는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온기를 나누고, 이름을 얻고, 관계를 맺는다. 아주 작은 숨결로 세상과 마주하면서도 우리는 이미 ‘살아낸다’는 일의 의미를 하나씩 배워온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 학교에 들어가고, 교실에 놓인 작은 책걸상 앞에 앉아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다. 친구의 이름을 알아가고, 서툰 글씨로 받아쓰기를 하고, 운동회 날엔 온몸을 다해 달리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그 넘어짐조차 이 세상을 배우는 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누구나 ‘아이’라는 계절을 지나왔다.


그러다 아주 어느 날, 특별한 사건도 없이, 하지만 분명하게 ‘나’라는 삶의 길이 열린다.


직업을 갖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사랑을 배우고,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인생을 잇는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거대한 절정의 순간을 지나 육아라는 호흡 긴 여정으로 발을 옮긴다. 그 과정은 그저 달콤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 어떤 배움보다 삶의 진짜 얼굴을 깊이 품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되듯, 내 아이도 학교에 들어가고, 친구와 다투고 다시 화해하고, 숙제를 하고, 시험을 보고,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기만의 삶의 모양을 만들어간다.
그 아이가 언젠가는 나처럼 직업을 갖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임신과 출산을 겪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단단한 어른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 모든 길이 소중하고, 그 어떤 길 위에서도 아이는 자기만의 빛을 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거대한 변화라기보다 사소한 순간들이 잇대어 만들어진, 긴 이야기의 연속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결혼하고, 누군가는 홀로 살아가고, 누군가는 아이를 키우고, 누군가는 키우지 않는다. 삶의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그 다양한 모양들의 바닥에는 닮은 결 하나가 흐른다.

우리는 모두 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사연의 노래 <바램> 중 이런 가사가 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이 문장을 들을 때면 마음이 불시에 따뜻해진다.
주름이 생기고, 체력이 예전만 못하고, 머리카락에 하얀 빛이 스며드는 것이 더 이상 낯선 두려움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단단해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익어간다는 것은 외형이 변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제 자리의 온도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교사로서 하루하루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
때로는 한숨도 나오고, 때로는 웃음이 더 크게 터지고,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함이 마음 한쪽을 울리기도 한다. 이 시간들 속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듯하지만, 사실 아이들이 더 많이 나를 가르친다.
순정, 호기심, 낙천성, 그리고 아직 진하게 남아 있는 ‘처음의 마음’—그 잊어버리기 쉬운 감정의 색깔들을 아이들은 매일 나에게 다시 건네준다.

엄마로서의 나는 또 다른 모습이다.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끝에서, 학교에서 힘들었다는 말 한마디에 철렁하는 가슴에서, 밤늦게 들리는 현관 소리에 찾아오는 조용한 안도에서, 나는 ‘엄마’라는 역할의 깊이를 배운다.
엄마라는 위치 속에서 나는 더 차분하고 부드러워지고, 때로는 서툴고 흔들리지만 결국 중심을 다시 찾는다. 아이의 모든 성장 순간들은 결국 나의 또 다른 성장의 이정표가 되어 왔다.

딸로서의 나는 여전히 부모님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다. 이제는 내가 더 많이 지켜드려야 할 때가 왔지만, 마음 한편에는 언제까지나 안겨 쉬고 싶은 ‘처음의 집’이 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런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 이름만으로도 한 사람의 마음을 다시 맑게 만들어주는.

친구로서의 나는 또 다르고,
동료로서의 나는 또 다르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의 나 역시 다르다.
그러나 그 여러 갈래의 ‘나’ 속에서 공통된 것은, 나는 매일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할이 많아질수록 삶의 향도 깊어지고, 관계가 풍부해질수록 마음의 그늘도 따뜻해진다.


돌아보면 인생은 거대한 사건들의 연속 같지만, 사실은 작은 순간들이 모인 조용한 축제에 가깝다.
아침의 커피 향, 교실 문을 열 때 아이들이 외치는 “사랑합니다”, 저녁 밥상에서 아이가 들려주는 짧은 하루 이야기, 어느 날 문득 스치는 바람의 온도, 부모님의 목소리에 담긴 여전한 걱정과 사랑.
그 소소한 것들이 나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익게 한다.


익어간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흔들리면서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줄 아는 마음의 근력이 생기는 일이다.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단함의 모양을 조금씩 배워가며, 자신과 주변을 이해하고 품는 마음이 넓어지는 과정.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삶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중이다.
교사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한 명의 나로서.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익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어떤 날엔 눈부시게 기쁘고, 어떤 날엔 조용히 나를 위로한다.
익어가는 삶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성실하게, 느리게, 진짜 나답게 걸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익어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 사소한 깨달음 하나가 오늘의 하루를 훨씬 더 따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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