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변명

새로운 장르에 관하여

이성두︱시인᠊수필가


비겁한 변명


뜨겁다. 잘못하면 싸울 것 같은 대립도 있다. 난 다툼이 싫다. 싸움이 싫다. 본시 난 기가 보드라운 족속이었나 보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한때는 휘몰아 붙이는 저항에 불탔고 감당하지 못하는 청춘을 불살랐던 이력도 있긴 하다만, 그러나 그 혼란의 시기를 지나면서 세상의 힘에 굴복함이 내게 맞겠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비겁자가 되고 만다.

정치를 예기하고 스포츠와 종교를 토론하는 자리가 되면 어느덧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거나, 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는 내 의사를 유효적절하게 표하곤 했다. 시와 때에 따라서 수시로 양비론(兩非論)에서 양시론(兩是論)으로 홍길동처럼 구간이동을 해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어쩌면 그것으로 쓸데없는 논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양비론 자, 때로는 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는 양시론 자! 희한한 논리에 편향되어있는 어쩌면 흐리멍덩한 의식이었던 것인가. 색깔이 뭐냐? 색깔도 없다. 좋아하는 스포츠도 없다. 그랬다, 프로야구경기 관람도 그랬다. 보면 좋고 안 봐도 그만이고 그저 보면 보고 안 봐도 그만이었다. 하긴 이런 류의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몇 년 전 2021년 JTBC의 「싱 어게인 1」에서 이승윤이란 무명 가수가 나와서 인터뷰했다. 자신은 어디에서나 애매한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의 음악은 “충분히 예술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대중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락도 아니고, 충분히 포크도 아니다.” 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심사위원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그의 음악이 어느 장르에 속하는지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는 애매한 장르의 가수였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전문화, 세분화로 가고 있는 세상의 섬세한 분열에서 어쩌면 그 미세하게 자리한 애매한 자리를 인정하는 시대가 도래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이쪽과 저쪽을 공히 넘나드는 폭넓은 장르에 속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장르와 장르 사이에 있는 애매, 그것이란 존재가 인정되는 시대인 것이다. 결국 그는 애매하지 않은 우승을 하게 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그런 일은 굳이 성격 탓이라 해야 하는가? 그렇다.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빼고서 매사에 임하면 제대로 그 문제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배수진을 친 모습으로 임할 때라야 비로소 무한한 능력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런 원리를 알면서도 시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정쩡한 바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관념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그는 그만의 길을 살아 온 것이다. 세상은 그런저런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제대로 된 구색이기 때문인가?

이런 사람들은 서로를 강요하거나 강제할 의욕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마저도 방치하며 사는 것이다. 그냥 나는 나고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생각이 생각을 이끌어내게 하려는 의도가 그에게 있었다면, 그는 이미 종교나 정치를 생활화하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현실은 어쩌면 그에게 소위 플라이밍효과(priming effect)를 볼 수 있는 계기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을 보자. 그가 핍박과 압박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핍박과 압박이 그의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누구라도 어떤 상황에서 고난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도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보수로부터의 피해나 진보로부터의 소외나 그 어떤 것에 대한 설움을 맛본 기억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어느 쪽에 서서 그것에 대항하거나 그 설움을 보상받거나 해서 위기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발동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냉정한 구역으로의 진입 자체를 두려워했다. 어쩌면 물가에 가지 마라, 불가에 가지 마라, 운전하지 마라, 싸우는데 서 있지도 마라는 그 시대 우리들 엄마의 충고에 충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위험 가까이 서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고 엄마의 말에 효자처럼 따른 것이다. 도전이 없으니 충격이 있을 리 만무하다. 어쩌면 이념이란 삶을 파괴하는 괴물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이란 단위는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지인도 친구도 친척도 혈육마저도 혈투를 벌이는 기이한 거래, 그 괴리감을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많이 봐 왔다. 누구나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 어정쩡한 모습은 상관없다, 비록 말하지 않는 묵비권을 자행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침묵일 뿐이다. 전쟁터에서 전우가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눈을 뒤집고 죽기 살기로 작정하는 모습은 영화에서 많이 봐 왔다. 용기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잠재해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아날로그 세대는 사라져가고 실수와 장난이 용납되지 않는, 예외가 없는 0과 1만이 존재하는 디지털 세상이 도래되었다. 그래서 인간미가 더욱더 절실한 시대인 것이다. 사람은 감성이 메말라가고 있고, 문명은 사사건건 감정의 영역을 노리고 있다. 예술영역도 그렇다. 지금 어쩌면 감정의 영역이 조금씩

조금씩 샛강처럼 메말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냥 이유 없이 그녀를 사랑한 내가 행복한 것처럼 그저 좋은 감정대로 사랑을 선택한 내가 마냥 좋기만 한 것처럼

감성은 행복을 깨닫는 영원한 시작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후인들을 위하여 감성으로의 길을 활짝 열어둬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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