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화살물고기
화살물고기화살물고기
박윤배 시집
자서
겉은 멀쩡한 듯/속까지는 다 아물지 않는/성처를 남겨,/바글거리는 구더기를//굴욕의 기억에서/카우다 보니,/무심하던 하늘에/몰려드는 초파리 떼//자욱한 먹구름/망연히 바라보는/나는 한 마리 왜가리//매워진 눈을/비릿해진 부리를/이슬 잔뜩 머금은/달개비꽃에 닦는다
「밤낚시」 전문
1부 17편, 2부 17편, 3부18편, 4부 18편
1부
한때 내 눈빛 흡입하던 넌 탐스러운 꽃/이제 내가 너를 청소한다//온갖 먼지 속에서도 너는, 다시 꽃으로 피려 하겠지만/살 비벼대는 날벌레들은/슬슬 배가 고파서/꽃인 너를 뜯어먹고 말거야//가득 차면 비워야 할 속, 아직 다 채우지 못한 나는/이 구석, 저 구석 머릴 들이 민다//죽은 날벌레와 함께 둥근 통로를 지나 네가/안착한 곳은 블랙홀 너머의 낮선 우주//난, 아직은 사는 이유가 조금은 불분명한 것 같아서/지구에 좀 더 머물러야 할 듯//은하 너머로, 먼저 가 있으라고/엷은 미소에 손까지/바스라지는 너를 향해 흔들어준다
「진공청소기」 전문
‘한때 내 눈빛 흡입하던 넌 탐스러운 꽃/이제 내가 너를 청소한다’
주체할 수 없던 사랑을 이제는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사랑에 빠져 정신을 빼앗겼던 상태를 진공청소기의 기능적 동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 감성적 사랑을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진공청소기로 환치해 놓았다.
‘살 비벼대는 날벌레들은/슬슬 배가 고파서/꽃인 너를 뜯어먹고 말거야’
믿은 사랑에 화자의 배신감이 중첩되어 보인다. 그대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고 또 당부하고 있다.
욕실에 놓아둘 향긋한 비누를 사러 간다/구만리 밖 매밀린 먼로 찾아오는 날 뒷불을 위해/세숫대야도 하나 사야겠어!//너의 냄새는 대야에 남고/비누 냄새는 너를 따라가 버리지/또 다른 애인을 만나러 가야 하는 너를 위해/참 잘한 거라고 나는/비누의 등을 토다토닥 두드려 주지//하긴 나도 수시로 뒷물이 필요해/예전에 나와 알던 여자는 손가락에서 항문 냄새가 났어/내 배설의 냄새가 얼마나 불쾌했으면/수표 한 장 똥 잘 닦고 살라고/획! 던지고 떠났겠어//그러니 향 좋은 매릴린 먼로표 비누여, 너는/한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내 무의식까지/빡빡 문질러 골고루 씻겨야 하지/먼 길에 든 먼로는 끝내 돌아올 기약 없고/클레오파트라도 오래전 떠났고/세숫대야와 함께 펄럭이며 말라가는 비누의 세계여/세속의 욕실을 끝끝내/마르고 닳도록 지켜야 하지
「암울한 비누」 전문
비누, 세숫대야, 매릴린 먼로, 뒷물, 예전에 알던 여자, 손가락에서 항문 냄새, 내 배설의 냄새, 수표 한 장, 똥, 향, 내 무의식, 클레오파트라, 세속의 욕실 등 일상의 단어들이 등장한다.
떠난 사람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인정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상실감일 뿐이라 사랑 자체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비누 냄새는 너를 따라가 버리지’라는 부분을 되씹어보자. ‘비누 냄새는’이라고 주격조사를 사용한 것은 다음에 나올 의미는 그와는 다르다는 의미이다. 즉 앞 행에서 제시한 것처럼 ‘너의 냄새는 대야에 남았다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체취는 사라지지만 비누의 향기는 남았다. 이제 사라져버린 사랑과 남아있는 추억의 잔상을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사랑을 위해 준비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떠나간 사랑을 관능적 유혹을 상징하는 매릴린 먼로로 비유했다.
그 짜릿한 애인의 체취는 여운과 같아 기억에 머물지만, 원래의 느낌인 감촉들은 애인을 따라 떠나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랑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으니 그로 인한 상실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내면을 일상적 사물로 투영했다. 즉 비누의 소모적 성질을 통해 일시적인 사랑의 덧없음과 삶의 무상함으로 연결하고 있다.
「뿔의 맛, 사는 맛」에서는 시제에서 밝혔듯 일상생활에서 뿔의 맛과 사는 맛이 중첩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뿔의 맛이란 어물전에서 등 두꺼운 칼날로 내리치는 아주머니의 분노다. 그 분노에 조각난 동태, 가을무에 청양고추를 넣고 팔팔 끓인 칼칼한 맛을 사는 맛으로 병치해 놓았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라면 한 봉지 끓여놓고’로 시작하는 「불두화」는 또 어떤가. 일상의 사소한 장면 속에서 얻는 깨달음의 순간을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끓여놓은 라면에서 부처가 보인다는 현상은 부처와 관련된 상징이나 이미지가 우연히 눈에 띄는 경우를 의미할 수 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시 불두화를 탄생시켰다.
‘진짜 먹고 싶은 건, 저 꼬불거리는 경전’ 화자는 라면 면발을 보고 불교의 경전으로 연상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아마도 이날 밤을 지새웠는지 ‘새벽달’이 쭈르르 잘게 부서진다.
「미꾸라지」에서는 7~8월경 비 오는 어느 날에 청도의 연꽃 명소 유등연지와 풍각면, 이서면으로 이동하면서 청도읍성까지 가는 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뜨끈한 청도 추어탕을 먹었다는 것이니 아마도 한나절쯤은 온전히 청도의 분위기에 젖었나 보다. 청도의 옛 역사를 기억해 내고는 마치 미꾸라지 같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고 있다. 아마도 40여 년쯤 전이나 되었을까? 청도역 앞의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어 본 추억이 있다. 맛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모여 다니곤 했으니까 먹는 맛 가는 맛에 빠졌다. 그렇게 추어탕 한 그릇 정도 비우고 나면 왠지 모르게 미꾸라지 같은 힘찬 몸부림이 전이되는 것 같으리라. 그런 힘찬 느낌으로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있는 화양읍의 지석묘로 가는 길인 것으로 보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상처 많은 여자 데리고 살 팔자’라는’ 「바른생활지침서」에서와 ‘두 손으로 잡아 벌리고/들이미는 혀끝이/뜨겁도록 달다’라는 「따뜻한 밀봉」에서는 화자의 고독한 밀애가 느껴지기도 하고 ‘거울 속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과 ‘방충망 찢어진 틈 밖으로 툭툭 턴다’는 장면의 「말년의 혼밥」은 그저 고독이 윙윙거리는 공명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뿔은 물건이나 동물의 머리에 솟은 단단하고 뾰족한 구조를 일컷는데, 화자는 뿔의 정의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그 정의를 내리고 있다. 털도 수염도 뿔이라는 것이다. 뿔은 개체 간 사용되는 무기이면서 도구이다.
이 시 1연 4행에서 ‘자신을 찌를 순 없어 공중은 더 슬퍼졌다’는 것은 뿔은 스스로를 찌를 수 없다는 것, 즉 슬픔이나 고독이나 아픔 등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 슬프다는 의미일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중생이라 지칭한다면 거기쯤에서 송곳니이다. 즉 송곳니는 앞니와 어금니 사이에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이다. ‘그게 나다’라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네 발이 있으면 날개가 없고 송곳니가 있으면 뿔이 없는 법이니 털이라도 뿔이라 고집하는가, 그 함의하는 바가 크다.
온몸 땀에 젓는 줄도 모르고 어젯밤 불륜 남녀 다녀간 카
페 바닥을 청소한다. 에틋함은 끈적끈적해서 쓸지 말고 닦아야 한다
머슴이 마님을 그리워하듯, 질퍽한 거시기 향기 한번 맡겠다고 이 품삯도 없는 일. 알고 보면 지독한 자학, 죄의 냄새 감추려고 구석구석 발라둔 집착의 덫 아로마 향기에 기어코 난 길들여졌다
이렇듯 세상은 사소하고 웃기는 잡념 하나에 운명의 거미줄은 온몸 챙챙 조여 온다는 걸, 커피 냄새 좇아 날아들었다가 카페 구석에서 죽어 빗자루에 쓸리는 벌레에게서 본다
하룻밤에 거미줄은 몇 개씩 더 생겨나고 날갯짓 한 번에 멀리 날기조차 버거운, 하필 실잠자리는 이번만큼은 사랑이라고 아침까지 늘어진 거미줄에 누워 사지를 버둥거린다
창밖 자귀나무는 죽음 직전에 쏟아낸 정직한 정액에 흠씬 젖었다. 자줏빛 스카프 목에 걸고 자귀나무가 자기처럼 들려주는 귓속말에 나는 또 온몸 근지러워졌다
「자귀꽃 그늘」 전문
아마도 추정컨대 화자는 6, 7월의 어느 날 자귀나무꽃이 있는 카페의 아침을 맞으며, 여러 청춘의 야릇한 지난밤 이야기들을 자귀나무 아래 흔적으로 연결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귀나무는 두 잎을 서로 맞대고 밤을 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합환목’이니 ‘야합수’이니 ‘유정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여기서 ‘금슬(琴瑟)’은 거문고와 비파를 함께 이르는 말로, 두 악기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금슬’의 발음하기 쉬운 형태로 부부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는 ‘금실’을 더 많이 쓰고 있다
또 ‘애틋함은 끈적끈적해서’라는 부분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감정을 실존적 체험적인 점성으로 치환했다는 것이 놀랍고
‘죄의 냄새 감추려고 구석구석 발라둔 집착의 덫’이라고 표현한 부분 즉, 내면의 집착을 냄새로 치환한 부분 또한 경이롭기까지 하다.
‘머슴이 마님을 그리워하듯, 질퍽한 거시기 향기 한번 맡겠다고’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한 무의식적 본능을 그대로 묘사했다. 이것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공통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한 희생적 행위를 냉정하게 분석해 보고 있다.
‘이 품삯도 없는 일’이 알고 보면 지독한 ‘자학’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한 본능에의 유혹을 끊어내지 못하거나 절제하지 못하니, 어쩌면 부정하면서도 체념하지 못하는 그런 행위를 아이러니하다고 제시한다.
‘죄의 냄새 감추려고 구석구석 발라둔 집착의 덫 아로마 향기에 기어코 난 길들여졌다’라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종족 번식을 위한 생명의 정체성으로 결부’ 짓거나 ‘삶의 본질로 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
벌레와 거미줄을 불러와 작은 욕망이 운명의 덫에 걸리는 모습을 자연에서 그 이미지를 불러와 공감을 쉽게 끌어내고 있다.
가창에는 한국마사회 대구지사가 있어 주말이면 경마 경기가 화상으로 열린다. 「가창천 둑길」에서는 배롱나무 아래 찢어진 마권에서 느끼는 희망과 허무를 그리고 참담과 후회 등을 담은 표정을 그려놓았다.
보통 참나무, 밤나무, 느티나무는 암수가 한 몸에 있다고 해서 ‘암수한그루’라고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 소나무, 자작나무 등은 암수딴몸이라고 분류한다. 하지만 버드나무는 꽃은 암수딴몸이라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에 모두 피지만, 암나무와 수나무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물속의 숲」에서는 금호강 변에 군락을 이룬 버드나무를 보고 성업 중인 남녀가 한 몸으로 어울려진 나이트클럽을 불러내고 있다. 기발한 연상이다.
‘벽이 담이 되고/담이 벽이 되는’ 고성동 골목을 지나며 「염치」에서는 ‘골목의 쪽창들’들이 서로 민망할까 봐 마주 보지 않는 광경을 염치라고 표현하고 「물속의 숲」에서는 금호강 변을 지나면서 「술렁」에서는 밤새 시를 기다리다가 터진 입술을 그려놓았다. 「관망」에서는 ‘카페 베란다’에 앉아서 청도 추어탕 한 그릇 비우고 유등연지 함께 간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
‘눈 속에서 각을 세웠던 마음’이 문드러진 자리를 떠올리는 「문드러지다」에서 ‘문들어지다’의 의미는 ‘썩거나 무르게 되어 힘없이 처져 떨어지다’ 또는 ‘몹시 속이 상하여 견디기 어렵게 되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자가 보여주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즉, 속이 몹시 상하여 떨어졌지만, 아마도 흔적으로 남은 자국이다. 어디 그 자국이 쉽게 지워지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깎는 쓸쓸함을 공감하며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부
특정하고 우포늪에 간다. ‘배꼽 시침에 알람을 맞춘다’ 했으니 혼자 서둘렀던가 보다. 어쩌면 창녕 그쯤에서 아침 식사를 했을까.
하긴 요즘 부곡면 온천 앞에 가면 ‘유퉁의 국밥집’이 있다던데, 거기에 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욱국을 먹었으니 그 집은 아니겠다. 이 시 4연의 2행에 ‘네가 나에게 건넨 잊고 지낸 밥상’이라고 ‘우포늪’을 상관한 것이지만, 이른 아침 식사 후 우포늪에서 등장인물은 없지만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추정컨대 혼자 가지는 않았다고 느껴진다. 그리움이 사철나무의 향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그리운 목향」에서 진한 것은 목향(木香)이 아니라 ‘그리운’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쩌면 ‘목(木)’이 나무 목이 아니라 그냥 ‘목’인 살결의 내음일 수도 있겠다.
「문리버」 오드리 헵번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곡 ‘문 리버’가 떠오르게 한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즉흥적인 여성과 이름 없는 작가와 사랑 이야기를 다룬 줄거리를 유입시키고 있다.
화자는 온통 ‘문리버 문리버’를 독자들도 따라 중얼거리게 하고 ‘달강’이라고 중복적으로 지칭한다. ‘하염없이 네가 달려간 달강’을 보고 있다. 더불어 중첩적이지만 ‘바닷가 한적한 횟집’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문득 강에서 바다로 점진적 연상을 끌어내고 달이 비치는 강을 의인화하듯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있다. 오드리 헵번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추억을 불러내어 음악이 주는 분위기를 느낀다. 강과 바다와 횟집의 이야기가 있는 기억이 있어, 누군들 가슴 속에 추억 한 조각쯤 들춰내지 않을까 싶다.
고향이 경상도인 필자는 평생을 권위적이고 보수적으로 살아왔다. 그날이 있기 이전까지는 밥상 한 번 차려본 적 없고 직접 음식을 해 먹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쌀이 떨어졌는지 김치가 있는지 없는지 라면이 있는지 없는지 챙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주부(主婦) 아닌 주부(主夫)가 되어 주방을 들락거리고 냉장고 문을 시도 때도 없이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 일 이후부터는 밥도 설거지도 내가 하고 빨래도 직접 한다. 이때부터는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라면이 있는지 없는지 절로 챙기게 되더라. 아마 화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깨닫는 때가 되는 모양이라 「망향」이라는 은근한 느낌이 흐르고 있다.
뭔가 짠한 마음이 모여드는 것은, 이 시에서 들여놓은 언어들 탓이기도 하다. 어저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동감을 드러내게 하는 ‘싸늘한’ ‘출출한’ ‘뜨끈한’ ‘후줄근’ 등의 형용사이다. 또 ‘살금살금 바퀴벌레처럼 잠행 가고 싶다’ ‘밀반죽에 눌리고 싶다’ 라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공감이다.
‘냉장고를 연다. 간식으로 먹으라고/금요일이 가져온 김밥을 일요일이 꺼낸다’
「뒤집어 볶아야 할 것들」에서
‘먹으라고’의 의미는 음식을 먹도록 지시하거나 권유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지시나 권유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를 살펴보면 금요일이다. 금요일은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특정 요일을 지칭하는 명사일 뿐이라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금요일에 누군가가 가져 온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군지는 특정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일요일이 꺼낸다. 여기서 일요일은 어쩌면 일요일의 사람일 수도 있고 단순히 일요일을 지칭할 수도 있다.
‘애인이 다른 남자와 여행 중일 때’ ‘혼자 사는 남자’ ‘세프 놀이’ ‘고독 극복하기’ ‘애인 없는 너도나도’ 가 그런 상황을 후원하듯 상상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뒤집어 볶아야 할 것들」에는 오직 반찬만이 아니라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일상, 애인 없는 너도나도 가지고 있는 생각들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인다.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부분이 ‘얘야, 너 밥은 먹고 이러고 있니?’ 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역동적인 행동이 나올 것 같으니 말이다.
‘빨면 커지는 그리움이라는 사탕이/지퍼를 열고 스스로 나오다가/꿈에서의 사랑처럼 자주 길을 잃었다//페트병 뿌지직 밟아 뭉개고 목련이 지는 날/안남색시 들인다는/친구의 웨딩 메일은 탄금대에서/국숫발 같은 비로 넘실넘실 건너왔다’
「오늘이 화이트데이」 중에서
‘빨면 커지는 그리움이라는 사탕’이 어디 있기나 하랴만 왠지 보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다. 어디 보고 싶은 얼굴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증거일 것만 같다. 하지만 그리움이란 왠지 쓸쓸하고 외롭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탄금대에 친구가 결혼한다고 했다가 불숙 취소하고 그러다 아들 낳았다는 소식이 온다. 쉰 중반을 넘어 스물대여섯 살 색시 얻는 친구의 신부는 ‘안남색시’다. 여기서 안남(安南)은 베트남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는 즈음에 화이트데이를 맞는다.
매년 2월 14일이 ‘발렌타인 데이’인데 그 유래는 3세기경 로마제국에서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시켜 준 죄로 순교한 사제의 이름이다. 그가 죽은 날이 ‘발렌타인 데이’인데 지금은 연인들의 날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날은 여자가 평소 좋아했던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허락되는 날이다.
이와 상대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날이 ‘화이트데이’이다. 그러니까 발렌타인 데이에 상당하는 날인 것이다.
화이트데이는 목련이 질 때쯤, 3월 14일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이나 꽃 따위의 선물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밸런타인데이와 함께 연인의 대표적인 기념일이다.
화자는 화이트데이를 맞이하여 누군가에게 사탕을 준비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실행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것을 심리적으로 묘사했다. 애꿎은 빈 패트병을 뿌지직 밟아 뭉개는 모습이 씁쓸한 심경을 다 담고 있는 것이 그렇다.
괜히 전봇대 옆에 세워둔 연탄재를 발로 차고 빈 깡통을 툭 차버리는 행동, 우리 모두 한 번쯤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뭔지 모르게 표시할 수 없는 욕구불만으로 인한 무의식의 무조건적 반응이라고나 할까.
‘나 혼자인 것이 슬며시 서럽네, 멀리서 바퀴에 감기는 물소리 점점 다가오네’
「네시 이십삼분」 중에서
자다가 깼을 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있다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불러도 누구도 대답 없는 어둠의 공포를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때, 불안감과 밀려오는 공포는 심히 감당하기 힘이 든다. 밤 네 시 이십삼 분에 문득 빗소리에 잠을 깼다. 어둠은 귀를 더욱 열리고 하고 아주 사소한 현상까지 크게 들리는 밤이라 외롭다. 그래, 서럽다. 온갖 소리란 소리는 다 접수되고 가물어진 기억은 물러나는 법이다. 다양한 밤의 색깔을 아는 화자는 외로워서 기쁜, 서러워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밤을 모르는 우리는 속이 말라비틀어진 사람들이다. 그 시간 코 골며 자는 나도 메마른 류의 그런 사람이다.
「겨울 잠행」에서는 화자의 추억이 있는 ‘배나무밭’은 겨울 배나무밭은 추억의 사냥터라 했지만 그곳이 어딘지 어떤 곳인지 특정하기 쉽지 않으나 화자만의 암시하는 곳으로 유추해 볼 뿐이다. 이 시에서는 ‘산토끼’와 ‘네’와 ‘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산토끼‘와 ‘네’는 같은 존재라고 직시하고 있다. 또한 ‘배나무 아래에는 찔레 열매처럼 생식기 붉은 네가 있다’고 했다. 동굴 동글하니 앙증스러울 지경으로 붉은 귀여운 모습일까.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1연에서 ‘눈에 취해 비틀거리는 비탈의 산토끼를 무모하게 단번에 움켜잡으려다가 발톱에 손등이 긁혔다’고 소회하고 있다. 그것은 산토끼가 ‘시각적 아름다움에 취한 상태’임이라 믿은 포획자의 욕심으로 단번에 실행하였으나 놓쳐버린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포획자의 자존심에 상처가 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화자는 2연에서 ‘또다시 내 손에 잡힐 산토끼’로 단정 짓고 용기를 내는 진행형으로 보아 어느덧 집까지 찾아가는 대담함이 소통의 한계치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4연에 와서는 문득 ‘밤늦도록 마신 술로 아파트 동 출입구 비밀번호를 자꾸 틀리는’ 것으로 산토끼의 집이 하늘 아래 ‘별’인 것을 깨닫는다.
「겨울 잠행」에서 ‘잠행’이란 ‘남들 모르게 숨어서 오고 가는 행위’를 말한다. 화자는 흔히 일어나는 감정의 거리를 오고 가는 행위를 토끼 사냥하는 행위로 변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술 취한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1연에서는 산토끼 사냥, 2연에서는 과정, 3연에서는 진행, 4연에서는 괴리, 5연에서는 희망이 엿보이고 있다.
이렇듯 화자의 시 속에는 묘한 감정들이 숨어있어서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보물찾기하듯 퍼즐을 조합해 보는 맛이 있다.
「불문율」에서도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적인 것 같으면서 어디서 불러들인 배역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사실적인 부분을 더욱 실감 나게 하는 것이 장소이다.
‘냉천길’ 어디쯤에 있는 ‘은행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마치 ‘야간열차로 달려가는 아로마 향의 신음’이라고 기억해 낸다. 필자는 아로마 향의 신음의 주인공을 알지 못하지만 은행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어쩌면 까마득한 기억을 찾아내는 소리였으리라. 여기서 경락마사지 다녀온 ‘박여사’와 ‘늙은 공단 남자’ 그리고 ‘학다리건설 사장’이 나온다. 그들 모두는 엑스트라일 뿐 다만 ‘너’와 ‘나’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연의 내뱉는 언어에서 ‘좀 더 측은하게, 좀 더 잔인하게’라고 비장함이 엿보임은 왜일까. 암튼 이 일은 ‘불문율’이라고 답이 뻔한 이야기임이라
‘스마트폰 속에는 웃을 때만 어여쁜 내연녀가 산다’로 시작하는 「내연의 미학」에서는 스마트폰을 바꾸면서 흔히 있는 생각이나 행동들을 표출해 놓았다. 스마트폰을 새로 바꾸면 이사하는 날처럼 버릴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은 챙기게 된다. 스마트의 저장된 기록도 그와 같아서 때때로 버릴 것은 버리며 ‘잘 처먹고 살아라’고 원색적인 이별하기도 한다. 단순히 과거의 정보 하나 지우면서 내놓는 마음이 위장되지 않은 인간적이다.
‘셀카로 찍어 보내온 웃는 사타구니 사진이 오늘 인간이 내 감기의 숙주였다’ ‘큰 젖가슴 좋아하다 된통 당한 오늘 인간이길 포기’ 들을 제시한다. 그만큼 적나라한 인간 세상의 이야기가 로봇으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인의 미묘함을 고발하듯 직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숱하게 있어도 ‘톡 톡 건드리면 늘 웃어주는 그녀이기에 입김 후후 불어 닦고 또 닦는다’고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비루먹은 유기견같이/떠돌이 행성이 될지도 모른 채/나는 고드름 속을 마구 달렸다’
「서글픈 공백」 마지막 연에서
‘사는 게 추워서’ ‘울먹이며 차를 몰고 달리다’ ‘결별 통보’
몇 개의 문장만으로 황량한 동대구로의 크리스마스트리를 희롱하고 도망가는 찬바람이 느껴진다.
마지막 연에서 그런 감정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한다. 그 겨울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움켜쥐고 있을까.
돌배나무 지붕 아래 남자와 여자의 동거는/18개월이 딱 좋았다//복숭아 솜털이 닿으면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나와/토마토를 만지면 온몸이 부어오르는 사람이/넘나든 알레르기의 주방 문턱/스스로 바른 독에 중독되어 버려 무심한 서로는/물컹해질 대로 물컹해졌다//생각해 보면 그녀와 내가 지나온 길은/조곤조곤 위로하며 건너온 외나무다리/복숭아를 깎는 당신이 있고, 난 고작 토마토를 만지작거린 게 전부//받기에 급급하느라 되돌려주지 못한/동거의 시간은 못내 아쉽게 흘러갔다//들켜버린 화냥기 돌배나무 갑질에도/고스란히 남겨진 고마움은/주방 안의 허기를 채워주던 날들
「뒤늦은 후회」 전문
‘동거는 18개월이 딱 좋았다고’ 「뒤늦은 후회」를 전개한다. 왜, 18개월일까? ‘들켜버린 화냥기 돌배나무 갑질’ 때문이라고 한다. 화냥기는 남자를 밝히는 여자의 바람기를 말하는 것이니, 아마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18개월의 고마움은 여전히 남아 허기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남녀는 서로 끌림으로 관계를 시작한다. 그 끌림의 동기는 여러 가지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남자와 여자의 동거는 서로에게서 없는 그 무엇이 매력으로 발진 되었을 것이다. 서로 합궁이 맞았던 이유일 것이다. 남녀가 사랑하면 그들대로의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하고 더불어 궁합이란 것을 보기도 한다. 궁합이란 남녀의 생년월일시를 음양오행에 맞추어 보아 부부로서의 합궁을 예측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비유적으로는 사람이나 사물이 어울리는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어쩌면 음과 양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세상이 유지된다고 보는 사상과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남녀의 성격도 많이 투영되기도 한다.
필자가 궁합이나 음이니 양이니 너스레를 떠는 이유가 이 시에서 그런 정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2연에서 ‘복숭아 솜털이 닿으면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나’와 ‘토마토를 만지면 온몸이 부어오르는 사람’의 상호보완적 궁합이 엿보인다. 흔히 궁합이 좋다고 시작된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다른 점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없던 점들이 매력으로 보이다가 권태의 시간이 다가오면 드디어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합리적 변명이 되겠지만, 대체로 뒤늦은 후회감을 느끼는 이유는 좋았을 당시는 분명 진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버드나무 그림자 흘러드는 물에, 떠내려가는 얼음장 일렁이도록 돌을 던진다//너에겐 잠시 아픔일 수 있지만’
「개여울 연가」 중에서
추운 날씨에 앙상한 버드나무 그림자가 흘러드는 물이니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겨우내 캉캉 언 얼음장이 떠내려간다고 했으니 물에 녹아내리는 광경이 곧 봄이 옴을 예감하게 한다. 여기에 너에게 잠시 아플 것을 짐작하면서도 돌을 던진다. 물론 ‘잠시’라고 했으니 일시적으로 이는 작은 자극쯤으로 보면 되겠다. 너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을 은유적 표현으로 물과 돌을
등장시킨 것이라 짐작된다.
작침(鵲枕)은 까치가 눌어다 놓은 물건을 베개처럼 쓴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기다림의 의미를 가진 은유로 종종 쓰인다. 그러니 「작침(鵲枕)을 버리다」는 오랫동안 기대하고 있는 일이나 기다림 등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랫동인 기대하고 있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에 대한 단서가 ‘너 아니면 안 된다는 까치와 너 없어야 내가 산다는 까치가/서로 죽창 들고 들려주는 언쟁’이라는 대목이다. 현시대의 극단적 정치적 정서 등을 추리해 볼 수 있겠다.
「적요의 그늘」에서 ‘적요’는 적적하고 고요함음 의미한다. 쓸쓸함이 벌써 내린다. 청둥오리는 날아가야 함에도 날지 못한다. ‘청둥오리를 당신은 지금 보고 있다’ 여기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필자의 관점에서는 독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2연에서 눈멀어버리고 꿈조차 잃어버린 ‘청둥오리’는 극히 정상적이지 못하다. 마지막 연에서 그대 또한 ‘나처럼 청둥오리가 될 그대’라 했으니, 이와 같은 일은 너도 그렇다는 것이다. 화자와 그대를 동일시 하여 적요의 운명 속에 겹쳐놓는 것이 어쩌면 고독과 그리움에 침식된 화자의 마음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3부
「그리운 인가」에서 사람 사는 곳이 그립다는 것은 그만큼 격리되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화자는 ‘나는 자연인인가’라는 의심을 해보게 한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10년이란 세월을 쌓아온 모습을 그리고, 침묵 속에 피어난 추억이나 감정들이 ‘먼 집의 불빛’처럼 아득하고 그립다는 것을 담고 있다. 독자만의 추억이나 아련함을 들추어보게 한다.
‘술이 익어야 어쩌다 일렁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첨벙거리며 오염된 감응에 눈멀어/돌보지 않은 고성동 금붕어의 원망은/뼛속까지 깊었을 게 분명하다’
「보름 다비」 중에서
서로 민망할까 봐 마주 보지 않는 골목의 쪽창들이 있고 벽이 담이 되고 담이 벽이 되는 고성동 골목을 지나며 기억이 다시 떠오르게 한다. 거기 돌보지 않은 금붕어가 있었음을 재차 확인한다. 무릇 그러한 일들의 상념들을 화장(茶毘)하여 원래의 곳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입맛 잃은 아들을 위해 맷돌로 콩 가는 정겨운 모습과 담장 너머의 여러 광경을 보고 듣는 「가창 별곡」
천지 사방 부끄럽지 않은 곳 한 곳도 없다고 깨달음의 「나무南無의 반경」
또 「십우도(十牛島)의 텃밭」에서는 수행자가 입문에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 찾기에 비유하여 10단계로 나타낸 그림인 십우도 도는 심우도를 소환하여 ‘너’와 ‘나’의 처지를 더듬는다.
다소 3장에서는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눈이 종교적인 관점에 조명하여 예리하리만치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구간(區間)은 어느 특정 지점과 어느 지점까지의 영역을 지칭한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고속도로에서 ‘구간단속’구간이라는 용어를 자주 접하기에 왠지 조심스러움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이는 거리를 측정하는 개념에서 쓰이는 단어인데 화자는 감정의 구간을 설정해서 그 정의를 「감응의 구간」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와의 관계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느낌을 특정하는 간격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익룡의 발톱’과 ‘희빈의 손톱’으로 선물로 은유하고 있다. 왜 손톱으로 은유했을까 추정해 보자.
손톱과 발톱은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요 힘이다. 그래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인간과 동물을 우화적으로 묘사한 동물농장에서도 권력자의 탐욕이 사회를 지배하는 도구로 묘사하기도 했다.
‘여자에게 먹이를 낚아채던 익룡의 발톱을 선물해 주고 싶어졌다’는 부분은 적어도 그와 유사한 힘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탐욕을 상징하는 ‘희빈의 손톱’을 덤으로 선물한다. 오히려 역발상적 생각으로 절망의 겨울 구간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냉천리(冷泉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속하는데 달성군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곳이고 대구 수성구의 신천의 원류가 흐른다. 冷泉이란 지명처럼 물이 맑고 시원해 여름이면 대구 시민들의 피서지로도 인기 있다. 그런 그곳에 여름새 해오라기까지 날아드니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곳이다.
한 가족이 등장하면서 「해오라기 명상」에 빠져든다.
「대략 난감」은 은유의 의미를 찾아보게 한다. 사람 관계에서나 일반 생활에서나 난감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잘 아는 지인의 팔에 매달려/후들후들 빠져나오며 빙싯거리는 어제의 얼굴이/꽃가루 털어내던 복사꽃이었다니’라는 5연에서의 눈에 보이는 현상에 혼잣말 같은 또는 혼자만의 느낌, 그런 생각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무심코 던져버린 복숭아씨가/어두운 길가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는 결론으로 마지막 연을 맺는데 왠지 여운이 남는다.
‘온갖 잡새들은 다 부리를 닫고/ 눈으로 울다가 드디어 생식기로 운다’
「도착, 10분 전」 중에서
마음 다친 새, 온갖 잡새, 비설거지를 가슴으로 하는 새들이 나온다. 여기 등장하는 새가 은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독자의 다양한 상상이 다양한 답일 것이다. 암튼 특정 자극으로 느끼는 무 조건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환경적 불편함으로 호소하는 신호일 수도 있겠다. 눈으로 울다가 몸으로 울다가 생식기로 운다니 표면적 슬픔이 종족 번식의 욕구까지 자극하면서 그 감정의 밀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원숙한 마음으로 다가가 보면 ‘千年 전 어느 날 뜨겁던 이불 속’의 그녀와 비설거지 하는 새와 맞닿아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위장’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였다.
무엇을 왜?
‘千年’이라고 굳이 한자로 명시한 이유가 혹, 위장일까? 아니면‘새’와 ‘너’와 ‘화자’만이 아는 암시의 표식 같은 은밀한 기억의 네비게이션이라도 되는가?
아무튼 ‘너에게 가는 길은 눈물이 아무리 뜨거워도/목숨 따윈 초개인 양/가볍다’
아, 사랑이여. 그리도 뜨겁단 말인가?
장대비와 탁자를 마주하고 추어탕 먹던 날의 추억과 연결 짓는 것은 소심한 독자이거니와 필자 또한 소심한 소인배라 그런 연상이 되는 것을 회피할 수가 없다.
괜한 「유등연지」이지 않음은 마지막 2연으로 되었지만 1연에 비하면 너무나 단조로운 2연에서 그 모두를 밝히고 있다.
‘집의 출입문 손잡이에/여문 연밥 한 줌/걸어주지’
여기 평범한 대사 한마디 없지만, 필자의 가슴 속으로 전하는 묵시적 애정은 쉽게 감지되고 있다.
「산이 좋다, 하늘이 좋다」에서는 ‘오래 들었던 보험 같은 사람’을 두고 산길이나 풀밭에서 꿀을 찾아 날아다니는 ‘모시나비’ 한 마리 곤충채집이라도 하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사람을 놓치고서 마음을 텅텅 비우는 화자의 모습이 초연하다.
나신의 여인이 조각된 재떨이를 두고
‘담배를 피우고 떠난 남자는 욕조의 여자 어느 부위를 뜨겁게 달궈놓았을까?’라고 고민하는 「뜨거운 욕조」에서의 혼잣말이나 ‘복숭아를 만지작거리다가 온몸 가려워진 나를 싸움소처럼 씩씩거리게 하는 모텔’의 「모텔 도도」는 마치 스스럼없이 위장하거나 도포하지 않고 절제하지 않는 전위적 형태의 시인 이상(김혜경)을 다시 더듬어보게 한다. 이것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선택의 책임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시각과도 맞닿아 있다고도 하겠다.
본능이란 숨길 수가 없어 이 눈길을 어쩌란 말이냐, 천하에 산 것 모두 그러할 진데 자연스러운 꿈틀거림을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4부
좀 더 측은하게, 좀 더 잔인하게 냄새의 주방은 뒤가 가렵다. 수시로 피워달라는 수선화를 두고 서지 않는 허리끈을 푼다는 건 민망한 일. 그래도 봄부터 휜 가지 움켜쥐고 끙끙 과당을 펌프질해 놓으니, 다녀간 벌들은 코가 맵거나 배가 부르다. 허리춤도 무던히 꺾이겠다. 하여 냄새는 발 달린 기억이 남긴 또 하나의 감옥이다
「모멸·1」 전문
모멸이라는 단어를 정면에 내세우고 사는 동안 느끼는 감각적 충동과 육체의 반응에 따르는 실존적 경험으로 생기는 여타의 감정을 연속적으로 나열시키고 있다.
「모멸·1」에서는 ‘냄새의 주방’에서 냄새로부터 오는 감각적인 발진이 주는 일이다. 여기서 냄새의 의미는 이성만이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이리라.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배반하기도 하니까 어쩌다 발동되는 심리적 현상을 그저 상상과 현실의 대응 값은 언제나 다른 법이다. 누구나 숱하게 느낄 수 있는 이상과 현상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모멸이기도 하겠다. 여기 동원된 ‘수선화’ ‘허리끈’ ‘휜 가지’ ‘과장’ ‘펌프질’ ‘벌’이라는 단어의 은유가 심상치 않다.
너는 어제가 지루하고 나는 뜨거웠던 공중을 지우기 위해 네가 관심 있는 일 말고는 관심을 버렸다. 잠든 척 눈 감아 준 발치를 살금살금 건너서 너는 내게로 오라. 쓰레기라도 버리는 듯, 너는 또 고인돌 문 열고 나오너라. 이미 벗은 팬티이니 고무줄 치마를 가볍게 걷어 올리는 일쯤이야, 뭐가 대수일까. 오늘의 생은 흔들림의 풀밭이고 우리의 내일은 불안하다는 거다. 그러니 우린 잠 못 들면서도 쓴 커피에 혀들 적시는 것이다
「모멸·2」 전문
어제가 지루한 ‘너’와 네게 관심권뿐인 ‘나’가 연속성 있는 만남을 이루고자 속내를 투영시키는 마음이 엿보인다. ‘살금살금 건너서 너는 내게로 오라’ 얼마나 간절한 표현이기나 한가.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상황을 들여다보면 ‘잠든 척 눈 감아 준 발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명 화자의 발치는 아니니, 누군가 묵인한 발치는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묵시적으로 관계를 인정하는 발치일 것이다. 어쩌면 독자의 발치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벗은 팬티’이니 인내는 무의미가 하다는 것이지만 굳이 여기서 드러내는 현실은 찹찹하게 스테이건트(stagnant)한 것이다. 은근한 욕망에 대한 무관심이 주는 상처는 부부간에도 흔히 발견되는 비루함의 감정이다.
비탈에 모질게 박힌 돌에 걸터앉아서 말을 잃어버린 나는 말 대신 먼저 흘러내려 흩어진 돌들에 테두리를 그어 봅니다. 들고 갈 수 없는 돌의 무게를 알기에 남기는 표식의 반경, 꽃잎 자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당신은 눈치챌 것 같아서 서럽도록, 그러나 다 잃어버리고 돌아서는 나에게 꿈속 어머니는, 물살을 떠밀어 등짐으로 지고 갈 자루 하나를 보내주시는 거였어요. 몸뚱이는 쓸 만큼 다 쓰고 누덕누덕 기운 껍질로 돌멩이라도 담아 돌아오는 거라고
「모멸·3」 전문
‘비탈에 모질게 박힌 돌에 걸터앉아서 말을 잃어버린 나는 말 대신 먼저 흘러내려 흩어진 돌들에 테두리를 그어 봅니다’에서는 지난 행위에 대한 추억을 낱낱이 세어보면서 회상하고 있다. 지난 일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서 기억으로 소유할 뿐이겠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미는 ‘등짐용 자루’는 어쩌면 감각적이면서 소유적인 결실을 의미하는 것, 현실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짐’을 감당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즉 스스로 감당할 마음의 짐을 기어이 등에 지고 살아가라는 스스로의 당부인 것이다. 집착을 관통하는 현실이 모멸일까만,
강제 이주 고려인 블라드미르씨처럼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을 때 불쑥 나타난 그녀 분주하게 보따리를 싼다. 쉰을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언제 하늘이 시커먼 털 비집고 붉은 아가리를 벌리고 목숨 거두어갈지 모르니. 시시때때로 망신스럽지 않게 치부는 잘 씻어 닦아 둬야 한다고 믿는 나는, 건네받았던 의미의 손수건을 말없이 되돌려 준다
「모멸·4」 전문
‘블라드미르’는 고려인 3세이며 한국에 오기 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지낸 학자이며 시인이다. 강제 이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는 장면이 소개된 KBS 다큐 3일은 2021년 11월 22일~24일까지의 기록을 소개했다. 아마도 그처럼 기다림의 간절함을 불렀으리라.
그런 화자는 그런 기다림의 끝에는 목숨을 거두어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보자, 화자의 생각을,
‘하늘이 시커먼 털 비집고 붉은 아가리를 벌리고 목숨 거두어갈’ 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손수건을 되돌려주게 된다니 그 또한 보이지 않는 모멸일 수도 있겠다.
누구도 이해 못 할, 이해하지 않아도 좋을, 그게 너를 향한 내 사랑이었던 거다. 너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내 몸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나는 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모두 찬란한 비늘이다. 사랑하다 죽을 수 있는 물은 얼마나 고요한 침대인가. 매운 고추를 먹다가 생긴 딸꾹질처럼 너는 내게 와서 아픈 물꽃이 되었다. 아닌 넌 벌써 떨어져 흘러갈 꽃이었다. 너의 날개는 검고 도톰한 날개, 너는 지독한 모멸, 슬픔 안쪽은 뭉클했다
「모멸·5」 전문
‘너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내 몸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나는 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모두 찬란한 비늘이다. 사랑하다 죽을 수 있는 물은 얼마나 고요한 침대인가’
사랑의 절정이자 찬란한 허무가 공존하는 순간이다. 특히 ‘너의 날개는 검고 도톰한 날개, 너는 지독한 모멸, 슬픔 안쪽은 뭉클했다’는 것은 찬란한 행위의 최후에 따르는 소회이다. 이미 「모멸·4」에서 발견한 ‘시커먼 털’과 ‘검고 도톰한 날개’는 동질의 연상을 이끌고 있다. 슬픔 안쪽은 뭉클했다. 여기서 슬픔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니 얼마나 진한 감동일까 추리하게 한다.
연작시 전체를 아울러 보면 모멸이라는 단어를 정면에 내세우고 사는 동안 느끼는 감각적 충동과 육체의 반응에 따르는 실존적 경험으로 생기는 여타의 감정을 연속적으로 나열시키고 있다. 차마 섣불리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과감하게 배치한 필력이 대담하다.
박윤배 시인의 시를 감상해보면 왠지 시 속에서 일상의 일들이 마치 단편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듯이 감미롭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마치 어던 영화의 각 장르 중에 묵시적 한 컷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추적해 보는 재미가 있다. 단순히 읽고 말기에는 알록달록한 생각이, 하도 다양해서 끈적한 미련이 남는 것이다.
흔하게도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알싸한 여운과 진한 향기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온전히 특정 객체로 프로그래밍하는 솜씨가 참으로 다양하다고 하겠다.
‘하루를 사는 일에 바빠서 자정 넘겨, 물에 후루룩 밥을 만다’고 「물밥」을 세상을 열고 있다. 그래도 바빠서 행복한 물밥이겠다. 필자는 억제된 자유 속에서 하루의 반찬도 없는 끼니를 학창 시절의 한 가지 반찬으로 먹던 도시락을 떠 올리며 후루룩 먹는데 그쯤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참선에 든 비슬산 참꽃 그리고 너와 나 사이’라는 「관계·2」에서는 아직 「관계·1」을 만나지 못해 다소 생소하다만 ‘너와 나’ 그리고 ‘관계’에 참선을 불러왔다. 흔히 쓰이는 참선이란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 본다.
참선(參禪)이란 ‘선사(禪師)에게 나아가 선도(禪道)를 배워 닦거나, 스스로 선법(禪法)을 닦아 구함’을 의미한다니 여기서 관계란 ‘너’와 ‘나’는 각자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는 시간이겠다.
지우가 보내온 ‘남녀가 짝은 사진’에서 ‘나를 위해 질윙크, 필러 수술까지 한 여자’가 발견된 충격적 일이 어디 흔한 일인가.
「비참의 사원·1」에서 아파하는 세상을 석가여래불도 아는가, 「비참의 사원·2」에서 매미는 한 계절뿐이란 것을 명분처럼 삼고 숲으로 날아갔다. 어찌 그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첨부된 그곳에 가겠는가, 강우 남자여 호수 여자여. 지워지지 않아 차라리 새겨두는가.
「가창에 살아요」에서는 ‘메밀꽃 피는 소리’와 ‘주천강 물소리’와 ‘북진나루 뗏목’이 고향 평창의 그리움인데 터 잡고 사는 가창에서 그 본향을 향한 향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도 「오소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그날로」에서 그 이유를 찾게 된다.
‘등불이 켜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기다려주는 당신이 없다’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박하사탕」처럼 진한 여운이 있는 그리움을 안고 산다. 강담하지 못하는 그리움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리움은 박하사탕인가.
캄캄한 동굴에서/누구를 기다려 천년을 살았나/햇볕 들지 않아 두 눈마저 멀어버린 물고기//하얗게 식어버린 네 심장은/세월의 물길 거슬러 내게로 날아온다//이마엔 그리움이 남긴 상처/팔월을 건너온 화살이 되어 가을산 붉게 달군다//굴러와서 굴러갈 돌무더기/이리저리 헤엄치며 부딪치다가 입술이 붉어진 물고기//
저녁노을 다 지워지기 전에/또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슬픈 사랑아//눈멀고 귀마저 멀어버린/너는, 나의 화살물고기
「화살물고기」 전문
필자에게 다소 생소한 ‘화살물고기’는 이 시는 시집의 표제 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화살물고기는 어떤 어종인가 살펴보자. 화살물고기는 ‘시어(矢魚)’에서 유래했으며, ‘살(화살)과 기(명사화 접미사)’로 ‘화살을 맞은 물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는 ‘미끈주홍망둑’이 대표적 예시라 한다. ‘미끈주홍망둑’은 캄캄한 동굴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물고기로, 눈과 피부가 퇴화되어 주홍색을 띤다고 알려져 있다.
대구신문에 밝힌 글에서 발췌했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서라도 꼭 만나고 싶은 사랑을 노래로 만들기 위해 쓴 그런 시이다. 전에 썼던 자시自詩 ‘수인囚人’에서 물고기를 데려와 ‘화살물고기’라는 가곡의 곡으로 붙여 널리 몇 차례 무대에 올려 노랫말로 연주된 바 있다. ‘눈멀고 귀마저 멀어버린/ 너는, 나의 화살물고기’이면서 떠났던 화살이 다시 물고기가 되어 돌아올 거라는, 아니 지구를 몇바퀴 돌아서 라도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이 시는 표현하고 있다. 그 사랑은, 윤회를 여러 번 건너뛴 다음에라도 꼭 만나게 될 그런 사랑일 테니.”
연초록 커튼을 치는 문밖의 은행나무를 보고 ‘사랑이, 사랑이 가만가만 오려나 봐요’라고 희망을 예감하고 있다. 실존적 은행나무를 두고 이르는 희망이니 계절이 바뀌면 현상으로 이뤄질 것이라 믿게 한다. 독자 모두에게 그런 은행나무 사랑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 필자 또한 남다르지 않아 지극히 실감하게 된다.
봄날/어느 절집 가는 길/줄지어 선 늙은 벚나무들/화들짝 꽃을 피웠다/꽃구경 나온 사람들 틈/개중 하나인 나는/나무의 머리맡에서/구겨 던진 약봉지/버스럭거리며 펴지는/소리, 여기서 또 들었다/날이 갈수록 늘어나는/온갖 약들이 한꺼번에/서랍을 열고 나온 것처럼/길들은 죄의 빛깔/쓰린 위장처럼/와글거렸다/꽃이좋아서 모여든 그들/꽃 앞에서 사진을 찍든 말든/그건 내 알바아니고 면 가지부터 저릿한 나무/꽃의 무게까지 견디는 게/얼마나 안쓰럽던지/속은 시꺼멓게 썩어가면서/아직은 살아있다는 듯/어버이날 가슴 앞섶에/꽃 하나 달고 있는/아래층 할매 같아/그저 반가운/그런 봄날
「감기 앓는 나무」 전문
꽃구경 나온 사람들이 주는 자연의 고통과 인간의 죄의식을 교차시키며, 아름다움과 추함, 생명과 소멸의 경계에서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시다. 화려함에 현혹되지 말고 내면의 진실을 직시하라는 신호를 느낄 수 있다. 또 희망을 잃지 않는 자연의 힘을 찬탄하며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온갖 약들이 한꺼번에/서랍을 열고 나온 것처럼/길들은 죄의 빛깔/쓰린 위장처럼 와글거렸다’ 필자의 눈을 멈추게 하는 부분이다. 육체적 아픔과 번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함께하고 있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 특히나 공감된다.
‘둘러봐도 살구나무는 없는데/첩첩산중 살구나무는 꽃을 피워요’
「걸어온 살구나무」 중에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도 분명 살구나무는 꽃 핀다. 우리 사랑도 희망도 그렇게 피고 있다. 그러하니 아무리 난감한 여파가 있은들 뭔 걱정이 되랴. 굴욕의 기억은 그저 기억일 뿐이려니, 눈만 돌려도 사라진다. 꽃은 반드시 피는 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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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0일 0시45분
기억을 보존하는 의미에서 소회를 남긴다.
박윤배 시집
자서
겉은 멀쩡한 듯/속까지는 다 아물지 않는/성처를 남겨,/바글거리는 구더기를//굴욕의 기억에서/카우다 보니,/무심하던 하늘에/몰려드는 초파리 떼//자욱한 먹구름/망연히 바라보는/나는 한 마리 왜가리//매워진 눈을/비릿해진 부리를/이슬 잔뜩 머금은/달개비꽃에 닦는다
「밤낚시」 전문
1부 17편, 2부 17편, 3부18편, 4부 18편
1부
한때 내 눈빛 흡입하던 넌 탐스러운 꽃/이제 내가 너를 청소한다//온갖 먼지 속에서도 너는, 다시 꽃으로 피려 하겠지만/살 비벼대는 날벌레들은/슬슬 배가 고파서/꽃인 너를 뜯어먹고 말거야//가득 차면 비워야 할 속, 아직 다 채우지 못한 나는/이 구석, 저 구석 머릴 들이 민다//죽은 날벌레와 함께 둥근 통로를 지나 네가/안착한 곳은 블랙홀 너머의 낮선 우주//난, 아직은 사는 이유가 조금은 불분명한 것 같아서/지구에 좀 더 머물러야 할 듯//은하 너머로, 먼저 가 있으라고/엷은 미소에 손까지/바스라지는 너를 향해 흔들어준다
「진공청소기」 전문
‘한때 내 눈빛 흡입하던 넌 탐스러운 꽃/이제 내가 너를 청소한다’
주체할 수 없던 사랑을 이제는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사랑에 빠져 정신을 빼앗겼던 상태를 진공청소기의 기능적 동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 감성적 사랑을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진공청소기로 환치해 놓았다.
‘살 비벼대는 날벌레들은/슬슬 배가 고파서/꽃인 너를 뜯어먹고 말거야’
믿은 사랑에 화자의 배신감이 중첩되어 보인다. 그대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고 또 당부하고 있다.
욕실에 놓아둘 향긋한 비누를 사러 간다/구만리 밖 매밀린 먼로 찾아오는 날 뒷불을 위해/세숫대야도 하나 사야겠어!//너의 냄새는 대야에 남고/비누 냄새는 너를 따라가 버리지/또 다른 애인을 만나러 가야 하는 너를 위해/참 잘한 거라고 나는/비누의 등을 토다토닥 두드려 주지//하긴 나도 수시로 뒷물이 필요해/예전에 나와 알던 여자는 손가락에서 항문 냄새가 났어/내 배설의 냄새가 얼마나 불쾌했으면/수표 한 장 똥 잘 닦고 살라고/획! 던지고 떠났겠어//그러니 향 좋은 매릴린 먼로표 비누여, 너는/한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내 무의식까지/빡빡 문질러 골고루 씻겨야 하지/먼 길에 든 먼로는 끝내 돌아올 기약 없고/클레오파트라도 오래전 떠났고/세숫대야와 함께 펄럭이며 말라가는 비누의 세계여/세속의 욕실을 끝끝내/마르고 닳도록 지켜야 하지
「암울한 비누」 전문
비누, 세숫대야, 매릴린 먼로, 뒷물, 예전에 알던 여자, 손가락에서 항문 냄새, 내 배설의 냄새, 수표 한 장, 똥, 향, 내 무의식, 클레오파트라, 세속의 욕실 등 일상의 단어들이 등장한다.
떠난 사람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인정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상실감일 뿐이라 사랑 자체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비누 냄새는 너를 따라가 버리지’라는 부분을 되씹어보자. ‘비누 냄새는’이라고 주격조사를 사용한 것은 다음에 나올 의미는 그와는 다르다는 의미이다. 즉 앞 행에서 제시한 것처럼 ‘너의 냄새는 대야에 남았다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체취는 사라지지만 비누의 향기는 남았다. 이제 사라져버린 사랑과 남아있는 추억의 잔상을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사랑을 위해 준비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떠나간 사랑을 관능적 유혹을 상징하는 매릴린 먼로로 비유했다.
그 짜릿한 애인의 체취는 여운과 같아 기억에 머물지만, 원래의 느낌인 감촉들은 애인을 따라 떠나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랑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으니 그로 인한 상실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내면을 일상적 사물로 투영했다. 즉 비누의 소모적 성질을 통해 일시적인 사랑의 덧없음과 삶의 무상함으로 연결하고 있다.
「뿔의 맛, 사는 맛」에서는 시제에서 밝혔듯 일상생활에서 뿔의 맛과 사는 맛이 중첩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뿔의 맛이란 어물전에서 등 두꺼운 칼날로 내리치는 아주머니의 분노다. 그 분노에 조각난 동태, 가을무에 청양고추를 넣고 팔팔 끓인 칼칼한 맛을 사는 맛으로 병치해 놓았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라면 한 봉지 끓여놓고’로 시작하는 「불두화」는 또 어떤가. 일상의 사소한 장면 속에서 얻는 깨달음의 순간을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끓여놓은 라면에서 부처가 보인다는 현상은 부처와 관련된 상징이나 이미지가 우연히 눈에 띄는 경우를 의미할 수 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시 불두화를 탄생시켰다.
‘진짜 먹고 싶은 건, 저 꼬불거리는 경전’ 화자는 라면 면발을 보고 불교의 경전으로 연상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아마도 이날 밤을 지새웠는지 ‘새벽달’이 쭈르르 잘게 부서진다.
「미꾸라지」에서는 7~8월경 비 오는 어느 날에 청도의 연꽃 명소 유등연지와 풍각면, 이서면으로 이동하면서 청도읍성까지 가는 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뜨끈한 청도 추어탕을 먹었다는 것이니 아마도 한나절쯤은 온전히 청도의 분위기에 젖었나 보다. 청도의 옛 역사를 기억해 내고는 마치 미꾸라지 같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고 있다. 아마도 40여 년쯤 전이나 되었을까? 청도역 앞의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어 본 추억이 있다. 맛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모여 다니곤 했으니까 먹는 맛 가는 맛에 빠졌다. 그렇게 추어탕 한 그릇 정도 비우고 나면 왠지 모르게 미꾸라지 같은 힘찬 몸부림이 전이되는 것 같으리라. 그런 힘찬 느낌으로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있는 화양읍의 지석묘로 가는 길인 것으로 보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상처 많은 여자 데리고 살 팔자’라는’ 「바른생활지침서」에서와 ‘두 손으로 잡아 벌리고/들이미는 혀끝이/뜨겁도록 달다’라는 「따뜻한 밀봉」에서는 화자의 고독한 밀애가 느껴지기도 하고 ‘거울 속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과 ‘방충망 찢어진 틈 밖으로 툭툭 턴다’는 장면의 「말년의 혼밥」은 그저 고독이 윙윙거리는 공명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뿔은 물건이나 동물의 머리에 솟은 단단하고 뾰족한 구조를 일컷는데, 화자는 뿔의 정의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그 정의를 내리고 있다. 털도 수염도 뿔이라는 것이다. 뿔은 개체 간 사용되는 무기이면서 도구이다.
이 시 1연 4행에서 ‘자신을 찌를 순 없어 공중은 더 슬퍼졌다’는 것은 뿔은 스스로를 찌를 수 없다는 것, 즉 슬픔이나 고독이나 아픔 등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 슬프다는 의미일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중생이라 지칭한다면 거기쯤에서 송곳니이다. 즉 송곳니는 앞니와 어금니 사이에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이다. ‘그게 나다’라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네 발이 있으면 날개가 없고 송곳니가 있으면 뿔이 없는 법이니 털이라도 뿔이라 고집하는가, 그 함의하는 바가 크다.
온몸 땀에 젓는 줄도 모르고 어젯밤 불륜 남녀 다녀간 카
페 바닥을 청소한다. 에틋함은 끈적끈적해서 쓸지 말고 닦아야 한다
머슴이 마님을 그리워하듯, 질퍽한 거시기 향기 한번 맡겠다고 이 품삯도 없는 일. 알고 보면 지독한 자학, 죄의 냄새 감추려고 구석구석 발라둔 집착의 덫 아로마 향기에 기어코 난 길들여졌다
이렇듯 세상은 사소하고 웃기는 잡념 하나에 운명의 거미줄은 온몸 챙챙 조여 온다는 걸, 커피 냄새 좇아 날아들었다가 카페 구석에서 죽어 빗자루에 쓸리는 벌레에게서 본다
하룻밤에 거미줄은 몇 개씩 더 생겨나고 날갯짓 한 번에 멀리 날기조차 버거운, 하필 실잠자리는 이번만큼은 사랑이라고 아침까지 늘어진 거미줄에 누워 사지를 버둥거린다
창밖 자귀나무는 죽음 직전에 쏟아낸 정직한 정액에 흠씬 젖었다. 자줏빛 스카프 목에 걸고 자귀나무가 자기처럼 들려주는 귓속말에 나는 또 온몸 근지러워졌다
「자귀꽃 그늘」 전문
아마도 추정컨대 화자는 6, 7월의 어느 날 자귀나무꽃이 있는 카페의 아침을 맞으며, 여러 청춘의 야릇한 지난밤 이야기들을 자귀나무 아래 흔적으로 연결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귀나무는 두 잎을 서로 맞대고 밤을 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합환목’이니 ‘야합수’이니 ‘유정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여기서 ‘금슬(琴瑟)’은 거문고와 비파를 함께 이르는 말로, 두 악기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금슬’의 발음하기 쉬운 형태로 부부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는 ‘금실’을 더 많이 쓰고 있다
또 ‘애틋함은 끈적끈적해서’라는 부분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감정을 실존적 체험적인 점성으로 치환했다는 것이 놀랍고
‘죄의 냄새 감추려고 구석구석 발라둔 집착의 덫’이라고 표현한 부분 즉, 내면의 집착을 냄새로 치환한 부분 또한 경이롭기까지 하다.
‘머슴이 마님을 그리워하듯, 질퍽한 거시기 향기 한번 맡겠다고’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한 무의식적 본능을 그대로 묘사했다. 이것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공통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한 희생적 행위를 냉정하게 분석해 보고 있다.
‘이 품삯도 없는 일’이 알고 보면 지독한 ‘자학’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한 본능에의 유혹을 끊어내지 못하거나 절제하지 못하니, 어쩌면 부정하면서도 체념하지 못하는 그런 행위를 아이러니하다고 제시한다.
‘죄의 냄새 감추려고 구석구석 발라둔 집착의 덫 아로마 향기에 기어코 난 길들여졌다’라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종족 번식을 위한 생명의 정체성으로 결부’ 짓거나 ‘삶의 본질로 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
벌레와 거미줄을 불러와 작은 욕망이 운명의 덫에 걸리는 모습을 자연에서 그 이미지를 불러와 공감을 쉽게 끌어내고 있다.
가창에는 한국마사회 대구지사가 있어 주말이면 경마 경기가 화상으로 열린다. 「가창천 둑길」에서는 배롱나무 아래 찢어진 마권에서 느끼는 희망과 허무를 그리고 참담과 후회 등을 담은 표정을 그려놓았다.
보통 참나무, 밤나무, 느티나무는 암수가 한 몸에 있다고 해서 ‘암수한그루’라고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 소나무, 자작나무 등은 암수딴몸이라고 분류한다. 하지만 버드나무는 꽃은 암수딴몸이라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에 모두 피지만, 암나무와 수나무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물속의 숲」에서는 금호강 변에 군락을 이룬 버드나무를 보고 성업 중인 남녀가 한 몸으로 어울려진 나이트클럽을 불러내고 있다. 기발한 연상이다.
‘벽이 담이 되고/담이 벽이 되는’ 고성동 골목을 지나며 「염치」에서는 ‘골목의 쪽창들’들이 서로 민망할까 봐 마주 보지 않는 광경을 염치라고 표현하고 「물속의 숲」에서는 금호강 변을 지나면서 「술렁」에서는 밤새 시를 기다리다가 터진 입술을 그려놓았다. 「관망」에서는 ‘카페 베란다’에 앉아서 청도 추어탕 한 그릇 비우고 유등연지 함께 간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
‘눈 속에서 각을 세웠던 마음’이 문드러진 자리를 떠올리는 「문드러지다」에서 ‘문들어지다’의 의미는 ‘썩거나 무르게 되어 힘없이 처져 떨어지다’ 또는 ‘몹시 속이 상하여 견디기 어렵게 되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자가 보여주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즉, 속이 몹시 상하여 떨어졌지만, 아마도 흔적으로 남은 자국이다. 어디 그 자국이 쉽게 지워지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깎는 쓸쓸함을 공감하며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부
특정하고 우포늪에 간다. ‘배꼽 시침에 알람을 맞춘다’ 했으니 혼자 서둘렀던가 보다. 어쩌면 창녕 그쯤에서 아침 식사를 했을까.
하긴 요즘 부곡면 온천 앞에 가면 ‘유퉁의 국밥집’이 있다던데, 거기에 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욱국을 먹었으니 그 집은 아니겠다. 이 시 4연의 2행에 ‘네가 나에게 건넨 잊고 지낸 밥상’이라고 ‘우포늪’을 상관한 것이지만, 이른 아침 식사 후 우포늪에서 등장인물은 없지만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추정컨대 혼자 가지는 않았다고 느껴진다. 그리움이 사철나무의 향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쉽다. 「그리운 목향」에서 진한 것은 목향(木香)이 아니라 ‘그리운’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쩌면 ‘목(木)’이 나무 목이 아니라 그냥 ‘목’인 살결의 내음일 수도 있겠다.
「문리버」 오드리 헵번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곡 ‘문 리버’가 떠오르게 한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즉흥적인 여성과 이름 없는 작가와 사랑 이야기를 다룬 줄거리를 유입시키고 있다.
화자는 온통 ‘문리버 문리버’를 독자들도 따라 중얼거리게 하고 ‘달강’이라고 중복적으로 지칭한다. ‘하염없이 네가 달려간 달강’을 보고 있다. 더불어 중첩적이지만 ‘바닷가 한적한 횟집’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문득 강에서 바다로 점진적 연상을 끌어내고 달이 비치는 강을 의인화하듯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있다. 오드리 헵번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추억을 불러내어 음악이 주는 분위기를 느낀다. 강과 바다와 횟집의 이야기가 있는 기억이 있어, 누군들 가슴 속에 추억 한 조각쯤 들춰내지 않을까 싶다.
고향이 경상도인 필자는 평생을 권위적이고 보수적으로 살아왔다. 그날이 있기 이전까지는 밥상 한 번 차려본 적 없고 직접 음식을 해 먹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쌀이 떨어졌는지 김치가 있는지 없는지 라면이 있는지 없는지 챙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주부(主婦) 아닌 주부(主夫)가 되어 주방을 들락거리고 냉장고 문을 시도 때도 없이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 일 이후부터는 밥도 설거지도 내가 하고 빨래도 직접 한다. 이때부터는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라면이 있는지 없는지 절로 챙기게 되더라. 아마 화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깨닫는 때가 되는 모양이라 「망향」이라는 은근한 느낌이 흐르고 있다.
뭔가 짠한 마음이 모여드는 것은, 이 시에서 들여놓은 언어들 탓이기도 하다. 어저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동감을 드러내게 하는 ‘싸늘한’ ‘출출한’ ‘뜨끈한’ ‘후줄근’ 등의 형용사이다. 또 ‘살금살금 바퀴벌레처럼 잠행 가고 싶다’ ‘밀반죽에 눌리고 싶다’ 라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공감이다.
‘냉장고를 연다. 간식으로 먹으라고/금요일이 가져온 김밥을 일요일이 꺼낸다’
「뒤집어 볶아야 할 것들」에서
‘먹으라고’의 의미는 음식을 먹도록 지시하거나 권유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지시나 권유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를 살펴보면 금요일이다. 금요일은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특정 요일을 지칭하는 명사일 뿐이라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금요일에 누군가가 가져 온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군지는 특정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일요일이 꺼낸다. 여기서 일요일은 어쩌면 일요일의 사람일 수도 있고 단순히 일요일을 지칭할 수도 있다.
‘애인이 다른 남자와 여행 중일 때’ ‘혼자 사는 남자’ ‘세프 놀이’ ‘고독 극복하기’ ‘애인 없는 너도나도’ 가 그런 상황을 후원하듯 상상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뒤집어 볶아야 할 것들」에는 오직 반찬만이 아니라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일상, 애인 없는 너도나도 가지고 있는 생각들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인다.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부분이 ‘얘야, 너 밥은 먹고 이러고 있니?’ 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역동적인 행동이 나올 것 같으니 말이다.
‘빨면 커지는 그리움이라는 사탕이/지퍼를 열고 스스로 나오다가/꿈에서의 사랑처럼 자주 길을 잃었다//페트병 뿌지직 밟아 뭉개고 목련이 지는 날/안남색시 들인다는/친구의 웨딩 메일은 탄금대에서/국숫발 같은 비로 넘실넘실 건너왔다’
「오늘이 화이트데이」 중에서
‘빨면 커지는 그리움이라는 사탕’이 어디 있기나 하랴만 왠지 보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다. 어디 보고 싶은 얼굴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증거일 것만 같다. 하지만 그리움이란 왠지 쓸쓸하고 외롭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탄금대에 친구가 결혼한다고 했다가 불숙 취소하고 그러다 아들 낳았다는 소식이 온다. 쉰 중반을 넘어 스물대여섯 살 색시 얻는 친구의 신부는 ‘안남색시’다. 여기서 안남(安南)은 베트남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는 즈음에 화이트데이를 맞는다.
매년 2월 14일이 ‘발렌타인 데이’인데 그 유래는 3세기경 로마제국에서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시켜 준 죄로 순교한 사제의 이름이다. 그가 죽은 날이 ‘발렌타인 데이’인데 지금은 연인들의 날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날은 여자가 평소 좋아했던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허락되는 날이다.
이와 상대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날이 ‘화이트데이’이다. 그러니까 발렌타인 데이에 상당하는 날인 것이다.
화이트데이는 목련이 질 때쯤, 3월 14일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이나 꽃 따위의 선물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밸런타인데이와 함께 연인의 대표적인 기념일이다.
화자는 화이트데이를 맞이하여 누군가에게 사탕을 준비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실행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것을 심리적으로 묘사했다. 애꿎은 빈 패트병을 뿌지직 밟아 뭉개는 모습이 씁쓸한 심경을 다 담고 있는 것이 그렇다.
괜히 전봇대 옆에 세워둔 연탄재를 발로 차고 빈 깡통을 툭 차버리는 행동, 우리 모두 한 번쯤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뭔지 모르게 표시할 수 없는 욕구불만으로 인한 무의식의 무조건적 반응이라고나 할까.
‘나 혼자인 것이 슬며시 서럽네, 멀리서 바퀴에 감기는 물소리 점점 다가오네’
「네시 이십삼분」 중에서
자다가 깼을 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있다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불러도 누구도 대답 없는 어둠의 공포를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때, 불안감과 밀려오는 공포는 심히 감당하기 힘이 든다. 밤 네 시 이십삼 분에 문득 빗소리에 잠을 깼다. 어둠은 귀를 더욱 열리고 하고 아주 사소한 현상까지 크게 들리는 밤이라 외롭다. 그래, 서럽다. 온갖 소리란 소리는 다 접수되고 가물어진 기억은 물러나는 법이다. 다양한 밤의 색깔을 아는 화자는 외로워서 기쁜, 서러워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밤을 모르는 우리는 속이 말라비틀어진 사람들이다. 그 시간 코 골며 자는 나도 메마른 류의 그런 사람이다.
「겨울 잠행」에서는 화자의 추억이 있는 ‘배나무밭’은 겨울 배나무밭은 추억의 사냥터라 했지만 그곳이 어딘지 어떤 곳인지 특정하기 쉽지 않으나 화자만의 암시하는 곳으로 유추해 볼 뿐이다. 이 시에서는 ‘산토끼’와 ‘네’와 ‘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산토끼‘와 ‘네’는 같은 존재라고 직시하고 있다. 또한 ‘배나무 아래에는 찔레 열매처럼 생식기 붉은 네가 있다’고 했다. 동굴 동글하니 앙증스러울 지경으로 붉은 귀여운 모습일까.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1연에서 ‘눈에 취해 비틀거리는 비탈의 산토끼를 무모하게 단번에 움켜잡으려다가 발톱에 손등이 긁혔다’고 소회하고 있다. 그것은 산토끼가 ‘시각적 아름다움에 취한 상태’임이라 믿은 포획자의 욕심으로 단번에 실행하였으나 놓쳐버린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포획자의 자존심에 상처가 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화자는 2연에서 ‘또다시 내 손에 잡힐 산토끼’로 단정 짓고 용기를 내는 진행형으로 보아 어느덧 집까지 찾아가는 대담함이 소통의 한계치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4연에 와서는 문득 ‘밤늦도록 마신 술로 아파트 동 출입구 비밀번호를 자꾸 틀리는’ 것으로 산토끼의 집이 하늘 아래 ‘별’인 것을 깨닫는다.
「겨울 잠행」에서 ‘잠행’이란 ‘남들 모르게 숨어서 오고 가는 행위’를 말한다. 화자는 흔히 일어나는 감정의 거리를 오고 가는 행위를 토끼 사냥하는 행위로 변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술 취한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1연에서는 산토끼 사냥, 2연에서는 과정, 3연에서는 진행, 4연에서는 괴리, 5연에서는 희망이 엿보이고 있다.
이렇듯 화자의 시 속에는 묘한 감정들이 숨어있어서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보물찾기하듯 퍼즐을 조합해 보는 맛이 있다.
「불문율」에서도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적인 것 같으면서 어디서 불러들인 배역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사실적인 부분을 더욱 실감 나게 하는 것이 장소이다.
‘냉천길’ 어디쯤에 있는 ‘은행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마치 ‘야간열차로 달려가는 아로마 향의 신음’이라고 기억해 낸다. 필자는 아로마 향의 신음의 주인공을 알지 못하지만 은행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어쩌면 까마득한 기억을 찾아내는 소리였으리라. 여기서 경락마사지 다녀온 ‘박여사’와 ‘늙은 공단 남자’ 그리고 ‘학다리건설 사장’이 나온다. 그들 모두는 엑스트라일 뿐 다만 ‘너’와 ‘나’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연의 내뱉는 언어에서 ‘좀 더 측은하게, 좀 더 잔인하게’라고 비장함이 엿보임은 왜일까. 암튼 이 일은 ‘불문율’이라고 답이 뻔한 이야기임이라
‘스마트폰 속에는 웃을 때만 어여쁜 내연녀가 산다’로 시작하는 「내연의 미학」에서는 스마트폰을 바꾸면서 흔히 있는 생각이나 행동들을 표출해 놓았다. 스마트폰을 새로 바꾸면 이사하는 날처럼 버릴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은 챙기게 된다. 스마트의 저장된 기록도 그와 같아서 때때로 버릴 것은 버리며 ‘잘 처먹고 살아라’고 원색적인 이별하기도 한다. 단순히 과거의 정보 하나 지우면서 내놓는 마음이 위장되지 않은 인간적이다.
‘셀카로 찍어 보내온 웃는 사타구니 사진이 오늘 인간이 내 감기의 숙주였다’ ‘큰 젖가슴 좋아하다 된통 당한 오늘 인간이길 포기’ 들을 제시한다. 그만큼 적나라한 인간 세상의 이야기가 로봇으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인의 미묘함을 고발하듯 직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숱하게 있어도 ‘톡 톡 건드리면 늘 웃어주는 그녀이기에 입김 후후 불어 닦고 또 닦는다’고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비루먹은 유기견같이/떠돌이 행성이 될지도 모른 채/나는 고드름 속을 마구 달렸다’
「서글픈 공백」 마지막 연에서
‘사는 게 추워서’ ‘울먹이며 차를 몰고 달리다’ ‘결별 통보’
몇 개의 문장만으로 황량한 동대구로의 크리스마스트리를 희롱하고 도망가는 찬바람이 느껴진다.
마지막 연에서 그런 감정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한다. 그 겨울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움켜쥐고 있을까.
돌배나무 지붕 아래 남자와 여자의 동거는/18개월이 딱 좋았다//복숭아 솜털이 닿으면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나와/토마토를 만지면 온몸이 부어오르는 사람이/넘나든 알레르기의 주방 문턱/스스로 바른 독에 중독되어 버려 무심한 서로는/물컹해질 대로 물컹해졌다//생각해 보면 그녀와 내가 지나온 길은/조곤조곤 위로하며 건너온 외나무다리/복숭아를 깎는 당신이 있고, 난 고작 토마토를 만지작거린 게 전부//받기에 급급하느라 되돌려주지 못한/동거의 시간은 못내 아쉽게 흘러갔다//들켜버린 화냥기 돌배나무 갑질에도/고스란히 남겨진 고마움은/주방 안의 허기를 채워주던 날들
「뒤늦은 후회」 전문
‘동거는 18개월이 딱 좋았다고’ 「뒤늦은 후회」를 전개한다. 왜, 18개월일까? ‘들켜버린 화냥기 돌배나무 갑질’ 때문이라고 한다. 화냥기는 남자를 밝히는 여자의 바람기를 말하는 것이니, 아마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18개월의 고마움은 여전히 남아 허기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남녀는 서로 끌림으로 관계를 시작한다. 그 끌림의 동기는 여러 가지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남자와 여자의 동거는 서로에게서 없는 그 무엇이 매력으로 발진 되었을 것이다. 서로 합궁이 맞았던 이유일 것이다. 남녀가 사랑하면 그들대로의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하고 더불어 궁합이란 것을 보기도 한다. 궁합이란 남녀의 생년월일시를 음양오행에 맞추어 보아 부부로서의 합궁을 예측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비유적으로는 사람이나 사물이 어울리는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어쩌면 음과 양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세상이 유지된다고 보는 사상과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남녀의 성격도 많이 투영되기도 한다.
필자가 궁합이나 음이니 양이니 너스레를 떠는 이유가 이 시에서 그런 정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2연에서 ‘복숭아 솜털이 닿으면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나’와 ‘토마토를 만지면 온몸이 부어오르는 사람’의 상호보완적 궁합이 엿보인다. 흔히 궁합이 좋다고 시작된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다른 점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없던 점들이 매력으로 보이다가 권태의 시간이 다가오면 드디어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합리적 변명이 되겠지만, 대체로 뒤늦은 후회감을 느끼는 이유는 좋았을 당시는 분명 진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버드나무 그림자 흘러드는 물에, 떠내려가는 얼음장 일렁이도록 돌을 던진다//너에겐 잠시 아픔일 수 있지만’
「개여울 연가」 중에서
추운 날씨에 앙상한 버드나무 그림자가 흘러드는 물이니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겨우내 캉캉 언 얼음장이 떠내려간다고 했으니 물에 녹아내리는 광경이 곧 봄이 옴을 예감하게 한다. 여기에 너에게 잠시 아플 것을 짐작하면서도 돌을 던진다. 물론 ‘잠시’라고 했으니 일시적으로 이는 작은 자극쯤으로 보면 되겠다. 너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을 은유적 표현으로 물과 돌을
등장시킨 것이라 짐작된다.
작침(鵲枕)은 까치가 눌어다 놓은 물건을 베개처럼 쓴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기다림의 의미를 가진 은유로 종종 쓰인다. 그러니 「작침(鵲枕)을 버리다」는 오랫동안 기대하고 있는 일이나 기다림 등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랫동인 기대하고 있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에 대한 단서가 ‘너 아니면 안 된다는 까치와 너 없어야 내가 산다는 까치가/서로 죽창 들고 들려주는 언쟁’이라는 대목이다. 현시대의 극단적 정치적 정서 등을 추리해 볼 수 있겠다.
「적요의 그늘」에서 ‘적요’는 적적하고 고요함음 의미한다. 쓸쓸함이 벌써 내린다. 청둥오리는 날아가야 함에도 날지 못한다. ‘청둥오리를 당신은 지금 보고 있다’ 여기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필자의 관점에서는 독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2연에서 눈멀어버리고 꿈조차 잃어버린 ‘청둥오리’는 극히 정상적이지 못하다. 마지막 연에서 그대 또한 ‘나처럼 청둥오리가 될 그대’라 했으니, 이와 같은 일은 너도 그렇다는 것이다. 화자와 그대를 동일시 하여 적요의 운명 속에 겹쳐놓는 것이 어쩌면 고독과 그리움에 침식된 화자의 마음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3부
「그리운 인가」에서 사람 사는 곳이 그립다는 것은 그만큼 격리되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화자는 ‘나는 자연인인가’라는 의심을 해보게 한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10년이란 세월을 쌓아온 모습을 그리고, 침묵 속에 피어난 추억이나 감정들이 ‘먼 집의 불빛’처럼 아득하고 그립다는 것을 담고 있다. 독자만의 추억이나 아련함을 들추어보게 한다.
‘술이 익어야 어쩌다 일렁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첨벙거리며 오염된 감응에 눈멀어/돌보지 않은 고성동 금붕어의 원망은/뼛속까지 깊었을 게 분명하다’
「보름 다비」 중에서
서로 민망할까 봐 마주 보지 않는 골목의 쪽창들이 있고 벽이 담이 되고 담이 벽이 되는 고성동 골목을 지나며 기억이 다시 떠오르게 한다. 거기 돌보지 않은 금붕어가 있었음을 재차 확인한다. 무릇 그러한 일들의 상념들을 화장(茶毘)하여 원래의 곳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입맛 잃은 아들을 위해 맷돌로 콩 가는 정겨운 모습과 담장 너머의 여러 광경을 보고 듣는 「가창 별곡」
천지 사방 부끄럽지 않은 곳 한 곳도 없다고 깨달음의 「나무南無의 반경」
또 「십우도(十牛島)의 텃밭」에서는 수행자가 입문에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 찾기에 비유하여 10단계로 나타낸 그림인 십우도 도는 심우도를 소환하여 ‘너’와 ‘나’의 처지를 더듬는다.
다소 3장에서는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눈이 종교적인 관점에 조명하여 예리하리만치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구간(區間)은 어느 특정 지점과 어느 지점까지의 영역을 지칭한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고속도로에서 ‘구간단속’구간이라는 용어를 자주 접하기에 왠지 조심스러움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이는 거리를 측정하는 개념에서 쓰이는 단어인데 화자는 감정의 구간을 설정해서 그 정의를 「감응의 구간」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와의 관계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느낌을 특정하는 간격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익룡의 발톱’과 ‘희빈의 손톱’으로 선물로 은유하고 있다. 왜 손톱으로 은유했을까 추정해 보자.
손톱과 발톱은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요 힘이다. 그래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인간과 동물을 우화적으로 묘사한 동물농장에서도 권력자의 탐욕이 사회를 지배하는 도구로 묘사하기도 했다.
‘여자에게 먹이를 낚아채던 익룡의 발톱을 선물해 주고 싶어졌다’는 부분은 적어도 그와 유사한 힘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탐욕을 상징하는 ‘희빈의 손톱’을 덤으로 선물한다. 오히려 역발상적 생각으로 절망의 겨울 구간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냉천리(冷泉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속하는데 달성군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곳이고 대구 수성구의 신천의 원류가 흐른다. 冷泉이란 지명처럼 물이 맑고 시원해 여름이면 대구 시민들의 피서지로도 인기 있다. 그런 그곳에 여름새 해오라기까지 날아드니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곳이다.
한 가족이 등장하면서 「해오라기 명상」에 빠져든다.
「대략 난감」은 은유의 의미를 찾아보게 한다. 사람 관계에서나 일반 생활에서나 난감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잘 아는 지인의 팔에 매달려/후들후들 빠져나오며 빙싯거리는 어제의 얼굴이/꽃가루 털어내던 복사꽃이었다니’라는 5연에서의 눈에 보이는 현상에 혼잣말 같은 또는 혼자만의 느낌, 그런 생각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무심코 던져버린 복숭아씨가/어두운 길가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는 결론으로 마지막 연을 맺는데 왠지 여운이 남는다.
‘온갖 잡새들은 다 부리를 닫고/ 눈으로 울다가 드디어 생식기로 운다’
「도착, 10분 전」 중에서
마음 다친 새, 온갖 잡새, 비설거지를 가슴으로 하는 새들이 나온다. 여기 등장하는 새가 은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독자의 다양한 상상이 다양한 답일 것이다. 암튼 특정 자극으로 느끼는 무 조건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환경적 불편함으로 호소하는 신호일 수도 있겠다. 눈으로 울다가 몸으로 울다가 생식기로 운다니 표면적 슬픔이 종족 번식의 욕구까지 자극하면서 그 감정의 밀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원숙한 마음으로 다가가 보면 ‘千年 전 어느 날 뜨겁던 이불 속’의 그녀와 비설거지 하는 새와 맞닿아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위장’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였다.
무엇을 왜?
‘千年’이라고 굳이 한자로 명시한 이유가 혹, 위장일까? 아니면‘새’와 ‘너’와 ‘화자’만이 아는 암시의 표식 같은 은밀한 기억의 네비게이션이라도 되는가?
아무튼 ‘너에게 가는 길은 눈물이 아무리 뜨거워도/목숨 따윈 초개인 양/가볍다’
아, 사랑이여. 그리도 뜨겁단 말인가?
장대비와 탁자를 마주하고 추어탕 먹던 날의 추억과 연결 짓는 것은 소심한 독자이거니와 필자 또한 소심한 소인배라 그런 연상이 되는 것을 회피할 수가 없다.
괜한 「유등연지」이지 않음은 마지막 2연으로 되었지만 1연에 비하면 너무나 단조로운 2연에서 그 모두를 밝히고 있다.
‘집의 출입문 손잡이에/여문 연밥 한 줌/걸어주지’
여기 평범한 대사 한마디 없지만, 필자의 가슴 속으로 전하는 묵시적 애정은 쉽게 감지되고 있다.
「산이 좋다, 하늘이 좋다」에서는 ‘오래 들었던 보험 같은 사람’을 두고 산길이나 풀밭에서 꿀을 찾아 날아다니는 ‘모시나비’ 한 마리 곤충채집이라도 하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사람을 놓치고서 마음을 텅텅 비우는 화자의 모습이 초연하다.
나신의 여인이 조각된 재떨이를 두고
‘담배를 피우고 떠난 남자는 욕조의 여자 어느 부위를 뜨겁게 달궈놓았을까?’라고 고민하는 「뜨거운 욕조」에서의 혼잣말이나 ‘복숭아를 만지작거리다가 온몸 가려워진 나를 싸움소처럼 씩씩거리게 하는 모텔’의 「모텔 도도」는 마치 스스럼없이 위장하거나 도포하지 않고 절제하지 않는 전위적 형태의 시인 이상(김혜경)을 다시 더듬어보게 한다. 이것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선택의 책임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시각과도 맞닿아 있다고도 하겠다.
본능이란 숨길 수가 없어 이 눈길을 어쩌란 말이냐, 천하에 산 것 모두 그러할 진데 자연스러운 꿈틀거림을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4부
좀 더 측은하게, 좀 더 잔인하게 냄새의 주방은 뒤가 가렵다. 수시로 피워달라는 수선화를 두고 서지 않는 허리끈을 푼다는 건 민망한 일. 그래도 봄부터 휜 가지 움켜쥐고 끙끙 과당을 펌프질해 놓으니, 다녀간 벌들은 코가 맵거나 배가 부르다. 허리춤도 무던히 꺾이겠다. 하여 냄새는 발 달린 기억이 남긴 또 하나의 감옥이다
「모멸·1」 전문
모멸이라는 단어를 정면에 내세우고 사는 동안 느끼는 감각적 충동과 육체의 반응에 따르는 실존적 경험으로 생기는 여타의 감정을 연속적으로 나열시키고 있다.
「모멸·1」에서는 ‘냄새의 주방’에서 냄새로부터 오는 감각적인 발진이 주는 일이다. 여기서 냄새의 의미는 이성만이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이리라.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배반하기도 하니까 어쩌다 발동되는 심리적 현상을 그저 상상과 현실의 대응 값은 언제나 다른 법이다. 누구나 숱하게 느낄 수 있는 이상과 현상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모멸이기도 하겠다. 여기 동원된 ‘수선화’ ‘허리끈’ ‘휜 가지’ ‘과장’ ‘펌프질’ ‘벌’이라는 단어의 은유가 심상치 않다.
너는 어제가 지루하고 나는 뜨거웠던 공중을 지우기 위해 네가 관심 있는 일 말고는 관심을 버렸다. 잠든 척 눈 감아 준 발치를 살금살금 건너서 너는 내게로 오라. 쓰레기라도 버리는 듯, 너는 또 고인돌 문 열고 나오너라. 이미 벗은 팬티이니 고무줄 치마를 가볍게 걷어 올리는 일쯤이야, 뭐가 대수일까. 오늘의 생은 흔들림의 풀밭이고 우리의 내일은 불안하다는 거다. 그러니 우린 잠 못 들면서도 쓴 커피에 혀들 적시는 것이다
「모멸·2」 전문
어제가 지루한 ‘너’와 네게 관심권뿐인 ‘나’가 연속성 있는 만남을 이루고자 속내를 투영시키는 마음이 엿보인다. ‘살금살금 건너서 너는 내게로 오라’ 얼마나 간절한 표현이기나 한가.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상황을 들여다보면 ‘잠든 척 눈 감아 준 발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명 화자의 발치는 아니니, 누군가 묵인한 발치는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묵시적으로 관계를 인정하는 발치일 것이다. 어쩌면 독자의 발치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벗은 팬티’이니 인내는 무의미가 하다는 것이지만 굳이 여기서 드러내는 현실은 찹찹하게 스테이건트(stagnant)한 것이다. 은근한 욕망에 대한 무관심이 주는 상처는 부부간에도 흔히 발견되는 비루함의 감정이다.
비탈에 모질게 박힌 돌에 걸터앉아서 말을 잃어버린 나는 말 대신 먼저 흘러내려 흩어진 돌들에 테두리를 그어 봅니다. 들고 갈 수 없는 돌의 무게를 알기에 남기는 표식의 반경, 꽃잎 자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당신은 눈치챌 것 같아서 서럽도록, 그러나 다 잃어버리고 돌아서는 나에게 꿈속 어머니는, 물살을 떠밀어 등짐으로 지고 갈 자루 하나를 보내주시는 거였어요. 몸뚱이는 쓸 만큼 다 쓰고 누덕누덕 기운 껍질로 돌멩이라도 담아 돌아오는 거라고
「모멸·3」 전문
‘비탈에 모질게 박힌 돌에 걸터앉아서 말을 잃어버린 나는 말 대신 먼저 흘러내려 흩어진 돌들에 테두리를 그어 봅니다’에서는 지난 행위에 대한 추억을 낱낱이 세어보면서 회상하고 있다. 지난 일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서 기억으로 소유할 뿐이겠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미는 ‘등짐용 자루’는 어쩌면 감각적이면서 소유적인 결실을 의미하는 것, 현실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짐’을 감당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즉 스스로 감당할 마음의 짐을 기어이 등에 지고 살아가라는 스스로의 당부인 것이다. 집착을 관통하는 현실이 모멸일까만,
강제 이주 고려인 블라드미르씨처럼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을 때 불쑥 나타난 그녀 분주하게 보따리를 싼다. 쉰을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언제 하늘이 시커먼 털 비집고 붉은 아가리를 벌리고 목숨 거두어갈지 모르니. 시시때때로 망신스럽지 않게 치부는 잘 씻어 닦아 둬야 한다고 믿는 나는, 건네받았던 의미의 손수건을 말없이 되돌려 준다
「모멸·4」 전문
‘블라드미르’는 고려인 3세이며 한국에 오기 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지낸 학자이며 시인이다. 강제 이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는 장면이 소개된 KBS 다큐 3일은 2021년 11월 22일~24일까지의 기록을 소개했다. 아마도 그처럼 기다림의 간절함을 불렀으리라.
그런 화자는 그런 기다림의 끝에는 목숨을 거두어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보자, 화자의 생각을,
‘하늘이 시커먼 털 비집고 붉은 아가리를 벌리고 목숨 거두어갈’ 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손수건을 되돌려주게 된다니 그 또한 보이지 않는 모멸일 수도 있겠다.
누구도 이해 못 할, 이해하지 않아도 좋을, 그게 너를 향한 내 사랑이었던 거다. 너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내 몸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나는 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모두 찬란한 비늘이다. 사랑하다 죽을 수 있는 물은 얼마나 고요한 침대인가. 매운 고추를 먹다가 생긴 딸꾹질처럼 너는 내게 와서 아픈 물꽃이 되었다. 아닌 넌 벌써 떨어져 흘러갈 꽃이었다. 너의 날개는 검고 도톰한 날개, 너는 지독한 모멸, 슬픔 안쪽은 뭉클했다
「모멸·5」 전문
‘너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내 몸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나는 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모두 찬란한 비늘이다. 사랑하다 죽을 수 있는 물은 얼마나 고요한 침대인가’
사랑의 절정이자 찬란한 허무가 공존하는 순간이다. 특히 ‘너의 날개는 검고 도톰한 날개, 너는 지독한 모멸, 슬픔 안쪽은 뭉클했다’는 것은 찬란한 행위의 최후에 따르는 소회이다. 이미 「모멸·4」에서 발견한 ‘시커먼 털’과 ‘검고 도톰한 날개’는 동질의 연상을 이끌고 있다. 슬픔 안쪽은 뭉클했다. 여기서 슬픔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니 얼마나 진한 감동일까 추리하게 한다.
연작시 전체를 아울러 보면 모멸이라는 단어를 정면에 내세우고 사는 동안 느끼는 감각적 충동과 육체의 반응에 따르는 실존적 경험으로 생기는 여타의 감정을 연속적으로 나열시키고 있다. 차마 섣불리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과감하게 배치한 필력이 대담하다.
박윤배 시인의 시를 감상해보면 왠지 시 속에서 일상의 일들이 마치 단편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듯이 감미롭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마치 어던 영화의 각 장르 중에 묵시적 한 컷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추적해 보는 재미가 있다. 단순히 읽고 말기에는 알록달록한 생각이, 하도 다양해서 끈적한 미련이 남는 것이다.
흔하게도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알싸한 여운과 진한 향기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온전히 특정 객체로 프로그래밍하는 솜씨가 참으로 다양하다고 하겠다.
‘하루를 사는 일에 바빠서 자정 넘겨, 물에 후루룩 밥을 만다’고 「물밥」을 세상을 열고 있다. 그래도 바빠서 행복한 물밥이겠다. 필자는 억제된 자유 속에서 하루의 반찬도 없는 끼니를 학창 시절의 한 가지 반찬으로 먹던 도시락을 떠 올리며 후루룩 먹는데 그쯤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참선에 든 비슬산 참꽃 그리고 너와 나 사이’라는 「관계·2」에서는 아직 「관계·1」을 만나지 못해 다소 생소하다만 ‘너와 나’ 그리고 ‘관계’에 참선을 불러왔다. 흔히 쓰이는 참선이란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 본다.
참선(參禪)이란 ‘선사(禪師)에게 나아가 선도(禪道)를 배워 닦거나, 스스로 선법(禪法)을 닦아 구함’을 의미한다니 여기서 관계란 ‘너’와 ‘나’는 각자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는 시간이겠다.
지우가 보내온 ‘남녀가 짝은 사진’에서 ‘나를 위해 질윙크, 필러 수술까지 한 여자’가 발견된 충격적 일이 어디 흔한 일인가.
「비참의 사원·1」에서 아파하는 세상을 석가여래불도 아는가, 「비참의 사원·2」에서 매미는 한 계절뿐이란 것을 명분처럼 삼고 숲으로 날아갔다. 어찌 그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첨부된 그곳에 가겠는가, 강우 남자여 호수 여자여. 지워지지 않아 차라리 새겨두는가.
「가창에 살아요」에서는 ‘메밀꽃 피는 소리’와 ‘주천강 물소리’와 ‘북진나루 뗏목’이 고향 평창의 그리움인데 터 잡고 사는 가창에서 그 본향을 향한 향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도 「오소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그날로」에서 그 이유를 찾게 된다.
‘등불이 켜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기다려주는 당신이 없다’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박하사탕」처럼 진한 여운이 있는 그리움을 안고 산다. 강담하지 못하는 그리움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리움은 박하사탕인가.
캄캄한 동굴에서/누구를 기다려 천년을 살았나/햇볕 들지 않아 두 눈마저 멀어버린 물고기//하얗게 식어버린 네 심장은/세월의 물길 거슬러 내게로 날아온다//이마엔 그리움이 남긴 상처/팔월을 건너온 화살이 되어 가을산 붉게 달군다//굴러와서 굴러갈 돌무더기/이리저리 헤엄치며 부딪치다가 입술이 붉어진 물고기//
저녁노을 다 지워지기 전에/또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슬픈 사랑아//눈멀고 귀마저 멀어버린/너는, 나의 화살물고기
「화살물고기」 전문
필자에게 다소 생소한 ‘화살물고기’는 이 시는 시집의 표제 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화살물고기는 어떤 어종인가 살펴보자. 화살물고기는 ‘시어(矢魚)’에서 유래했으며, ‘살(화살)과 기(명사화 접미사)’로 ‘화살을 맞은 물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는 ‘미끈주홍망둑’이 대표적 예시라 한다. ‘미끈주홍망둑’은 캄캄한 동굴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물고기로, 눈과 피부가 퇴화되어 주홍색을 띤다고 알려져 있다.
대구신문에 밝힌 글에서 발췌했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서라도 꼭 만나고 싶은 사랑을 노래로 만들기 위해 쓴 그런 시이다. 전에 썼던 자시自詩 ‘수인囚人’에서 물고기를 데려와 ‘화살물고기’라는 가곡의 곡으로 붙여 널리 몇 차례 무대에 올려 노랫말로 연주된 바 있다. ‘눈멀고 귀마저 멀어버린/ 너는, 나의 화살물고기’이면서 떠났던 화살이 다시 물고기가 되어 돌아올 거라는, 아니 지구를 몇바퀴 돌아서 라도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이 시는 표현하고 있다. 그 사랑은, 윤회를 여러 번 건너뛴 다음에라도 꼭 만나게 될 그런 사랑일 테니.”
연초록 커튼을 치는 문밖의 은행나무를 보고 ‘사랑이, 사랑이 가만가만 오려나 봐요’라고 희망을 예감하고 있다. 실존적 은행나무를 두고 이르는 희망이니 계절이 바뀌면 현상으로 이뤄질 것이라 믿게 한다. 독자 모두에게 그런 은행나무 사랑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 필자 또한 남다르지 않아 지극히 실감하게 된다.
봄날/어느 절집 가는 길/줄지어 선 늙은 벚나무들/화들짝 꽃을 피웠다/꽃구경 나온 사람들 틈/개중 하나인 나는/나무의 머리맡에서/구겨 던진 약봉지/버스럭거리며 펴지는/소리, 여기서 또 들었다/날이 갈수록 늘어나는/온갖 약들이 한꺼번에/서랍을 열고 나온 것처럼/길들은 죄의 빛깔/쓰린 위장처럼/와글거렸다/꽃이좋아서 모여든 그들/꽃 앞에서 사진을 찍든 말든/그건 내 알바아니고 면 가지부터 저릿한 나무/꽃의 무게까지 견디는 게/얼마나 안쓰럽던지/속은 시꺼멓게 썩어가면서/아직은 살아있다는 듯/어버이날 가슴 앞섶에/꽃 하나 달고 있는/아래층 할매 같아/그저 반가운/그런 봄날
「감기 앓는 나무」 전문
꽃구경 나온 사람들이 주는 자연의 고통과 인간의 죄의식을 교차시키며, 아름다움과 추함, 생명과 소멸의 경계에서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시다. 화려함에 현혹되지 말고 내면의 진실을 직시하라는 신호를 느낄 수 있다. 또 희망을 잃지 않는 자연의 힘을 찬탄하며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온갖 약들이 한꺼번에/서랍을 열고 나온 것처럼/길들은 죄의 빛깔/쓰린 위장처럼 와글거렸다’ 필자의 눈을 멈추게 하는 부분이다. 육체적 아픔과 번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함께하고 있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 특히나 공감된다.
‘둘러봐도 살구나무는 없는데/첩첩산중 살구나무는 꽃을 피워요’
「걸어온 살구나무」 중에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도 분명 살구나무는 꽃 핀다. 우리 사랑도 희망도 그렇게 피고 있다. 그러하니 아무리 난감한 여파가 있은들 뭔 걱정이 되랴. 굴욕의 기억은 그저 기억일 뿐이려니, 눈만 돌려도 사라진다. 꽃은 반드시 피는 법이라᠁᠁
-끝-
2025년 11월 20일 0시45분
기억을 보존하는 의미에서 소회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