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를 읽고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시집 머리에 얹다
혼자 온 길/홀로 가면서//행간을 살리고/여백을 넓히고 싶어//늙마의 마당 한편/한등寒燈 하나 내걸고//북한산 골짜기 우이동의 세월이 떨어뜨린/삶의 부스러기를 하나씩 주워 모았다.
을사년 가을, 세란헌洗蘭軒에서
홍해리 적음.
-제1부 봄은 봄만큼 슬프고 28편
-제2부 시여, 우리 헤어지자 28편
-제3부 푸른 시간의 발자국 28편
-제4부 지천으로 밟히는 그리움 27편
-제5부 깊고 깊은 시의 늪 28편
어지간하면 선물 받은 시집은 그날 단숨에 들이키듯 읽고야 만다. 하기야 각각 그곳 지기(地氣)에 찬 물 맛이야 제대로 음미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섭렵하려고 애쓴다.
오늘은 홍해리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를 만났다.
한 자라도 놓칠까 봐 한 편 한편 조심스럽게 숨도 쉬지 않고 보고 또 보았다.
제1부 ‘봄은 봄만큼 슬프고’ 28편, 제2부 ‘시여, 우리 헤어지자’ 28편, 제3부 ‘푸른 시간의 발자국’ 28편, 제4부 ‘지천으로 밟히는 그리움’ 27편, 제5부 ‘깊고 깊은 시의 늪’ 28편, 하여 모두 139편을 모두 시간이 닳도록 읽었다.
수년 전, 한때 밤새도록 읽고 베개를 다 젖게 한 시편들을 떠 올리면서 오늘 또, 시를 배움을 한 하루였다.
제1부
봄은 봄만큼 슬프고
얼마나 시에 대한 갈망이면 꿈속에서 쓴 시를 처음으로 내놓았는가. 어지간한 시인이면 누구나 경험해 보는 일이라 생각이 들지만 여기 老 시인께서도 아직, 청춘인 양 갈망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나도 어쩌다 꿈속에서 정말 환상의 시를 쓰다가 깨어나 머리맡에 둔 핸드폰에 입력해 두곤 했다. 그러다 제대로 저장이 되지 않아 크게 아쉬워한 적이 더러 있었다.그 상실감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잠 깨어 머리맡 백지를 보니’라는 부분을 보니, 老 시인은 아나로그 세대인 임을 넌지시 보이기도 한다.
언뜻 생각이 떠올라/끼적여 놓았다/잠시 후/또 한 줄을 썼다/또 한 생각이 나/또 썼다/그럴듯한 시가 되었다.//잠 깨어 머리맡 백지를 보니/쓴 위에 또 쓰고/그 위에 또 쓴/누구도 읽을 수 없는/한 줄뿐/까맣게 반짝이는/시 한 편.
「꿈속에서 쓴 시」전문
「곡선의 시」에서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 명쾌하게 제시한다. 서두에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려놓고 그 방향성을 내놓고 있으니 어찌 귀감이 되지 않을까.
직선의 시는 싫다/맛도 없고 졸음이 온다.//곡선이 있어 번짐이 있는 시/조용히 스미고 가만히 번져드는/떨리는 거문고 현처럼/
느리게 가슴을 울리는 시/그런 시가 좋다.//그러니 시가 익을 때까지/진드근히 기다리거라./야비다리하지 말고/진동한동하지 말고/초벌 매고 이듬매기하면서 농사 짓듯이,//쇠를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또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또 그렇게 해서/날을 세우듯이/이드거니 다듬으면서 기다리거라.
「곡선의 시」전문
‘그러니 시가 익을 때까지 진드근히 기다리거라.’
여기서 ‘진드근히’는 ‘침착하게 참을성 있게’라는 뜻이다.
마치 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의미이다.
특히 ‘야비다리’하지 말고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제 딴에는 가장 만족하며 부리는 교만’이니 제 시에 취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라는 뜻이고, 또한 ‘진동한동 하지마라’는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는 의미이다.
‘초벌 매고’에서의 ‘초벌 매다’는 논에서 첫 번째로 김(잡초) 매는 작업을 의미하며, 이때 부르는 노래를 ‘초벌 매는 소리’ 또는 ‘아시매는 소리’라고 한다.
‘이듬매기’는 농업에서 논밭을 한 번 갈고 난 뒤, 다시 한번 더 갈거나 매는 작업을 가리키고 ‘이드거니’는 충분한 분량으로 만족스러운 모양을 말한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고향의 잔 이야기처럼 반가운 글을 만난다.
바다는 잔잔했다/막 떠오른 해가 금빛 햇살을 내리꽂고 있었다/실로폰 소리가 통통 튀어오르고 있었다/보랏빛이었다/어디선가 젖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8월이 느릿느릿 바닷가를 돌아가고 있었다/저 거대한 짐승이라니!
「추억」 전문
바다가 배경이 되는가 했는데, 해가 막 떠오르고, 보랏빛 실로폰 소리가 통통 튀고 있고, 젖은 아기 울음소리가 있는데, 8월이 바닷가를 돌아간다.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내 우둔한 상상을 동원해 본다.
이것 모두가 추억 속에 기인한 것이라니. 아주 선명한 색채와 말끔한 청각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한 시대를 포괄하는 것일까? 그래서 ‘어디선가’라는 특정하지 않고 모호한 장소는 필연적이지만 막연한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기나 할까. 특히 통통 튀어 오르는 보랏빛 실로폰 소리가 천진난만한 행복감이 마치 한 시절의 환상적인 순간이 조명되는 것
만 같다. 그렇다면 여기 8월은 삶의 희노애락을 온통 소유한 거대한 팔십 년 행적을 소유한 묵직한 위상쯤 상징하는 것일까?
만첩홍매와 만첩백매는 무엇인가? 불고 흰 매화인데 여기서 만첩홍매는 홍만첩매실이라고 하고 만첩홍매화라고 칭한다.
매화를 특히 사랑하였던 조선 후기 유박(柳璞,1730~1787)선생은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매화는 비스듬히 뻗은 여윈 가지에서 성글게 나온 단엽백매(單葉白梅)를 최고로 치며 천엽(千葉)은 속된 티가 나므로 매화의 운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시대 우리들은 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인지 만첩홍매화(萬疊紅梅花)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만첩홍매」에서는 추운 계절을 견뎌내고 피어난 꽃을 고통과 인내와 기다림을 극복하는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와 같아서 천하에 공개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승의 무량한 사랑아/울다 울다 목이 쉬어서/붉고 붉은 꽃으로 피어나거라!’라는 만첩홍매의 상징성이 참으로 짠하기만 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시인은 세상의 흐름과 다른 시간을 살기 때문에 고독해진다”고 말한다. 시인은 사회적 규범이나 타인의 기대와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기에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백석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향과 가족을 잃은 화자의 고독을 드러내었고, 유치환은 고향을 떠나있는 상황에서 ‘푸른 하늘’과 ‘동백꽃’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었다.
임보의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에서 ‘시인의 가슴은 늘 그리움 자욱한 공터가 있다’고 했듯이 여기 홍해리 시인은 「2020·봄」에서는 오롯이 발가벗은 고독을 들추어내기도 한다. 그것은 「불면증」에서도 마른 밤의 고독을 ‘흰쥐’와 ‘꽃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봄의 뿌리」에서는 ‘고독이 꿀같이 달아질 때까지/봄에는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나 달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독을 빤다는 건가? 마치 어린 날 깨어지지 않고 달콤한 돌 사탕 같기나 하듯,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키기까지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일찍이 ‘우이동 전설의 시인들’ 이야기들이 시인들 사이에서 달맞이꽃처럼 피고 지고 했다. 우이동 전설의 시인들이라면 이생진, 임보, 홍해리, 채희문 등이 있다. 임보 시인의 시 「네 마리의 소」에서 그들의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고불(古佛) 이생진은 물소/포우(抱牛) 채희문은 황소/난정(蘭丁) 홍해리는 들소/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임보의 「네 마리의 소」
임보는 이 시의 주석란에다 “고불은 섬에 미쳐 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이 마치 물소와 같다. 포우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 나오는 황소처럼 강렬해 보이지만 실은 양순하고,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 나 임보는 굳이 소라고 친다면 보잘것없는 염소라고나 할까. 이분들의 아호는 내가 붙인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난정(蘭丁) 홍해리라 했다. 얼마나 란(蘭)에 빠져 있는가알 수 있다. 또한 그의 다음의 시만 챙겨봐도 그것을 입증하듯이 애란(愛蘭)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너를 보면/숨이 멎는다//가슴속으로 타는/불꽃의 교태//심장을 다 짜서/혓바닥으로 핥고//하늘에 뿜어 올렸다/다시 초록으로 씻어//피우는 고운 불꽃/너를 보면//숨이 멎는다/현기증이 인다.
홍해리의 「자란紫蘭」
곧던 잎 점점 휘어지고/검푸르던 빛깔 누렇게 변해/마침내 똑! 떨어질 때//저 하늘의 작은 별/ 깜빡! 하며/ 마지막 숨을 놓는다//광대무변의 세상 점 하나 지워지고/ 한순간/눈물방울 하나 갸우뚱한다//아무 일 없었던 듯 지구는 돌고/그렇다, 권위도 순서도 없는/ 죽음이란 분명한 사실일 뿐//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그랬듯이/아들도 아들의 아들도 손자도 그럴 것이듯//눈물도 이슬처럼 햇빛 속에 숨고/자신이 몸을 낮추어/울음으로 찰나의 집 한 채 짓는다.
홍해리의 「난잎 질 때」
‘너를 보면 숨이 멎는다’했다. 얼마나 감동이 몰려오면 숨이 멎기나 하겠는가, 참으로 지독한 사랑이다. 여기 「난의 기원」을 통해서 ‘새들이 하늘에 쓴 시/땅에 내려/꽃이 되었다//난꽃은 새들이 쓴 시가 아닌가/새들이 추는 푸른 춤이 아닌가/새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라고 애란의 감정이 극도로 팽창하여 그 존재마저 추정하고 있다.
‘나이 팔십이면/뭐가 보일 줄 알았다//나보다 더 사신 분께 뭐가
보이느냐 물었더니/눈이 점점 침침해지는데/무엇이 보이겠는가 하셨다//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은/나이 든 눈이 아니라/눈빛 맑은 어린 눈/때 묻지 않은 아이의 눈이다//무지개가 피어도/나는 보지 못하는데/아이에게는 날마다 무지개가 뜬다.’
「착각」 전문
필자가 알기에는 홍해리 시인은 뱀띠(1941년, 신사년)로 연세가 여든다섯이다. 그런 그가 「착각」을 하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인가. 세상을 바라보는데
그 사람의 경험적 연륜이거나 신체적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그런 것들로 인한 고정관념이 오히려 장래가 될 뿐이며 차라리 무의미하다. 진정 세상을 바라보는 잔뜩 호기심 가득한 맑고 깨끗한 심미안이 더 중요한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화자는 세상에서 오염되지 않은 진정 순수의 눈빛이라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상이 바로 저긴데/바라다보다,//올려다보다/무너지는 사내들.//젖은 꽃 밟고 넘어져/미끄러져 내리다,//만년설 속에 묻혀/얼음미라가 되는 사내들.
「무너지는 사내들」 전문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남자들이 많이도 사라지기도 하고 죽었다. 그렇구나, 어느 곳 눈 속에 묻혀 미라가 되었구나.
문정희의 「치마」를 소환하여 그 의미를 되새김해 본다.
벌써 남자들은/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있음을 안다//치마 속에 확실히/무언가 있기는 있다//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맴도는 관광객이다//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그래서 그들은 자주 족보를 확인하고/후계자를 만들려고 애쓴다//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여자들이 감춘 바다가/있을지도 모른다//참흑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허무한 동굴?//놀라운 것은/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눈부시다는 것이다
살아 있어 사람이니/눈물 젖은 미소가 어찌 없으라//내가 고요하지 못하니/하늘이 맑고/호수가 잔잔할 리 있겠는가//머릿속이 흑과 백,/때로는 까매서 하나도 보이지 않고/어느 땐 하얘서 아무것도 없는 듯//텅 비어 있는 세상이라지만/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허망함이여//하늘이 개고 세상이 맑기를/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하늘이여 하늘이여 비노니!
「기청제(祈晴祭)」 전문
기청제(祈晴祭)란 장마가 오래 계속될 때 날이 개기를 빌던 나라의 제사를 말한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화자의 내부적 현상으로 치환되어 존재론적 회한이 엿보인다. 내면적 불완전한 상태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해소를 하늘에 구원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하늘이여 하늘이여 비노니!’
사람이 그저 사람이 아니라 사람 구실을 해야 사람이라 함은 그만큼 폭넓은 방면에서 무기력한 상태의 극복을 간절하게 갈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하게 삶의 내면들을 통찰력 있게 관찰하고 고찰한 많은 생각들을 더듬어 본다. 어쩌면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람이란 자기 외에는 알 수 없듯이 때때로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의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지만 여기서는 그 해답을 찾아보자.
무릇 우리 인간 세상에서 이처럼 무기력에 빠지는 현상을 일부 슬럼프라고도 한다.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보일 것이라.
2연에서 ‘고요하지 못하니 고요할 필요’가 있고
3연에서 머릿속에 텅텅 비는 듯한 현상을 탈피하는 편안함이 필요할 것 같고
4연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무기력함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이동 우거」에서 우거(寓居)는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것을 말하는데 ‘귀뚜라미’가 그렇고 ‘고추잠자리’가 그렇고 ‘방아깨비’가 그렇고 ‘베짱이’가 그렇다. 매일 밤낮이 그런 일상인데 오늘은 ‘버마재비’가 한잔하자고 찾아왔다.
우이동의 일상이 낱낱이 보인다.
죽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살기보다 더 힘들다는데/어쩌자고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는가/죽기 살기로 달려들면/밤인들 어찌 환하지 않겠느냐/길은 천지 사방 상하가 따로 없다/죽는 소리 죽는 시능 하지 말고/가고 싶은 대로/가고 싶은 데로/가거라, 지금 바로 떠나라/숨 쉬고 있는, 눈을 뜨고 있는 지금,/여기가 극락이라는데/죽자 죽자 하지 마라/섬마섬마 하며 크지 않았더냐/길이 없으니 밤이 얼마나 환하냐/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전문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몇 번이고 중얼거려 보면서 헤아려 본다. ‘누가 찾아왔을까?’ 여기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일까?’ 혼이, 넋이 없었을까? 반쯤 정신이 나간 것이란 말인가?
전체를 다시 들여다봐도 죽고 싶다는 말에 대한 가벼운 꾸짖음이 보인다. ‘어쩌자고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는가’라고 나무라고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이 믿고 있는 대상을 배신이나 거부 등으로 상실하게 되면 대상과의 관계(대상관계)는 심한 손상을 입게 되듯. 이때 상실된 대상을 대체할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이 대상은 주위의 친한 사람들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연인이 될 수도 있다.
그것조차 이르지 못한다면 크게 좌절감이나 살실감에 빠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대상에게 과도하게 집착하여 자아를 동일시하는 상태를 ‘자애적 대상선택(narcissistic object-choice)’이라고 불렀다.
외부에서 잃어버린 것을 자기 속에서 찾는 심리적 보상행위라고 보겠다. 하지만 여기에서 보면 어쩌면 화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책과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지독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너무나 많은 자아가 있다. 한때 유행한 ‘가시나무 새’라는 노랫 가사에서도 그런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세속적인 것에 메여 자유롭지 못한 구속에서 탈피하는 것이 그리 수흘할까만 그래도 ‘가고 싶은 대로/가고 싶은 데로/가거라, 지금 떠나라’라고 과감히 명령하고 있다.
여기에서 ‘대로’는 어떤 모양이나 상태, 방식, 즉시, 최대, 심함을 뜻하는 의존명사이고, ‘데로’는 ‘곳, 장소, 일, 경우’를 가리키는 ‘데’에 조사 ‘로’가 붙은 형태라고 한다. 즉 조건 없이 어디든지 망라하여 행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섬마섬마 하며 크지 않았더냐’에서 ‘섬마섬마’는 섬마섬마란 한국의 전통 육아법인 단동십훈(檀童十訓) 중 하나로 어린아이가 혼자 서는 법을 배울 때, 어른들이 옆에서 내는 소리(도리도리, 잼잼잼잼, 곤지곤지 등)라 한다.
또, 그 음은 한자로 섬마섬마(서마서마西摩西摩),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 굳건히 살라는 좋은 의미도 담고 있다.
‘길이 없으니 밤이 얼마나 환하냐’와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는 두 행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어두움이 짙으면 길이 있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차라리 길이 없으면 어두움도 어색함이 없으리라.
이 시는 이 시집의 표제어다.
「주부의 힘」과 「우주」에서는 나를 밤새도록 울게 한 시집 『치매행』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주부가 무너지니/집 안과 집안에 바로 서는 게 없다’고 느끼면 이후 발견되는 현상은 ‘가족이 스러지고/일가친척들이 사라지고/이웃과 친구들이 떨어지고/사회활동이 허물어지고’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주」에서는 ‘백야의 감옥/적막의 독방//아무것도 보이지 않고/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터엉,비었다//아내가/가고/난/연후!’
그때의 감동이 다시 아우성이다. 무엇을 더 말하랴.
제2부
시여, 우리 헤어지자
‘너는 최선을 다 했는가’로 시작하는 「깨고 싶은 꿈같이」에서는 삶의 무상성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꿈이면서도 꿈이 아니었던 순간에 대한 회한이며, 사라져가는 생애의 끝자락을 더듬어보게 한다. 특히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었다.’는 사라져가는 시간에 대한 보편적인 정서를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도록 고요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것은 1부의 마지막 시 「雪峯 장영철 화백에게」에서도 이미 감지되고 있다. 특히 2부에서 그런 소회가 더러 발견되고 있다. 자, 「가을 끝자락」이 그렇다. 화자는 ‘이승과 저승 사이’가 ‘가을 끝자락’이라 했다. 물론 우리가 흔히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황혼이라는 단어는 하루를 인생 전체에 비견하지만, 여기에서는 기존보다 폭넓은 사고의 근거를 둔 계절을 차임 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비우는 계절, ‘등글개첩 없으니 몸도 가벼워’라 했다./ 여기서 ‘등글개첩은 등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첩’이라는 뜻으로, 늙은이가 데리고 사는 젊은 첩을 이르는 말이다. 어째 씁쓸한 비움이긴 하다. 아무튼 그 모든 것조차 비우는 가을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 것인가? 다음의 계절, 겨울은 영원히 침묵하는 영면의 시간이다. ‘바람 칼 타고 나는/단풍길이나’ ‘귀밑머리 서러운/가을 끝자락.’을 느끼는 화자의 감정이 현실적으로 전이되어 옴을 인식하게끔 한다.
이와 같은 것은 「하루살이의 꿈」에서 허무감이 어쩌면 잔인하리만치 서럽다.
물감을 찍어 마른 잎 몇 개 달린 겨울나무를 그렸다/말리려고 걸어 놓은 흡족한 그림이 바람에 날렸다/찾아 나선 길에 온종일 산과 골짜기를 걷고 또 걸었다/홀연, 내가 꿈속에서 그림을 그렸구나 하는 생각에/희망과 절망이 한몸인 꿈에서 슬프게 걸어나왔다.
「하루살이의 꿈」 전문
화자는 ‘희망과 절망이 한몸인 꿈’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다.
온갖 자유로운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허무감, 허탈감이 인생의 늦가을을 실감케 한다.
해가 지면/문을 닫고 하루를 접는다//하루는 또 하나의 종점/나는 하나의 무덤을 짓는다//문 연 채 죽는 것이 싫어/저녁이면 대문부터 창문까지 닫고//다 걸어 잠근 고립무원의/지상낙원을 만드노니//둘이 살다, 셋, 넷, 다섯,/이제는 다들 떠나가고//나만 혼자, 홀로, 살다 보니/집이 천국의 무덤이 되었다.
「나는 날마다 무덤을 짓는다」 전문
‘둘이 살다, 셋, 넷, 다섯,’이 되었다가 ‘이제는 다들 떠나가고’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혼자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다가 서산에 해가 지듯이 밝은 빛이 사그라지는 현상, 즉 고립을 숫자로 명쾌하게 보여 준다. 그러다 결국에는 ‘나만 혼자, 홀로, 살다보니/집이 천국의 무더미 되었다’고 맺음한다.
‘나만 혼자, 홀로,’라는 쉼표가 주는 의미가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여운이 있다. 중첩적으로 강조하면서도 또박, 또박 쉼표로써 그 운을 힘있게 하였으니 독자의 감동이 진할 수밖에 없다.
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듯 해보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건강보험료 납부 증명서를 떼어보니/“해당 없음”이라고’했다, 아마도 건강보험료 납부 대상이 아니어서 일 것이다. 치열하게 사는 생에서 소외된 느낌이 들 것으로 보인다.
‘푸른 독경으로 가득차는/ 하루 또 하루/무등, 무등 좋은 날!’
「세란헌」의 마지막 연에서
‘푸른 독경’은 푸른색(청화)은 전통적으로 하늘, 생명, 신성함, 깨달음을 상징하며, 불교와 민속 신앙에서 경전이나 도구에 사용될 때 진리와 희망, 우주적 조화를 의미한다. (청화백자에 그려진 문양이나 여의 등의 도구는 우주와 인생의 이치,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무등, 무등 좋은 날’에서의 무등(無等)은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정도로의 의미인 부사이다.
‘살아지는 게 인생이니 사라질 때까지/4대가 함께하는 술상을 받아볼 수 있을까/그냥 한번 살아 볼 일이다’
「한범 홍형택」 중에서
‘얼이 들락거리는 굴이라서/얽굴 아닌가’ 나 ‘말이 많아 얼이 나가면/얼간이 얼뜨기 얼치기 얼빠진 놈’은 한글에 대한 깊은 의미를 되새기도 한다
‘소금쟁이는 물 위에서 놀고/거미는 허공에 집을 짓는다//바다를 가로지르지도 못하고/하늘에 금 한번 그어보지 않은/내게/세상은 무엇인가’
「거미와 소금쟁이에게 하는 말」 중에서
거미와 소금쟁이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만의 세상을 완성하고 있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존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은근히 필자의 ‘여름에 줄 하나 그어놓고’라고 홀로 주장하는 졸시(拙詩)가 새삼 떠올려본다.
여름에 줄 하나 그어놓고/날마다 하늘을 말리려/내 가슴 표식 같은 소리 하나 걸쳐 놓는다//이 솔직한 마음 얼마나 여름을 울릴지/지난여름에도 울었고/까마득한 기억에도 울었다//끝내 전설은 귀속에 들어앉아/계절을 무시한 채 홀로 살더니만/올여름 또 쉐한 소리가/짝도 못 찾고 못 찾다가/급기야 어느 구멍이라도 숨어들 거다//걱정은 마냥 침묵하는데/어느새 아무 사이로 파고들어/벌써부터 자리 잡았다 소리할 거다
「가슴이 가는 길」 전문
그저 필자는 한여름 낮잠의 어설픈 꿈일지라도 ‘거미처럼 하늘에 줄 하나 그어놓는 실존적 존재가 되고자 노력’했음을 여름에다 보고했다.
어쩌면 본능에 순응하고자 하는 솔직함일지라도 초라한 의지의 표출 또는 생각만 한 궤적을 남겨보자고 했다. 하늘에다 줄 하나 그어놓고 잘 놀고 있음을 슬쩍 얄팍한 증거로 남겨본다.
11월은 둘이 하나 하나가 되는 달/11일은 둘이 평행선을 이루는 날/2020년의 이 날 오후/아내의 애잔하고 애절한 눈빛을 보고/오랜 눈맞춤을 했다//삼 년 반 누워 있는 동안 아내는 자주 눈을 깜박였다/깜박깜박 깜박이다/깜박대고 깜박거리곤 했다//그런데/
이 날은 전혀 깜박임이 없이 계속 쳐다만 봤다/다시는 보지 못할 것같이/마지막으로 보는 것처럼//왜 그러느냐 해도 올려다보기만 했다/한참 눈맞춤을 하다/이상한 예감이 들어/눈물 한 방울 훔쳐 감추었다//그러고 나서/몇 시간 지난 다음날인 12일/새벽 두 시 반/아내는 내 곁을 떠나갔다//손이라도 한번 잡아줄 것을/볼이라도 쓰다듬어 줄 것을//애이불비 애이불비/哀而不悲!
「마지막」 전문
애이불비(哀而不悲)는 『논어』의 ‘공야장’ 편과 『예기』의 ‘중용’ 편 등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감정 절제의 덕목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슬픔을 내면에 간직하되 겉으로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그러나 예견된 슬픔이라 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끊어지는 인연을 어찌 슬퍼하지 않으리.
내면의 슬픔을 감내하는 현실을 상상하니, 아. 그날의 아픔이 느껴져 더 슬프기만 하다.
읽고 또 읽어도 슬픔이 우러나는 것을 어이 참을 수 있을까. 그날의 마지막 상황이 연극의 끝 무렵처럼 잔잔하게 조명된다. 슬픔이란 슬픔을 알아야 느끼는 인간만의 특별한 감정이다. 필자가 처한 상황에서 어쩌나, 돌연 듯 발생하는 공감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니. 그날의 일은 「죽음」이다. ‘죽음은 대나무가 내는 소리’라 한다네. 죽음 이후의 일은 ‘유언을 하듯/유서를 쓰듯/내가 나를 벗어나는 해탈이요/내가 나를 버리려는 열반이네’ 하면서 「독거놀이」를 한다.
“나 홍해리는 내일(2022년 5월 13일, 금요일)부터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2022년 5월 12일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에서,
홍해리 印
「금주선언서」 중에서
“증인 임보 시인 앞에 엄숙히 약속합니다.”라고
밝히고 내 마음을 다스리려 했는데
믿었던 임보 시인이 거절했습니다.
“며칠 후에 한잔합시다, 지금 이미 집에서 한잔하고 있으니!”
북한산 자락 우이동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마음도 널어 바지랑대 곧추세우니/무더위 끝 서늘한 바람/나락 크는 소리 개가 짖는데/시를 읊지 않아도 가가이 보이고/책을 읽지 않아도 손에 잡히네.’
「처서 이후」 중에서
계절의 미세한 변화에도 시가 절로 잡힌다니 과히 우이동의 전설에 딱, 어울림이시다. 이와 같은 것의 발견은 ‘오래 쌓인 울분’이라는 의미인 「적울(積鬱)」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고독사·1」에서는 ‘내 나이 몇이라고?/벌써 팔십이 넘었다고!’
문득 팔십이 넘었다는 것은 이전까지는 나이에 대한 의식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고독사·2」에서는 그냥 순응하고 ‘꽃이 지듯이 그냥 가는 거야/별이 지듯 혼자서 가는 거야’라고 수긍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현실에 익숙해지고 또 그러려니 하고 순응해 가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지 않을까.
「고독사·3」에서는 ‘죽어있는 자신이 보이는 나이/ 울지 말자 울지 말자’고 한다.
시인들은 저마다 자기 시 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창작한 시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시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걸어두고 시 자랑한다.
디지털화된 미디어 세상에서는 자랑하는 전략도 다양하고 쉽다.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 세상을 바로 세우는 근원적인 힘이 된 성경에 의하면. 자랑의 바른 양태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칭송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며, 외인(外人)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라고 잠언27장 2절의 말씀을 새겨야 할 것이다.
자기 자랑에 취한 사람들이 자기 입술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씀이다. 또한 여기 시의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다.
아직/쓰여지지 않았으므로//언제/쓰여질지도 모르므로//누구도/쓰지 못할 것이므로//끝끝내/쓰여지지 않을 것이므로.
「가장 좋은 詩는 없다」 전문
홍해리 시인은 1942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시집으로 『투망도』(선명문화사, 1969), 『화사기』(시문학사, 1975), 『무교동』(태광문화사, 1976),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 『홍해리 시선』(탐구당, 1983), 『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 『청별』(동천사, 1989), 『우이동』(동천사, 1990), 『그대 가슴에 딩동!』(작가정신, 1992), 『은자의 복』(작가정신, 1992), 『난초밭 일궈 놓고』(동천사,1994), 『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 『애란(愛蘭)』(우이동사람들, 1998), 『푸른 느낌표!』(우리글, 2006), 『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 『황금감옥』(우리글, 2008), 『비밀』(우리글, 2010), 『독종』(북인, 2012), 『금강초롱』(도서출판 움, 2013), 『치매행(致梅行)』(도서출판 황금마루, 2015),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 『매화에 이르는 길』(도서출판 움, 2017),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도서출판 움, 2018) 등 다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낸 작품집으로 『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 『산상영음』(금방울사, 1979), 『바다에 뜨는 해』(금방울사, 1980), 『원단기행』(중앙예림사, 1981)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비타민 시』(우리글, 2008), 『시인이여 시인이여』(우리글, 2012)를 간행했다.
이렇듯 많은 시집을 간행한 홍해리 시인이 말한다.
하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얼마나 작은가/나인 나와 나 아닌 나 사이/내가 나를 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한평생 시를 쓴다면서, 시를 산다면서/시가 뭔지도 모르고/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고민하고 절망하고 철망에 갇히고’
「역린(逆鱗)에 대하여」 중에서
만 편을 쓰면 그렇게 남을까/하늘에는 해 하나, 달 하나뿐이구나/산 시는 죽은 시에게 안부를 하지 않는다/자발 없는 짓거리나 하려거든/시여, 우리 헤어지자
「내가 천 편의 시를 쓰면 천 편으로 남을 까」 전문
더불어 홍해리 시인은 그의 시 「꿈」에서 말한다. ‘나를 이끌어 온 것은/만족의 힘이 아니라/불만의 깡이었다’
제3부
푸른 시간의 발자국
세상은, 애야!/천야만야 낭떠러지란다//그냥/뛰어내리거라/그래야 산다 난다//저 하늘이 땅이 되어/네 발 아래 펼쳐지고/네가 걷고 달릴 수 있으리니//얘야/허공에 집 한채 징거매거라!
「허공 한 채」 전문
여기서 천야만야(千耶萬耶)는 높이나 깊이가 천 길이나 만 길이 되는 듯 까마득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짧은 행들 속에서 보여 주는 메시지가 강열하다.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내리면 난다는 의미이다. 상당히 역설적이다. 그런 용기 있는 자 얼마나 되랴만 깊이 새겨둘 만큼 의미가 깊다. 삶의 진정한 비사(飛翔0은 위함을 감수하는 용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철학이 깃들어 있다.
‘징거매다’는 국어사전에 의하면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게 딴 천을 대고 대강 꿰매다.’라고 한다.
3장에 들어와서는 「고독사·3」과 「귀에 지진이 났다」 그리고 「내 귀에 임자 없는 귀신이 산다」가 전진 배치되어 있다.
「고독사·3」에서는 ‘나이 팔십은 귀신이 보인다 하지/죽어있는 자신이 보이는 나이/울지 말자 울지 말자’ 또 미디어를 통한 소식이 ‘외롭고 쓸쓸한 주검이 전파 꽃상여를 탔다’고 하니 고독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처럼 실감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 팔십이 안 되었으니 실감 나지 않지만 그래도 진한 느낌이 화하게 느껴진다.
또 「귀에 지진이 났다」에서는 독자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는 느낌이다. 대낮인데도 환한 낮인데도 귀가 어둡다는 역설이 어쩌면 담담하면서도 여운을 맴돌게 한다. 청각적 단절은 내적인 단절을 의미하는바 화자의 심리를 심도 있게 펼쳐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짐짓 단순한 청각 장애가 아니라, 감정과 사회관계망의 고립이거나 그 벽이 무너진 내적 붕괴를 상징한다.
「명절 음식」에서까지 고독한 분위기가 사뭇 매달려 있다.
‘설이라고, 추석이라고/몰려왔다 다들 돌아간/텅 빈 집/남은 음식만 집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혼자 먹는 밥’ ‘홀로 드는 술!’
왜, 밥은 ‘혼자’ 먹고 술은 ‘홀로’ 마실까?
지나치지 않고 챙겨본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에 나오는 구절이다.
왠지 모르게 ‘혼자’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거나 함께 있지 아니하고 그 사람 한 명만 있는 상태이니 자의에 의한 고립인 것 같다. 그러나 ‘홀로’는 사전에서 ‘혼자서만 또는 짝없이 외롭게’라고 정의한다. 짝이 없다는 것은 자의에 의할 수도 있지만 다분히 타의에 의한 고립에 무게가 더 실리는 같으니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아무튼 명절 후 다 떠난 것은 내부적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한 ‘홀로’가 된 상황이다. 그래서 그로 인한 공허함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무의식적일 수 있는 ‘홀로 드는 술!’에 힘을 보태주는 느낌표(!)를 찍었으리라.
왜 「속옷 우화」의 시를 제3부에 배치했을까?
‘처음 사본 속옷에 문이 없네/이 무슨 난감한 일인가’라고 난처해하면서 ‘멍텅구리 속옷을 손에 들고/슬쩍 물어볼 사람이 없네’라고 넋두리 속에도 고독한 기운이 맴돈다.
가으내 겨우내 너를 기다리다/만나지 못하고 이제 간다고/마지막으로 한자 적어 남긴다//죽을 때까지는/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라고/사날 좋게 살 만큼 살아 보라고//세상에 특별할 게 뭐가 있다고/저 혼자 못났다고 우는 것이냐/꽃이나 푸나무가 우는 것 봤냐//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너요/세상의 중심이 바로 너요/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게 바로 너다.
「마지막 편지」 전문
사계절이 있는 우리에게는 ‘봄내, 여름내, 가으내’라는 말도 있다. 참고로 ‘봄내’는 봄철 내내, ‘여름내’는 여름 한철 내내, ‘가으내’는 한가을 내내란 뜻이다. ‘한겨울 동안 계속해서’라는 의미로는 ‘겨우내’라는 말을 쓴다.
그러니 한가을 내내, 한겨울 내내 기다렸으니 두 계절을 이어 기다린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2연 3행에 시작하는 ‘사날’은 ‘사흘이나 나흘’을 의미하는 명사로, 주로 기간을 나타내는 고유어지만, 이와 더불어 ‘제멋대로 하는 태도’ 또는 ‘비위 좋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일’을 뜻하는 부수적 의미도 있으니 그 모든 의미를 향유하고 있다고 보겠다.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너요/세상의 중심이 바로 너요/세상을 세상에게 하는 게 바로 너다.’는 아마도 화자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나이 팔십」이 되면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나이가 팔십이라네
나일 먹고 또 나이 들어도/그림 속 떡을 보고 침을 흘리고/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할 일인데/왜 아직도 내 배가 아픈 것인가/어느새/깨복쟁이 멱감던 개울가를 돌아보고/사철나무 서 있던 우물가를 서성이는/늙마의 봄이 오니/볼 장 다 보고 나서도/휘영청 달 밝은 밤이 되면/하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데/봄이 오면 정녕 고목에도 꽃이 피는/그곳으로 발밤발밤 가 볼 것인가/발바투 달려갈 것인가/무한 적막은 어떻게 잡고/영원은 또 언제 그릴 것인가/봄이 와도 봄이 아닌 나의 봄이여.
「늙마의 봄·2」 전문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성과 본성은 변함이 없다. 글쎄 육체는 노쇠하고 늙는다 하지만 어찌 마음인들 늙기야 하겠는가.
정신적 영역인 마음은 육체와 달리 비물질적 특성이 있어, 외형적 노화와 달리 젊음을 유지한다고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의 노화는 외부의 자극, 경험, 자기관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글쎄, 필자의 의견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에 따라 변수가 다양하리라 본다.
어쨌거나 12, 13행에서 ‘봄이 오면 정녕 고목에도 꽃이 피는/그곳으로 발밤발밤 가 볼 것인가/발바투 달려갈 것인가’를 살펴보면 생소한 단어가 나온다.
‘발밤발밤’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을 말하고
‘발바투’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라는 부사이다.
필자는 홍해리의 시에서 ‘발밤발밤’을 만났고 그래서 필자의 시집 『달밤달밤 발밤발밤』이라는 세 번째 시집의 시제로 사용했음을 고백한다.
“아저씨, 미아5동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요?”
“미아5동으로 가야지요”
머리 허연 노파가 길을 묻고
아내도 길을 못 찾고 이리저리 헤매다 떠났다.
「우연 한 장」 중에서
얼마나 짠한 기분이었을까, 가까이 다가서는 기분이 깊다.
하지만, 내 삶의 길에서도 문득, 저와 같이 너무 먼 질문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언뜻 생각이 떠올라/끼적여 놓았다/잠시 후/또 한 줄을 썼다/또 한 생각이 나/또 썼다/그럴듯한 시가 되었다.’던 「꿈속에서 쓴 시」를 화자는 동짓달 초여드레 새벽 세 시에 「푸른 시간의 발자국」으로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꽃도 아닌가 봐//아무리 매만지고/모양을 내도//동박새 한 마리/날아오지 않고//찬바람만 몰려와/알몸을 쪼아 대네.
「설중동백(雪中冬柏)」 전문
바닷가나 섬 등의 우거진 활엽수림이나 동백나무 주변에 많이 보이건만 아마도 바닷가 아닌 북한산 기슭 우이동 세란헌 울 안에, 어느 날 눈 속에 고고히 묻혀있어서 그런가 합니다. 하지만 설중동백에 찬 바람이 쪼아 대는 운치 또한 그 누구도 감히 모르고 사니 그들이 처량할까 합니다.
‘뒤돌아보면 /바람은 늘 한쪽으로만 불었다//내가 하기보다 네가 하기를 바랐고/내가 해 주기보다/네가 해 주기만 원했다’
「바람의 세월」 중에서
‘비운다는 것이/팔십 년 넘게 비운 몸과 마음이/이렇게 무겁다니 무슨 사단인가’
「나이가 무겁다」 중에서
“생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의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처럼, 인생의 모든 순간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깨달음을 담고 있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에 집착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이다. 그래, 그렇다. 필자는 이 아침에 중얼거린다.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다”라고 아침을 시작했으니 어지간히 깨닫게 한다. 세상이 가볍고도 참으로 무겁다는 깨달음으로 하루하루 후회 없는 오늘, 지금 이처럼 배우는 날들에 만족감으로 행복 하자.
‘열 번 고쳐 써도/열 번 부족해서//처음 글을 보면/그게 외려 시답구나,’
「초고에서 퇴고까지」 중에서
연못마다 깊이가 다르고 사람마다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듯이 더러 시인인들 한도 없는 하늘 같아서 그 시심이야 어찌 측량하랴. 여기 화자의 시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고 또 후인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로다. 1942년부터의 삶의 깊이가 이러할 진데 무릇,
바람도 자글자글 가슴을 앓는 고요한 봄날//처음인 듯 피워올린
속살보다 고운 꽃잎들//바리바리 연둣빛을 싣고 오는 봄바람 바람//길은 언제나 하릴없이 온몸으로 가고 있다
「봄비 그치자 빛이 길을 만든다」 전문
이 시의 중심에는 봄의 생명력과 삶의 흐름이 섬세하게 담겨있다.
‘바람도 자글자글’, ‘바리바리 연두빛’ ‘언제나 하릴없이’ 등이 봄날의 바람과 꽃 그리고 길의 어울림이 정겹게 느껴진다. 또한 봄의 정취뿐 아니라 꽃과 바람이라는 존재의 의미까지 확장 시키고 있다. 봄비가 그치자 길이 세상에 드러난 길의 갈 길을 가는 듯함이다. ‘처음인 듯 피워올린 속살보다 고운 꽃잎’은 봄꽃의 생성되는 이미지를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바리바리 연두빛’은 생동감 있는 색으로 시각화되었다. 하릴없는 길은 끊임없는 존재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느새/지다 남은 꽃/가벼운 연가처럼/다붓다붓 피어나는 이파리들/품속으로 숨다.//색색거리며 올라가던 바람/잠이 들듯 내려올 때/다시 올라갈 때/나무들은 눈 깜짝할 사이/색으로 빛나면서,//영원을 풀어놓아/푸른 밤/푸른 별/푸른 빛, 그리고 푸른 사랑/달콤한 거짓말 같다.//오월이면/격정도,/약속도, 별이 되어/나무마다/요요하다.
「요요(夭夭)하다」 전문
‘요요(嫋嫋)하다’는 ‘맵시가 있고 날씬하다’이고 ‘요요(嶢嶢)하다’는 ‘몹시 위태롭다’이고 ‘요요(了了)하다’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이고 ‘요요(搖搖)하다’는 ‘마음이 흔들려 안정되지 아니하고 들뜨다.’이다. 그래서 굳이 한자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요요(夭夭)하다’는 ‘나이가 젊고 아름답다’ 또는 ‘생기가 있고 얼굴빛이 환하고 부드럽다’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마치 나무의 이파리와 꽃 등의 자라고 지고 등의 현상을 두고 요요하다고 하지만, 어쩌면 나무는 현상을 대리하는 매개체일 뿐이라 함이 옳다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마지막 연에서 ‘오월이면/격정도,/약속도, 별이 되어/나무마다/요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저 떨림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표면일 뿐이다. 이파리와 꽃을 피우기 위한 격정, 다시 이듬해에 피운다는 약속 등이 우리 내면에 있는 감정이나 기억의 파문일 것이라 본다.
1연에서 ‘가벼운 연가처럼/다붓다붓 피어나는 이파리들/품속으로 숨다’에서 ‘가벼운 연가처럼’이라니, 기가 막힌 표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노래처럼 다붓다붓 피어난다’니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지 필자에게 순간적으로 지릿한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물론 여기서 ‘다붓다붓’이라 함은 ‘여럿이 다 매우 가깝게 붙어있는 모양’을 말한다.
그런 ‘이파리들 품속으로 숨다’에서 품속은 어딜까 곰곰이 추측해 보니 ‘새로운 생명이 자연이라는 계절 속으로 안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2연에서는 ‘색색거리며 올라가던 바람/잠이 들 듯 내려올 때/다시 올라갈 때’에서는 생기발랄하게 오르던 바람이 마치 몸부림치던 아기가 졸면서 스르르 잠드는 이미지를 연상케 하여, 고요한 시각적 이미지를 불러내고, 또 그렇게 올라가고 내려오고 또 올라가는 끝없는 순환이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 ‘영원을 풀어놓아/푸른 밤/푸른 별/푸른 빛, 그리고 푸른 사랑/달콤한 거짓말 같다’는 이와 같은 순환이 모두 ‘달콤한 거짓말’이라니. 참으로 아름답지만 끝내 붙잡을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꽃 속에 들어갔다//꽃가루/잔뜩 묻히고//마악/날아오르는//호박벌의/날갯짓//그 금빛 떨림.
「꿈을 꾸었다」 전문
화자가 꽃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적 체험을 통해 감각 세계 속에서의 느낌에 몰입하는 내용이다. 누우런 꽃가루 잔뜩 묻힌 호박벌의 날갯짓이 무르르 떨리는 금빛 환영이라니 그것은 마치 생명의 진동이요 빛의 진동이요 꿈의 진동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함축하는 것이리라.
가을은 왔는데/밥 한 그릇 못 되는 시를 써 무엇 하랴/술 한잔 안 나오는 천 편 詩 쓰면 뭘 해/하늘은 저리 높고 푸른데 시 만 편 써서 뭣 하나/열매마다 고요가 깃들었는데/시는 써 무엇 하리.
「시는 써 무엇 하리」 전문
시의 수용성과 무용성 나아가 현실의 간극을 압축해서 드러내는 울림이다. 화자의 반문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편안한 잠자리/잠자리 잡을 자리/백척간두/흔들리는 장대 끝/낭낭/뛰어내릴 용기라도 있는 사람/뛰어내려 영웅이 되지만/용기 없어 뛰어내리지 못하는/이 사랑/저 사랑/다 지나서/방하착하는 낭떠러지
「잠자리」 전문
편안한 잠자리는 잠을 자는 자리이지만 잠자리 잡을 자리는 아직 잡지 못한 미확정의 자리일 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적어도 필자에게는 ‘잠자리’ 하나만으로 심리적, 철학적 긴장을 소환하고 있다. 어저면 삶의 경계이거나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자리를 비유하는 장소 같은 그런 자리일 것이다.
누구나 흔들리는 장대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하지만 진정 뛰어내릴 용기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낭낭’은 아마도 ‘넉넉하다’는 의미의 신조어일 것이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 누구나 다 안다. 어릴 때부터 공부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실상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 행위론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빠져 산다고 할 수 있겠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방하착하는 낭떠러지’인 것이다.
여기서 ‘방하착’이란 중국 당나라 조주 스님이 제자에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그 경계가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내려놓거라(放下著)”라고 답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 끝내는 어쩔 수 없이 집착, 미련, 번뇌를 고스란히 내려놓게 된다는 것이다.
제4부
지천으로 밟히는 그리움
왼아귀 오른아귀/내게는 아귀가 두 마리 있다//내 손안에 살고 있는 아귀가/때로는 아귀(餓鬼)가 되어//사람들을 만날 때면/그들을 사정없이 물어뜯는다/아금받으려는 내 손아귀/무엇이든 덥썩 무는 것이 나도 무섭다
「아귀」 전문
아귀란 사물의 갈라진 부분을 말하는데 흔히 쓰이는 말이 손아귀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역시 ‘내 손안에 살고 있는 아귀’를 불러온 글이다. 여기서 ‘아금받다’는 야무지고 다부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인간 내면의 갈등과 욕망의 이중성을 아귀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는 ‘두 손아귀’를 지칭하는 ‘아귀’와 ‘염치없이 먹을 것을 탐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아귀(餓鬼)’를 중첩시켜, 인간 내면에 숨겨진 ‘물어뜯는 것’같은 폭력성과 ‘덥썩 무는 것’과 같은 탐욕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매화나무에 학이 날아오는 날/나는 가리라//학의 등에 올라앉아/서편 하늘로 날아가리라//천년을 한가로이/그곳에서 떠돌다//매화나무 시드는 날/다시 돌아오리라 나는.
「귀향」 전문
매화나무와 학을 상징적으로 활용해 떠남과 귀환의 순환적 구조 속에서 삶의 여정을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떠올리게 하는 시이다. 귀천은 다음과 같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 전문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 즉 원래의 곳 즉, 하늘나라로 돌아감을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하였고
홍해리 시인 역시 ‘귀향’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의미로 ‘나는 가리라’고 했다. 그러나 홍해리 시인은 귀향으로 여정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매화나무 시드는 날 다시 돌아오리라’고 희망의 여운을 주고 있다. 학을 타고 서편 하늘로 향하는 것은 현실의 갈등을 벗어나 정신적 자유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서 고향의 의미는 다층적 의미로 볼 수 있으며, 즉 물리적 고향뿐 아니라, 영혼의 안식처나 자아의 상태를 본질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사이에서 존재한다/사이는 너와 나의 관계, 또는 거리/우리 사이에는 중심이 있다/관계가 감각적이라고 웃기지 마라/중심에는 관심의 그물이 있다/그물코를 빠져나가야 속내가 인다/나는 네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너는 내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그물눈은 항상 감겨져 있다/시끄러운 세상사 사그러질 뿐/사랑도 아픔도 보내 버려라/꿈도 지우고 가을도 비위 버려라/슬픔과 아름다움도 지워 버려라/꿈이로다, 꿈이로다/눈앞에 어리는 그림자 같은/일순의 꽃철을 지나/아아, 가을은 간다.
「가을은 간다」 전문
이 시는 “사이”라는 존재론적 공간을 통해 관계와 소멸, 그리고 인식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첫 구절 “우리는 사이에서 존재한다”가 제시하듯, 존재는 독립적 개체로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니 ‘너와 나의 관계’ 혹은 ‘거리’로 표현된 그 사이에는 ‘중심’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실체가 아니라 ‘관심의 그물’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너는 내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라는 대목은 존재의 경계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는 체험과 같은 것일 것이다. 관계 속에서 자아가 해체되며, 결국 그물눈이 감기듯 세상과의 연결이 닫히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도 아픔도 보내 버려라/꿈도 지우고 가을도 비위 버려라”에서는 감정과 감각의 소멸, 즉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하여 마지막 “아아, 가을은 간다”는 단순히 계절의 끝이 아니라, 존재의 허망함과 관계의 여운마저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시는 가을이라는 상징적 시간 속에서 관계의 아름다움과 허망함을 제시하며 존재의 덧없음을 사유하게 한다.
가을비 그친 다음/젖은 몸으로 우는 대숲/푸른 물고기들/떠나가지 못하고/몸을 비벼대는/소박맞은 치맛자락/갈 곳 없다/갈 곳 없다/늦은 저녁답.
「미련」 전문
가을비 맞은 푸른 댓잎을 마치 물속에서 퍼드덕거리는 푸른 물고기들이 서로 몸 비벼대는 순간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이 등장하는 ‘가을비’ ‘젖은 대숲’ ‘푸른 물고기’ ‘소박맞은 치맛자락’ 등의 이미지를 통해 미련과 상실감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애정 결핍, 외로움, 미련으로 인한 몸부림, 소박맞은 치맛자락’ 등으로 고독과 체념의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인 늦은 저녁답에 ‘갈 곳 없다/갈 곳 없다’고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이별의 분위기를 더욱 서럽게 만든다.
죽은 듯 서 있어도 눈 빤히 뜨고/동안거에 든 침묵의 나무들/속 깊은 영혼이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가/겨울 산이 춥지 않은 것은/나무들이 산을 꼭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몸 가득 채우고 있던 무거운 마음/직박구리가 한입씩 물고 마을로 내려간다/새벽마다 하루를 절벽으로 맞는 것은/아직도 네가 덜 아프고 덜 슬퍼서이니/
외로우면 참지 말고 눈물 속에 빠져 보거라/맨몸으로 시가 된 나무들의 도저한 정신을/산에 올라 귀 대고 가만히 들어보거라/한눈팔지 말고 똑바로 가라 하지 않느냐/네 갈 길이 아직 땅땅하다/텅 빈 계곡의 바람소리에/봄은 이미 연둣빛 싹을 부풀리고 있다.
「겨울 산에서」 전문
겨울 산의 풍경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서로 비추는 깊은 사유의 시다. 겉으로는 ‘침묵의 나무들’이 죽은 듯 서 있는 풍경을 그리지만, 그 안에는 고요함 속의 생명, 추위 속의 따뜻함, 아픔을 견디는 존재의 든든함이 담겨 있다.
초반부에 나무들은 “죽은 듯 서 있어도 눈 빤히 뜨고” 있으며, “동안거에 든 침묵의 나무들”이라는 표현은 자연이 쉬는 동안에도 사실은 깨어있음을 상징한다.
‘겨울 산이 춥지 않은 것은 나무들이 산을 꼭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차으로 정겹기까지 한 표현이다. 자연과 존재의 연대감으로 상호 의지의 감정이 느껴진다. 인간의 마음 또한 그와 같음을 인식하게 한다.
“외로우면 참지 말고 눈물 속에 빠져 보거라”는 구절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허락하는 마음의 순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고 “맨몸으로 시가 된 나무들의 도저한(학식이나 생각, 기술 따위가 아주 깊은) 정신”은 인간의 욕심이나 꾸밈을 벗고 존재 그 자체로 선 나무의 고상함을 의미한다. 또한
마지막의 “텅 빈 계곡의 바람소리에 봄은 이미 연둣빛 싹을 부풀리고 있다”는 의미는, 겨울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도 새 생명과 희망이 움트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겨울 나무」에서는 ‘홀로 있을 때 우리는 나무가 된다’고 했으며 또 ‘나무는 버릴 것 다 버리고 나서 드디어 신이 되어 서 있는 것’이라고 했으니 나목(裸木)이나 나신(裸身)이나 다 버린 것은 매 한 가지이다. ‘침묵 하나 아름답게 펼쳐놓으면 새가 깃들어 우주의 가락을 연주’한다는 대목은 나무의 빈 가지가 새로 인하여 우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는 느낌이다. 7행에서 화자는 ‘고독하라! 고독하라!’고 한다. 오직 고독이 결핍이 아니라 자유와 충만의 시작이라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이 시의 군데군데에서는 세태를 비꼬는 작품도 종종 눈에 띈다. ‘그날 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이태원공화국」에서도 찾을 수 있고 ‘우리의 이름,/ 우리땅,/ 우리조국,/그리고 우리의 역사여,’라는 「독도」나 「삼일절 홀인원」에서는 ‘파릇파릇 잔디들이 눈물로 노랠부른다/힘껏 휘두른 클럽에 맞은 공, 공, 공,/가라는 구멍으로 가지를 않고/찍소리 못하는 죄없는 풀잎들/눈퉁이 뒤통수나 맞혀서 별이나 달아 준다’에서도 그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짝퉁」에서는 아예 ‘대한민국의 정치꾼들아/짝퉁은 짝퉁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꼬집기도 한다.
더불어 화자는 시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고 넓다. 그래서 시를 붙들고 한평생 황홀한 청춘, 행복한 고투의 시대를 지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 『네가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의 여기저기서 그런 증거의 흔적들이 낱낱이 발견되고 있다.
「곡선의 시」에서는 ‘직선의 시는 싫다 맛도 없고 졸음이 온다’
「바람의 시」에서는 ‘나의 시는 겉보리 서 말’
「적울(積鬱)」에서는 “시는 내 영혼의 넝에, 향기롭게 빛나는 미라”라고 했다.
「가장 좋은 詩는 없다」도 그렇고 「역린(逆鱗)에 대하여」도 그렇고 ‘시는 마른 비애’라는 「유감」도 ‘시가 배가 부르면 맛이 없다’는 「사방탁자시」도 그렇다. 또 「내가 천 편의 시를 쓰면 천 편으로 남을까」도 그렇고 「푸른 시간의 발자국」에서도 그렇다.
‘바퀴가 없어도 그냥 내게 와 닿을 수 있도록,’이라고 애정을 표현하는 「가을詩」, 「내 말이 많이 닳았다」, 「초고에서 퇴고까지」는 ‘열 번 고쳐 써도/열 번 부족해서//처음 글을 보면/그게 외려 시답구나, 하니’
「시는 누가 쓰는가」에서 화자는 시 창작으로 인한 깊은 번뇌에 드는 경우가 많아 몇 편의 시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말한다. ‘낡은 정신이 쓰는 맛없는 시는 버려라’ ‘날것인 어휘로 날 시를 써라’ ‘첫술에 배부르면 밥맛이 나지 않는다’
‘해찰하지 마라’고 조언하고 있다.
나아가 「말이 죽었다」에서는 이 시대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포고문 같은 경고를 보내기도 한다. 다음의 시, 시를 보는 관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기도 한 「말이 죽었다」를 심도 있게 살펴봐야겠다.
말이 사라지고 기호와 문자만 남았다/말은 보이지 않고 말발굽 소리만 요란하다/정과 사랑이 없는 싸늘한 적막강산/말이 죽었다/시인은 말을 찾아야 한다/푸른 초원으로 말 떼를 인도해야 한다/시인은 장관 국회의원 판검사가 아니다/시인은 재벌 운동선수 연예인이 아니다/시인은 말의 장관 언어의 의원 언어의 재벌이고
/시인은 언어의 선수 말의 예인이어야 한다/시인은 시전을 일궈 말의 씨앗을 뿌리는 손이 없는 농부다/시인은 어망을 던져 어물을 잡는 배 없는 어부다/시인은 천길 암흑 속에서 언어의 금덩이를 캐는 눈먼 광부다/말을 먹고 사는 시의 시대는 올 것인가/시를 읽는 이가 보이지 않는데/시가 죽고 시집이 사라졌는데/화려한 의상,/번쩍이는 장신구,/요란한 화장이 지팡이를 끌고/줄지어 몰려들고 있다/시인 생산공장으로/시인의 죽은 나라로!
「말이 죽었다」 전문
이 시는 ‘언어의 죽음’과 ‘시인의 사명’을 주제로 한 깊이 있는 메타시로 읽힌다. 표면적으로는 ‘말이 죽었다’라고 시작하지만, 그 진의는 단순한 언어 소멸이 아니다. 시적 정서와 인간적 소통이 단절된 시대의 진단이고 할 수 있다.
첫 연에서부터 ‘말이 사라지고 기호와 문자만 남았다’는 구절은 현대 사회에서 언어가 살아 있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형식적 표식으로만 소비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말’이 대신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는 장면은 언어의 본질이 사라지고, 외형적 효과나 소음만 난무하는 풍경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가속도가 붙은 디지털화 속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AI가 또한 그렇다. 문명이 발전해 가는 속에서 더 바른 속도로 발전하는 문자와 기호만 남는 시대가 도래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스스로 진화해 나가는 AI의 시대는 진작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인은 장관 국회의원 판검사가 아니다’라며 시대적 권력과 물질적 욕구를 부정하고, ‘언어의 장관 언어의 의원 언어의 재벌’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의 존재는 언어의 근원적 주체, 언어의 근본적 책임자이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손이 없는 농부’나 ‘배 없는 어부’나 ‘눈먼 광부’는 시인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한 비유라 할 수 있겠다. 시인은 현실적 도구 없이 언어를 길러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말의 빛’을 캐내는 존재다.
마지막 부분의 ‘화려한 의상, 번쩍이는 장신구, 요란한 화장’은 시를 상품화된 시나 또 외양으로 소비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시인 생산공장’과 ‘시인의 죽은 나라’라는 표현은 진정한 시 정신의 몰락과 마구마구 생산하고 있는 제대로 배양되지 않거나 아예 설익은 시의 시대를 말한 것이다.
어쩌면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강한 선언이며, 오늘의 시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는 것으로 읽히고 있다.
노새야//비단 언어로/비단 언어(言語)로 짠//순금(純金) 고치를 보았니/노새야//달내갱가/가장 맑은 바람기랑/물빛으로 닦은/ㅎ하얀 결벽(潔癖)/싸늘한 눈물의 뜨거움을//보았니/노새야
「양채영(梁彩英)」 전문
이 시를 붙들고 한참을 생각 속에 빠졌다. 양채영은 누구일까, 또 시인과 어떤 관계일까, 화자가 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단 양채영(梁彩英)을 알아야겠다.
양채영(梁彩英)은 1935년 경북 문경군에서 출생했다. 아호 일여(一如), 호 황정(黃庭)이고, 본명은 재형(在瀅)이다. 충주사범학교 및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에서 수학했다. 196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고, 1966년 《문학춘추》와 《시문학》에 「안테나 풍경」, 「가구점」, 「내실의 식탁」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현재 문인협회 충주지부장, 한국예총 충부지부 부지부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한국문인협회 남북문학교류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푸른시낭송회 회장이며, <한국시> 동인, <서세루> 동인, <내륙문학회> 동인, <중원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채영 시인의 시는 자연을 시적 상상력의 근원으로 삼으며 문명에 의해 소외된 풍경 속에 떠올라 있는 이러한 자연물의 이미지의 소묘를 통하여 현대인들의 삶의 고달픔을 암시한다. 또한 언어에 대한 철저한 절제를 통해, 말을 지워버린 자리에 존재의 부재와 침묵을 담아내고 있다. 시집으로 「노새야」(한림출판사, 1974).
시인 한채영은 홍해리 시인과 <내륙문학회> 동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분에게 보내는 헌사라는 것을 추정했는데 그의 시집 『노새야』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필자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쉽지만 시집 『노새야』를 읽어보지 못해 그 깊이를 측정할 수가 없다. 다만 ‘비단 언어(言語)’ ‘순금(純金) 고치’ ‘달내강가’
‘하얀 결벽’ 등의 시어들이 찬란하게 빛난다. 지나치게 깔끔함을 추구하는 강박적 성향 또는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청결이나 정리 정돈에 집착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결벽(潔癖)을 ‘하얀 결벽(潔癖)’으로 소환해 놓았다.
. 비단이란 아름답고 매끄럽고 정교하게 짜인 재료이니 ‘비단 언어’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도한 순금 고치는 또 어떤가, 불순물 하나 없는 순금으로 된 고치니 얼마나 귀하고 값어치 있는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시적 메타포는 시인 한채영의 달빛, 물빛을 포함한 시적 결이 찬란한 세계를 포괄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한다.
다음은 ‘박흥순 화백에게’헌사하는 「인연」이다
그는 까까머리 미소년/나는 30대 훈장이었다/벌써 50여 년 전 일이다/지금은 백발에 주름도 비슷한 친구/야동도 함께 보며 킬킬거리고/술잔도 주고받는 사이/세월이 거리를 먹어 치워/이제 맞먹는 처지, 이렇듯/인연이란 뜻밖에서 이루어지고/너와 내 안에서 피는 한 송이 꽃/그것은 시간이 준 소중한 선물/사이라는 말은 멀다는 뜻이 아니라/가깝다는 말/가깝다와 멀다는 같은 말이라서/사이가 더 가까워지면 새가 난다.
「인연」 전문
아름다운 인연의 결을 아주 솔직하게 담겨 놓았다. 그러니까 사제 간의 인연이 5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차차로 허물없어진 사이가 되었으니 그 인연이 참으로 깊고 귀하기만 하다.
심지어 소탈하게 그려 놓은 이야기들 속에서 소탈한 웃음과 정감이 넘쳐 필자의 웃음이 절로 절로 나온다.
제5부
깊고 깊은 시의 늪
시가 무엇인지/생각만, 생각만 하다가//어디 있는지/찾아 헤매다//어떻게 쓸까/골똘, 하다가//한 편도 쓰지 못하고/한 생을 다 써 버렸다
「억새꽃에게」 전문
억새꽃은 가을에 피는 억새의 꽃으로,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 만개하며 햇빛과 바람에 따라 은빛 물결을 이루는데, 역광에서 은빛으로 빛난다. 2025년 대구 정원박람회로 소문이 난 대구 금호꽃섬 하중도에 가면 볼 수 있다.
억새꽃은 바람이 불어야 제대로 보여 주는 꽃이라, 바람이 불어야 움직이고 흔들리고 은빛 물결이 제대로 보인다.
시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 쉽게 보이지 않지만 억새꽃처럼 움직임으로 존재를 드러낸다고나 할까. 조용히 흔들리다가 붙잡히지 않으면서 빠져버리는 억새꽃과 닮았다. 어쩌면 바람만 쫓다가 결국 한 편도 못 썼다는 화자의 고백이 억새의 생애 같기도 하다.
무릇 시인은 누구나 자기만 한 그릇의 시를 찾느라 일평생을 허비한다는 상념에 빠지게 한다. ‘과녁에 꽂히는 것은 화살이지 활이 아니다’라고 하는 「가을詩」를 통해서 다시 한번 시의 깊이를 깨닫게 한다. 다음의 시론(詩論)을 다시 한번 새겨둔다.
왜 자꾸만 동구 밖으로 눈이 가는가//왜 오지 않는 찻소리에 귀를 여는가//명절이라 길이 많이 막히는가 보다//내가 서울로 올라갈 걸 그랬나 보다!
「빈집」 전문
명절인데 오지 않음이 사실은 서운하지만 억지로라도 합리화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오지 않음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깔려있지만 굳이 합리화하려는 마음이 인간적이다. 기다림이라는 감정이 소박하게 녹아 있다.
‘명절이라 길이 많이 막히는가 보다//내가 서울로 올라갈 걸 그랬나 보다!’
이 구절에 와서는 이제까지의 기다림에 대한 쓸쓸함을 어색한 허세 같은 자기 위로를 느낄 수 있다.
필자도 그와 같은 어른의 마음을 느껴보는 경우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왔다가 지나가니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을 것이라.
바람 부는데 무뜩 생각이 납니다//번개 치는데 번쩍 생각이 납니다//비가 오는데 언뜻 생각이 납니다//그냥 불쑥, 불쑥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 전문
이 시에서는 ‘바람’과 ‘번개’와 ‘비’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 작은 변화에서 오는 미묘한 반응의 변화를 즉각적이면서 조건이 없는 반응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무뜩’은 ‘생각이나 느낌 따위가 갑자기 떠오르는 모양’으로 쓰이는 부사이고 ‘번쩍’이나 ‘언뜻’과 ‘불쑥’은 ‘큰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양’이란 의미의 부사이고 ‘언뜻’은 ‘생각이나 기억 따위가 문득 떠오르는 모양의 부사이고’ ‘불쑥’은 ‘갑자기 마음이 생기거나 생각이 떠오르는 모양’의 부사이다.
그 의미나 쓰임새가 비슷하지만 유효적절하게 배치하여 생동감과 율동이 살아나는 형식이다.
마치 ‘무조건 반사’처럼 조건 없이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네 행으로 압축하여 담아낸 작품이다. 짤2은 행 속에서 불숙 치고 올라오는 감정의 리듬이 살아있고 삶 전체를 짠하게 울리는 공명을 느끼게 한다.
꽃을 보지 말고 꽃을 보라./말을 하지 말고 말을 하라./너를 찾지말고 널 찾아라./시를 쓰지 말고 시를 써라.
「시론(詩論)」 전문
이 시는 4행으로 짧게 구성된 반복적 역설 언어로 구성되어있다.
‘꽃’과 ‘말’과 ‘너’ 그리고 ‘시’를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은근히 메타적(meta的), 형이상학(metaphysics)적 의미를 사유하게 한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표현이 오히려 필자인 시인의 더 가슴을 찌른다.
나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나는 나의 가장 미련한 제자//멀리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으로/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하나도 가르치지 못하는 스승/나는 나의 스승도/제자도 되지 못한다/제 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속눈썹이 몇 개인지는커녕/단 한 개도 보지 못하는 주제/내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내가 내게서 무엇을 배우겠는가/나는 나의 적이었다/파괴자였다/배신자였다/스승이여, 죄송합니다/제자여, 미안하다//스승이 수평밖에 몰라 그것만 가르쳐도/제자는 수평에 수직을 더하는 것/그것이 스승과 제자다
「스승과 제자」 전문
우리는 누구나 양면성이 있다. 첫 연에서 명쾌하게 내놓은 결론이 그렇다. ‘나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 / 나는 나의 가장 미련한 제자’라는 부분이 누구나 다 해당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보자면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의 충돌로 인해 스스로를 멘토이자 멘티로 설정해 모순된 정체성을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근시안적 무지를 최대한 발아(發芽)시켜 실재적(實在的) 현실로 대조하고 반성하는 자세이다.
이는 가장 가까운 것조차 보지 못하는 인간의 근본적 결핍을 풍자하였으며, 진정한 깨달음은 외부가 아닌 내부 탐색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시 자체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띄고 있지만 메타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오늘도 환한 하루였는데,/까맣게 잊고 살았던/네가/어쩌자고/이렇게 닷 살아오는가/너는 죽어서/하늘나라에서 노는데,/나는 살아서/노을 물드는 주막에 앉아/막걸리잔이나 기울이고 있네.
「무제」-瑞雨에게 전문
이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주 앉아 술 한 잔을 놓고 기억과 그리움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시의 화자는 ‘오늘도 환한 하루였는데’라고 말하며 평온한 일상을 말하지만, 그 평온함은 ‘까맣게 잊고 살았던 네가’라는 구절에서 단숨에 흔들리고 있다. 저물어가는 하루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감정의 깊이를 ‘어쩌자고’에서 아픔의 척도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너는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노는데’라는 표현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아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시절의 교감으로 ‘논다’라는 천진한 표현은 남겨진 슬픔을 애써 부드럽게 한다.
화자는 ‘노을 물드는 주막’이라는 현실의 공간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고, 반면 떠난 이는 ‘하늘나라’에 있다. 이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간극을 보이지만, 동시에 같은 시간 속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너’는 결국 화자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일상의 작은 장면 속에서 깊은 그리움을 불러올 수 있는 짧고 절제된 시다. 瑞雨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와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참으로 아름답다.
다 벗어 버렸으면 좋겠다/보일 것도, 보여줄 것도 없다/물 말라 쪼그라든 망태/쓸모 없는 작대기/한겨울엔 추워 떨기도 하겠지만/썩어질 몸뚱어리 좀 춥다고/그게 어디 대수일까/대통령이란 무거운 옷을 벗기우고도/실실 웃을 수 있으니 행복하겠지만/나도 시인이란 헛옷을 벗었으면 좋겠다/다 벗어 버리고/홀가분하게, 호젓하게 살고 싶다/북한산 우이동 골짜기가 팅 비었으면 좋겠다/썩은 고기 한 덩이 더 뺏어 먹으려고/껄떡대는 하이에나들/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더 내보이려고/주변을 맴도는 허깨비들, 꾼들 다 가라 가버려라/가벼운 영혼으로/잘 빤 육신의 마지막 가루로/저 푸르고 너른 바다에 뿌려지고 싶다.
「옷과 이름」 전문
‘대통령이라는 무거운 옷’과 ‘시인이라는 헛옷’이 같은 계념으로, 여기서는 사회적 지위나 직업 등의 역할을 함유하고 있다.
육체의 한계와 덧없음을 강조하면서 거추장스러운 지위나 명예나 허울 등을 툴툴 벗어버리기를 갈망하고 있다.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갈구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와 위선을 겨냥하였으며,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몇 가지 생각을 펼쳐놓았다.
‘자 벗어 버렸으면 좋겠다’와 ‘나도 시인이란 헛옷을 벗었으면 좋겠다’와 ‘저 푸르고 너른 바다에 뿌려지고 싶다’라는 자유를 그렸다.
「내 말이 많이 닳았다」에서는 ‘그늘이 없는 시는 가벼워 읽은 맛이 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시에 대한 견해를 구체화하기도 했다.
‘아득한 고향처럼 그립고 아늑한 시’ ‘갓 지은 이밥같이 입에 당기는 시’ ‘나무가 천년을 제자리에서 쓴 시’ ‘꽃잠으로 설레는 새색시 같은 시’ ‘뜨거움 속에 시원함을 품고 있는 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시를 두고 ‘맛있다 한 잔의 詩’라고.
해 다 저문 섣달 초닷새/썩은 속 다 타 재 되고/빈 자리 가득 안고 있는/詩人이여/네가 내 속을 아느냐고/슬픔을 다 버린다고 비워지더냐고/하늘이 묻는다/눈물 있어 하늘 더욱 눈부시고/추위로 나무들의 영혼이 맑아지나니/시인이여/그대의 시가 닿을 곳이 어디란 말인가/가라, 그곳으로/물 같은 말의 알이 얼어붙은,/빛나는 침묵의 숲에서 고요한/그곳으로 가라/시인이여 아직 뜨겁고 서늘하다/깊고 깊은 시의 늪은.
「詩를 찾아서」 전문
섣달 초닷새의 그날의 일은 꼭히 공개되지 않았지만 ‘썩은 속 다 타 재 되고’와 ‘슬픔을 다 버린다고 비워지더냐’는 진정한 비움이 버린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시인의 내면을 끝없이 추궁하듯 묻는다. 이것은 화자 자신에게 묻는 질문일 것이다.
‘네가 내 속을 아느냐고’의 ‘네’와 ‘내’는 어쩌면 자신을 통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의 시가 닿을 곳이 어디란 말인가 가라, 그곳으로’에서는 시인의 시가 목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명확하다면 ‘가라, 그곳으로’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시가 도달해야 할 장소를 명쾌히 제시하고 그곳을 극점에 두는 것이다.
‘50년 넘게 시를 끼적이고서도’
「푼수」 중에서
‘가장 달콤한 시 가장 서러운 시를,’
「가장 좋은 시」 중에서
때때로/바위 속으로 들어가는 나는/내 너머 내가 있을까/몸 너머 마음 있을까/마음 덮은 지붕을 벗겨 봅니다/내 生은/스스로 파는 무덤이지만/내생(來生)도 어제도 없어/날개를 달았습니다/그러나/그 날개가 너무 크기만 해서/무한공간 속을/날 수가 없습니다/내 詩는/귀를 밝히고/눈을 씻고/하늘에 쓰는 유서입니다/지금 예서 영원으로.
「하늘에 쓰는 유서」 전문
‘때때로 바위 속으로 들어가는 나는/내 너머 내가 있을까/몸 너머 마음 있을까’
‘바위 속으로’라는 부분은 상당히 철학적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것 같아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겠다. 아마도 바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사신이 안고 있는 고정관념의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의미일 것으로 보인다. 신체와 정신의 경계, 자기 자신 너머의 자아를 찾는 과정이 마치 감각으로 느끼는 현상 너머의 본체, 신의 존재, 자유의지, 만물의 근원 등 근본 질문을 다루는 형이상학적인 의문 같다. 살며시 마음 덮은 지붕을 벗기고 있다는 것은, 화자의 삶으로 안고 있는 고독, 그것을 향한 깊은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날개가 너무 크기만 해서’는 무릇 그렇듯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 매사에 모두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도 시를 통해 ‘영원’을 점유하려는 화자의 마음 자세는 시적 치유의 힘과 삶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오랜만에 나는 나는 꿈을 꾸었다/이월 스무이레/새벽녁이었다/비비(比比) 그리자면 허공중의 헤엄이었다/새처럼 나는 게 아니라/헤엄치듯 팔을 앞으로 모아/옆으로 해서 뒤로 힘차게 당기는/수영법이었다/나이 들면 키가 점점 줄어드는데/날려는 새가 날개를 움츠리듯/자리에 누워 있다/박차고 날아올라 앞으로 날았다/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돌 듯/유유히 지상을 내려다보았다/아직도 다 크지 못한 내 키를 재고 있었다.
「비상(飛上)하여 비상(飛翔)하다」 전문
이 시는 꿈이라는 초월적 공간을 활용해 신체적 한계와 정신적 자유 사이의 긴장을 고민한다. 노화로 인한 쇠퇴임에도 불구하고꿈 속에서 독수리처럼 비상하며 ‘날개를 펴고 하늘을 돌 듯’ 이상을 추구하는 모습은 인간 내면의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아직도 다 크지 못한 내 키를 재고 있었다’는 구절은 성장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재측정하며 전진하겠다는 결단을 함축한다.
꿈속에서의 비행을 통해 현실적 제약을 초월하려는 열망이 드러난다. 현실의 제약을 꿈의 이미지로 변용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이 어떻게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리 살아 뭘 하나/꽃이 피는데,//이리 살아 뭘 하나/눈물이 진다
「한숨」 전문
삶의 허무와 순환을 짧지만 강렬한 구조로 누구나의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있다.
덕망 있는 삶의 궤적마저도 나이가 들면 허탈하여 무상하다더니, 슬쩍 그런 생각이 사정없이 덤벼든다. 자연의 이치는 변함이 없는데 무릇 우리 인생은 그렇구나......
언제나 그렇듯 시작(詩作)에 교본이 되는 시집이라 두고두고 배움하며 기억하려 한다.
2025년 12월 5일 0시 25분 작성
내 읽은 기억과 느낌의 보존을 위해 남긴다.
다음은 도서출판 놀북의 서평이다
홍해리 시인이 우이동 골짜기에서 길어 올린, 시간의 맛에 대한 가장 달콤하고 서러운 시집. 옷과 이름 같은 모든 껍데기를 다 벗어 던진 채, 시인은 ‘허공과 바닥은 거리가 없다’는 깨달음 위에 서 있다.
그의 언어는 텅 빈 몸뚱이를 술웅덩이 삼아 고인 눈물이다.
‘꽃이 피는데, 이리 살아 뭘 하나’ 한숨 쉬면서도,
‘늘 푸른 초원’을 향해 젊음을 격려하는 생명력이다.
이 시집을 펼치는 것은 천사의 주검처럼 깨끗하게 져버리는 백목련 아래서, 나를 배신한 육신을 용서하고, 빛나는 침묵의 숲으로 가라는 시인 존재의 최종 선언을 듣는 것과 같다.
세상 모든 말들이 닮아버린 지금, 홍해리 시집은 당신의 귀를 밝히고 눈을 씻어줄 영원에 대한 고요한 떨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