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낭만노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자몽 Feb 03. 2022

(예전에 샀었더랬었던)짙어가는 초록맛 솜사탕

기록이라는 건 문자들을 뱉어내는 행위 이상의 것이다. 기록을 통해 얽혀있던 생각과 감정들은 나름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내뱉지 않아서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현상에 대한 나의 해석을 발견하게 한다.

기록은 스쳐 지나가 잃어버릴 뻔했던 찰나를 영원으로 붙들어두는 저장의 의미이자 모두의 것이었던,

혹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시간에 나만의 숨결을 불어넣어 의미를 부여하는 재창조의 시간이다.

내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참으로 휘발력 강한 나의 뇌를 믿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그 덕에 더 신뢰하게 된 감정의 지분을 조금이나마 넓혀주기 위함이다.


나의 일터이자 삶의 순간인 이 집에 들어오게 된 지 이제 꽉 차게 4년을 지나 5년째를 시작하고 있다.

이 집은 나를 쓰게 하고, 그리게 하며, 무언가를 하고 싶게 하는 곳이었다.

최근에 있었던 몇몇의 사건으로 인해서인지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리고 있는 시간의 힘으로 인해서인지 어느덧 이 집에 대한 나의 애정도 마음도 이 집과 함께 낡아져 버렸더라.

물론 어떠한 의리의 차원일지도 더 나은 집을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난 이 집을 퍽이나 사랑하고 있어서라는 꽤나 괜찮은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이 집에 대한 나의 감정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기억하기 위해 나는 오늘의 이 집을 다시금 기록하기로 한다.


누군가 어떤 색을 좋아하냐 물어보면, 난 늘 초록이라 말해왔었다.

우리집에 들어서는 모든 마음이 이 초록문으로 인해 더 초록이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기도 하고,

“그저 그런 집이 아니야. 이건 진짜 기매나의 집이라고.”하는 마음이기도 한, 이 집의 시그니처 같은 곳.


사람의 간사한 마음으로 어쩌면 더 간절하게 감사하며 살게 될지도 모르는,

햇살을 다 가지지 못한 우리집은 남서향 집이다.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창문을 활짝 열어 초록이들을 위한 바람 샤워를 시킬 때면

요즘 들어 자주 무거워지는 나의 마음에도 바람이 든다.

볕이 드는 방향을 따라 요 근래 말간 초록을 잃어버려 걱정이 되는 몬스테라의 방향도 옮겨본다.

누군가 나의 이 집을 찾아와 준다면, 그건 2시 즈음이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2시에 가장 정갈하고, 그 정갈함이 세 시간이 채 못 가는 곳.

가장 많은 이야기가 담기고 또 만들어지는 서정적인 장소이자

이상하게 방금 치운 것 같은데 늘 도르마무인 곳.

같은 모양인 날이 거의 없는 변화무쌍한 곳.

이곳의 모양이 이리도 다양할 수 있는 날이 절대 길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나는 이 정갈하지 않은 모양새도 감사하게 감내하며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언제 이런 대단한 상상력과 연출력을 잃게 되었을까?

진짜 그것들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으로

자주 놀라고 그냥 넋 놓고 흐뭇하게 바라보게 하는 이들의 놀이는,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말로도 참 부족하다.

(밤에 쓰는 글의 문제가 이것이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것으로 꽤나 몽글몽글한 것으로 미화된다는 것.

나는 이곳에서 매우 자주 헐크가 되어 이들에게 사납게 울부짖는다는 사실, 도대체 오늘도 이게 뭐냐고, 이걸 또 언제 치울 거냐고 제3 금융권보다도 훨씬 날 선 독촉을 감행한단 사실을 고백해야만 하겠지.)


테라조 타일은 정말이지 매력적인 아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텍스쳐 감이 있는 타일이라서인지 물때가 자주 끼고, 그 덕에 샤워 때마다 고민을 하게 된다.

“아씨, 오늘 타일을 닦아, 말어.”

참..

사람도 타일도 겪어보기 전엔 모르는 것이다.

그래. 이곳의 쓸모는 비우는 것이니,

‘예쁘니 되었지.’ 하며 내 마음도 비워내야 하겠지 뭐.


이사를 가고 싶었다.

넓은 거실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긴 테이블을 두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물론 결국 그것이 우리 부부의 야식 테이블 따위로 전락할 거란 걸 매우 적은 오차범위로 예상하지만.)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것이 인생이란 것을 한층 얇아진 지갑과 함께 느끼는 어떤 사건들로 인해

그 기대와 계획은 모두 물 건너가 버렸다.

약간의 방치 상태로 버려두었던 나의 마음도, 이 집도 다시금 세워야 했다.  

매듭 사이에 머리카락이 낀 머리끈, 새것인지 헌 것인지 알 수 없는 AA 건전지, 어떤 옷에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갈색 단추 등, 자리와 쓸모를 잃어버린 온갖 잡동사니의 집합소가 되어버린 식탁 위 선반을 치워냈다.

헌 것만으론 진정한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9년 만에 새 테이블을 들였다.

꽤 오래 위시리스트에 있었으나 오프라인 판매처를 찾지 못해 미뤄둔 의자도 정말이지 운명처럼 발견했다.  

게다가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관심을 잃은 이 집에선 적합한 장소를 찾지 못해 방치되어있었던,

2번 친구가 쥬트서 완성해 온 작품도 자기 자리를 찾았다.

이곳에서 우리 넷은 휴일이면 함께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었다.

이곳에 앉아 나는 노래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마침 스타벅스가 커피 가격을 인상하였기도 했고 말이다. (응?)

이사를 가지 않고도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를 조금씩 현실로 이루어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창조경제이며, 공간혁신이 아니겠는가.


집을 정돈한다는 건, 그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닌가.. 집을 정돈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된 것일까?

무엇이 무엇을 수반하는 것인지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무튼 분명한 건, 저 둘은 서로 관계가 있다는 거다.

이 집에 내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은

내가 드러나지 않는 엄마로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겐 어떤 숨 쉬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곳곳에 나 같은 것을 배치하고 질리지 않게 조금씩 바꾸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나에겐, 잊힌 내 이름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법인가 보다.

 집이 정돈되고 나니, 이 집에 대한 나의 마음도 정돈이 되어간다.

집을 정돈하며 즐거움과 감사거리를 발견한다.

정돈된 집을 바라보며, 이러저러 했었더랬던 과거의 내가 아니라 오늘의 나를 본다.

난 아직도 이렇게 집을 나만의 색깔로 정돈할 수도 있고,

이렇게 나의 집과 마음에 대해 글을 쓸 수도 있으며,

오늘의 나를 기록하고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사라졌다거나 나를 잃어버린 게 아니다. 이 집처럼 나도, 다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집은,

나에게 물리적 공간보다 큰 것이다.

나도 몰랐다. 이 집이 어느덧 나라는 것을.

이렇게 이 집도 나도, 기억하며 다듬어가며..

오늘도 좋은 날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