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뒤 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이 잦은 친구와 나는 살고 있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 근데 왜 모아나 할머니는 죽을 때 지팡이는 놔두고 갔어요?”
“응? 그랬었나? 모아나 할머니가 그러셨었니? 엄마가 기억이 잘 안나..”
“네. 그랬었는데.”
“그렇구나. 지팡이를 두고 갔다.. 흠.. 근데 죽는 게 뭔데? 죽는 게 뭔지 알고 있어?”
“응! 죽는 거는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는데 몸에 반짝반짝한 게 막 묻어서 점점 몸이 하늘로 올라가고 그러다가 반짝이가 점점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늘나라로 가는 게 죽는 거지.”
“아, 그렇구나. 죽는 게 그런 거구나. 그 피터팬에서 나오는 반짝이 가루처럼?”
“응, 그 피터팬이랑 같이 다니는 아주 작은 연두 색 애 이름 뭐였지?”
“팅커벨이야.”
“맞아. 팅커벨. 팅커벨이 그 가루를 줘서 날아갈 수 있잖아.”
“응 그랬지. 그럼 모아나 할머니는 혹시 지팡이엔 반짝이 가루가 안 묻었나?”
“아.. 그랬나 보다. 그래서 지팡이는 못 가져가셨나 봐.”
새해와 함께 6살이 된 아이와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순간순간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소재가 이해 가능한 범위 일까의 문제도 그렇고, 내가 선택한 이 워딩이 이 아이가 듣고자 하는 의도에 맞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감성이나 인지를 고려하며 이야기를 받아줄 수 있을까 등등..
특히 최근에 몇 번 나누게 되었던 ‘죽음’이란 소재는 참 더욱더 그러하다. 어려운 소재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늘 어린이들의 생각이 많이들 그렇듯, 이 어린이가 가진 ‘죽음’에 대한 결도 참 반짝이는 것이었다. 순간 여러 고민을 했었지만.. 우선은 그냥 반짝이는 것으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른들이 알고 있는 것 중 아주 많은 비중의 것들은 시간이 알려준 것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의지를 가지고 더 많이 학습해서라기 보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 또 특히 7세 이하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궁금해하는 것 중 대부분의 것들이 또 그런 경향의 것들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나는 지금의 이 아이와 함께 공유했던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예쁜 이야기를 나누면 그냥 그것으로 되는 거겠지. 하였다. ‘자 앉아보렴. 죽음은 유기체에 국한되어서만 발생하는 것이란다. 지팡이는 유기체가 아니니 죽음에 이를 수 없고..’하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적 정의에는 더 가까울 수 있으나, 무엇보다 핵노잼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오늘 이 어린이가 생각한 반짝이는 죽음의 정의는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반짝이 가루처럼 사라지고 말게 될 테니까.
이 아이가 아는 것보다 내가 아는 것이 더 많을 날이 얼마나 될까.
이 아이와 언제까지 근거와 사실에 입각한 정의보다 그냥 서정적이고 혹은 허무맹랑하며 어쩌면 터무니없는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아니 사실 이미 이 아이는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 내에서 표현하는 것에 제한을 받을 뿐 일지도. 이미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품고, 상상하고 정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난 이 아이와 ‘반짝반짝한 게 묻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죽음’에 대해 아직은 조금 더 오래오래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