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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자몽 Feb 19. 2022

죽는다는 것

앞 뒤 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이 잦은 친구와 나는 살고 있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 근데 왜 모아나 할머니는 죽을 때 지팡이는 놔두고 갔어요?”

“응? 그랬었나? 모아나 할머니가 그러셨었니? 엄마가 기억이 잘 안나..”

“네. 그랬었는데.”

“그렇구나. 지팡이를 두고 갔다.. 흠.. 근데 죽는 게 뭔데? 죽는 게 뭔지 알고 있어?”

“응! 죽는 거는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는데 몸에 반짝반짝한 게 막 묻어서 점점 몸이 하늘로 올라가고 그러다가 반짝이가 점점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늘나라로 가는 게 죽는 거지.”

“아, 그렇구나. 죽는 게 그런 거구나. 그 피터팬에서 나오는 반짝이 가루처럼?”

“응, 그 피터팬이랑 같이 다니는 아주 작은 연두 색 애 이름 뭐였지?”

“팅커벨이야.”

“맞아. 팅커벨. 팅커벨이 그 가루를 줘서 날아갈 수 있잖아.”

 그랬지. 그럼 모아나 할머니는 혹시 지팡이엔 반짝이 가루가  었나?”

“아.. 그랬나 보다. 그래서 지팡이는 못 가져가셨나 봐.”


새해와 함께 6살이 된 아이와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순간순간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소재가 이해 가능한 범위 일까의 문제도 그렇고, 내가 선택한  워딩이  아이가 듣고자 하는 의도에 맞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아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감성이나 인지를 고려하며 이야기를 받아줄  있을까 등등..   

특히 최근에   나누게 되었던 ‘죽음이란 소재는  더욱더 그러하다. 어려운 소재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어린이들의 생각이 많이들 그렇듯,  어린이가 가진 ‘죽음 대한 결도  반짝이는 것이었다. 순간 여러 고민을 했었지만.. 우선은 그냥 반짝이는 것으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른들이 알고 있는   아주 많은 비중의 것들은 시간이 알려준 것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의지를 가지고  많이 학습해서라기 보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  특히 7 이하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궁금해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런 경향 것들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나는 지금의 이 아이와 함께 공유했던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예쁜 이야기를 나누면 그냥 그것으로 되는 거겠지. 하였다. ‘자 앉아보렴. 죽음은 유기체에 국한되어서만 발생하는 것이란다. 지팡이는 유기체가 아니니 죽음에 이를 수 없고..’하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적 정의에는 더 가까울 수 있으나, 무엇보다 핵노잼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오늘 이 어린이가 생각한 반짝이는 죽음의 정의는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반짝이 가루처럼 사라지고 말게 될 테니까.

이 아이가 아는 것보다 내가 아는 것이 더 많을 날이 얼마나 될까.

이 아이와 언제까지 근거와 사실에 입각한 정의보다 그냥 서정적이고 혹은 허무맹랑하며 어쩌면 터무니없는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아니 사실 이미 이 아이는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 내에서 표현하는 것에 제한을 받을 뿐 일지도. 이미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품고, 상상하고 정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난 이 아이와 ‘반짝반짝한 게 묻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죽음’에 대해 아직은 조금 더 오래오래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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