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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자몽 Mar 31. 2022

그들의 세계관

저녁을 준비하는 내 발목을 누군가 삭삭 긁는다. 내려다보니 무릎을 구부리고 팔을 바닥에 댄 채 내 눈을 보곤 ‘앙앙’ 강아지 소리를 내는 우리집 2번 어린이가 눈에 들어온다.

“음~ 누구네 강아지지? 멍멍아, 혹시 주인을 잃어버렸니?”하고 천연덕스럽게 묻자, ‘앙앙앙’하는 강아지 소리로 답변을 한다. 나는 찬장에서 오목하고 자그마한 실리콘 소재의 그릇을 하나 꺼내어 당근을 몇 조각 잘라 넣었다. “우선 이거 먹으면서 기다려보고 있을래?”했더니 혀를 날름거리며 강아지처럼 당근 조각을 먹는 시늉을 한다. 나는 다시 당근과 애호박을 다져서 볶기를 시작했다. 시간은 가고 있는데 내 옆에 있는 강아지는 자꾸만 나에게 어떤 반응을 하란다. 계속 받아주다가는 저녁 준비가 너무 늦어버릴 것 같았다. 2번을 데려가서 함께 반응하며 놀아줄 1번이 필요했다. 나는 주방에서 작은방까지 들릴만하지만 혼잣말을 한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이상하다. 강아지가 내가 준비한 음식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봤는데도 주인이 왜 안 나타나시지? 큰일이네. 누가 강아지를 잃어버린 걸까?”

이내 작은방 문이 열리고, 또 한껏 드레시한 옷을 입고 오른쪽 팔엔 진주 장식이 줄줄이 달린 핑크 트위드 토트백을 맨 1번이 나오며 말한다.

“아주머니, 혹시 강아지 못 보셨나요? 제가 강아지를 잃어버렸는데 못 찾겠거든요.”

“어머 안녕하세요. 강아지 주인이 아줌마셨구나. 안 그래도 제가 잠깐 돌보고 있었어요. 저도 바빠서 가봐야 하는데 주인이 없는 것 같아 걱정했거든요. 다행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한테 진짜 소중한 강아지인데 잃어버린 줄 알고 너무 놀랐거든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지금 제가 밥을 조금 줘서 집에 가서는 밥을 많이 안 먹을 수도 있겠네요. 다음부턴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핑크 트위드 토트백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고는 ‘에구, 이모가 보고 싶었지?’했더니 멍멍이는 또 ‘앙앙앙’하고 짖고는 함께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어느덧 육아 7년 차에 접어들게 되면서 최근에 새삼 깨닫게 된 것에 대해 말해보자면,

육아를 조금은 더 유연하게 조금은 더 평화롭게 아름답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세계관에 들어가는 것이란 거다.

이 아이들에겐 수천 개에 달할 만큼의 많은 부캐가 존재한다. 그 부캐의 지속성은 일정하지가 않고, 어떤 부캐들은 하루에 몇 차례나 소환되기도 하지만, 어떤 부캐는 일회성에 그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현재 진행 중인 세계관 속에서의 그들은 실제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더 유연하며, 더 포용적이다. 예를 들어, 아까의 상황에서 “리온아, 엄마 지금 바쁘니까 들어가서 언니랑 놀면 안 될까?”했다면 “네.”라고 할리가 만무하다. 혹 내 말을 곧바로 수용해준다 하더라도 퍽 섭섭해하거나 시무룩한 모습으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1번 또한 그렇다. “예온아, 이리 나와서 리온이랑 같이 좀 놀아줘.”했다면 자기가 하고 있던 무언가를 마무리하느라 꽤 시간이 지체되었을지도 혹은 ‘엄마, 나도 지금 바쁘다고요.’하면서 꽤나 비싸게 굴었겠지.

물론 이 원리를 안다고 해도 결코 육아가 수월해지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육아의 원리가 그러하듯, 그 방법이 더 좋다는 것, 더 필요하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 곧 실천의지가 되는 게 아니니까. 그날의 온도, 습도, 분위기 따위보다, 육아 상식, 지식, 경력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분량으로 육아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엄마의 기분이다.

‘알아, 안다고. 하지만 안 하고 싶은 걸 어쩌라고.’

그게 발동하면 그냥 다 끝인 거다.

나의 육퇴 후 밤이 참혹함으로 채워지는 대부분의 이유도 그것이고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식이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의 이 깨달음이 내일엔 별 것 아닌 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또 기록하는 이유는,

수많은 엄마들이 육아서적을 읽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육아가 힘든 어떤 날, 마음이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어떤 날,

벌써 여러 날 지속해온 육아이지만 왜 이렇게 처음 하는 것처럼 고되고 아직도 이리 어려울까 하는 어떤 날,

나 스스로에게도,

나와 슷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결의 엄마사람에게도 

오! 맞아 그랬지. 하는 위로가, 혹은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다는 희망찬 의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겠다.

육아는 다람쥐 쳇바퀴 같지만 사실 아니다.

엄마도 시계 속 시침처럼 눈에 잘 띄진 않아도 조금씩은 나아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아이들은 내일이면 오늘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의 세계관에 이렇게 맘만 먹으면(아니 기분만 따라준다면이 더 정직한 표현이겠다.)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도 언제 까지랴.

쓰다 보니 새삼 뭉클하다. 그들의 세계관에 언제든 흔쾌히 초대되는 존재라는 것이.

오늘 그들의 하원 후에도 이 마음을 잘 지켜봐야지. 지금의 이 프리패스권을 맘껏 써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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