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가 있다.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운동을 한다면 예쁜 운동복과 신발부터 구비하는, 그런 구색 갖추기를 좋아하는 여자이며
하나에 꽂히면 진짜 질릴 때까지 그 노래만, 그 음식만, 그 생각만 하는 경향이 짙고
누군가와 말을 할 땐 비언어적 표현과 의도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스타일이다.
계획적이고 치밀하기보다는 즉흥적인 것을 즐기고, 좋게 말하면 임기응변에 강하다.
애교가 많지만 종종 질문에 함정을 넣어서 상대의 진심을 알아내길 시도하는 고약한 버릇을 가졌고,
장난끼 많고 명랑한 것 같지만 관계에 있어 겁이 많은 소위 회피형의 여자이다.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옷은 더위와 추위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이고
안경은 앞을 선명하게 보게 해주는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것에 쉽게 빠지기보다 오래 두고 보고 생각하며 마음먹은 것은 끝을 본다.
내뱉은 말에는 숨은 의도가 없고,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며
감정이 얼굴로 다 드러나는 투명 물고기이다.
무슨 일이든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편하고, 약속시간보다 족히 30분은 여유를 두어야 하는 사람이다.
매너는 없지만 다정하고, 센스는 없지만 신뢰는 가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말도 없이 여자를 지켜보던 남자는,
자신의 인생 목표가 윤곽을 드러내자마자 그 여자에게 고백하였고 그때부터 직진하였다.
그 여자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남자지만 뭘 믿고 그러는지 적극적인 그 남자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부터 김연우를 좋아하던 여자의 취향을 파악해
여자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크리스마스이브 김연우의 공연을 덜컥 예매해둔 그 남자는
그렇게 그 여자와 첫 데이트에 성공한다.
남자는 연애 때부터 로맨티스트도 츤데레도, 그렇다고 나쁜 남자도 아닌
애매한 노선을 걸었다.
유머도 없고 꼿꼿한 듯 한 그 남자는 연애가 시작되자마자 애칭을 불러댔고,
장난끼 있고 애교가 많은 것 같지만 닭살스러운 것을 못 견디는 여자는 그것이 어색했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그 여자는 도리어 기념일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고,
아기자기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남자는 만난 지 100일째 되던 날
선물로 꽃다발과 아이팟 3세대를 내민다.(그것도 '남편'이라는 각인 서비스까지 넣어서)
그렇게 그는 주목할 만한 기념일마다 달달한 편지와 선물을 준비하지만,
말이나 행동에 있어 의도나 의미보다는 실체와 현상에 집중하는 터라
진짜로 지독하게 여자 마음을 모르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두 남녀는 매일을 전시와 휴전으로 꽉꽉 채운 연애를 했다.
그러나 다년간의 연애로
'변치 않는 온도로 사랑해주는 것이 최고'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던 여자는
아주 잦은 빈도로 속을 터뜨리지만
한결같이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이 남자를 평생 보기로 작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햇수로 3년째 되던 해에 결혼을 한다.
남자는 연애 때도 그러했듯
가끔 퇴근길에 꽃을 사 오기도 했고,
결혼기념일, 생일, 임신, 출산이라는 굵직한 날마다 선물을 안겨주었다.
대부분 여자의 핀트나 예상에서 빗나가는 선물들이었지만 항상 진심을 담은 감동적인 편지가 함께였고,
여자는 그때마다 남자의 진실함에 감동했다.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몇 번의 계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릴 적부터 화장실을 매우 가리던 예민한 여자는
이 남자와 화장실을 공유하고 살아야 한다니
결혼은 참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장 운동이 활발했던 남자는
이 여자와 상관없이 여전히도 하루에 2번은 상쾌함을 맛보았고
꽃을 따러간다며 아주 웅장한 음악을 크게 틀어 놓으라는 여자가 이해가 영 안 되었지만 귀여웠다.
여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저녁 어스름과 늦은 밤을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 언제나 함께 할 수 있어서
결혼이 좋았다.
남자는 조금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던(어떤 질량이나 부피가 그러하다는 표현이 아님을 알립니다)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완전한 어장 속 내 여자가 되었으니
결혼이 좋았다.
여자는 까붐과 흥에 있어
자신의 가용범위 최대치까지 모두 보여줘도 된다는 안정감에
결혼이 좋았다.
남자는 만난 지 100일째에 선물했던 아이팟 뒷면의 신분이
실현되었다는 생각에
결혼이 좋았다.
결혼이 좋고
서로가 좋던 두 남녀는
퇴근 후 만나는 시간이 좋았고,
함께 수다를 떨며 먹는 야식이 좋았다.
쌓여가는 시간만큼 살도 그렇게 쌓여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로가 예뻤고,
여전히 웅장한 음악과 함께 꽃을 따야 했지만
그래도 결혼은 참 좋은 것이라고 둘은 생각했다.
두 남녀는 커플을 지나 어엿한 부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쌓여 부부는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두 아이를 매우 사랑했지만
그만큼이나 두 아이가 모두 잠든 육퇴 후의 꿀 같은 시간을 매우 사랑했다.
볼륨의 최대 허용치가 매우 낮다고 하여도
함께 보는 예능이 드라마가 영화가 즐거웠고,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하는 그들이 없는
이 오롯한 야식의 시간은
남녀 그 둘일 때보다 더 산해진미인 것도 같았다.
불타는 밤은 없어도
그들에겐 여전히 주전부리와 미드로 채울 수 있는 불금이 있었고,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 같던 그 설렘은 없어도
시답잖은 농담과 말도 안 되는 춤을 함께 하며 깔깔거릴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음악을 듣던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없어도
말도 안 되게 정말 믿을 수 없게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존재들을 보며
같은 마음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그렇게 그들은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자에겐 마음속 상처가 있었다.
연애 때 그리고 결혼 초반엔 그 상처가 여자를 자주 괴롭혔고,
다정했지만 실체와 현상에 집중하는 남자는
좀처럼 여자를 괴롭히는 그것의 이유도 착한 위로의 방법도 알지 못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못내 서운했고 답답했다.
남자는 자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걸 여자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단 생각에 섭섭했고 답답했다.
여자는 섭섭하고 화가 날 때면 동굴이 필요했고 깜깜한 밤을 혼자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스스로 선택한 깜깜한 밤 혼자의 시간이었음에도, 나가는 자신을 말리지도 찾지도 않는 그가 괘씸했다.
남자는 화가 나도 집을 나가면 안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고, 화가 나면 다정함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곤 했다.
스스로 깜깜한 밤 혼자의 시간을 선택한 여자에 화나고 괘씸했던 것이
그 남자가 가진 말리지도 찾지도 않은 이유였다.
그렇게 매일을 전시와 휴전으로 꽉 채우던 연애에 이어
격돌하는 시간을 벽돌 삼아 관계를 쌓아 올려온 그들이었다.
여자는 자신을 향한 남자의 변함없는 사랑에 조금씩 동굴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아졌고
남자는 병맛이 좀 더 가세하긴 했지만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좀 더 나아진 착한 위로를 선사해갔다.
여자는 숱하게 써먹어 왔던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의 불일치 스킬 사용 빈도를 줄여갔고
남자는 이따금 사용하는 여자의 그 불일치 스킬을 조금씩 마스터해갔다.
그렇게 시간이 쌓여 그들은 결혼 6주년을 맞이했다.
하필이면 결혼기념일은
옛 기억과 서러움을 모두 소환하기 마땅한
부부관계의 던전인 '명절'기간이었다.
하지만 두 남녀는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숱하게 쌓아온 파이터로서의 경력이 던전을 지나는 경험치로 작용했고
매번 모양은 조금 다른 듯 하지만 결국 성질은 같은 그 던전의 퀘스트를 또 지나갔다.
만난 지 100일째 되던 날 아이팟을 사주었던 그 남자는
명절 연휴 끝자락과 맞물린 결혼기념일 선물로
그녀가 좋아하는 젤리 가게서 젤리 6천 원어치를 사주었다.
달달한 편지는 없었지만
명절 내내 부엌에 있던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그의 마음과 눈빛이 있었고
지난 100일째의 선물과 젤리의 가치를 물질로 환산하자면 다소 성질이 나겠지만
결혼기념일 선물을 꼭 아내만 받으라는 법이 없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하게 된 여자였다.
100일째 되던 날 아이팟을 사주었던 그 남자는 변했다.
젤리 6천 원어치를 무려 결혼기념일 선물로 주고도 뻔뻔했고 당당했다.
100일째 되던 날 아이팟을 받았던 그 여자도 변했다.
젤리 6천 원어치를 무려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고도
명절이 또 한 번 지나갔음에 기뻐했고, 이렇게 젤리만으로도 둘이 깔깔 웃으며 신난다는 게 행복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사랑은 변한다.
사람이 변하는데 사람이 하고 있는 그 사랑이라고 변치 않으랴.
젤리를 주고받은 두 남녀는 이미
아이팟을 주고받던 남녀가 아니다.
그들이 아이팟의 시기를 그리워만 한다면
젤리 6천 원어치에 행복할 수 없었을 거다.
나는 지금의 이 젤리 6천 원어치 사랑이 좋다.
서로를 잘 알고 또 느끼고
그래서 더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위로가 되는 날이 많다.
사소한 것에 섭섭하고 사소한 것에 감동하게 되는
지금의 이 젤리 6천 원어치 사랑의 은근함을
나는 무척 사랑하고 있다.
#그래도내년에또젤리사주면
#은근함이고나발이고
#드럽게뜨겁게한판붙는거다
#내가또깜빡했네
#그가실체와현상에만집중된자란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