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퀘스트

by 명랑한자몽




유래 없던 최악의 미세먼지로
온종일 뿌연 하늘을 내 보이던 요 며칠의 날 들.

나는 나무도 아니고 들풀도 아니면서
미세먼지 따라 시들시들거렸다.

물론
예전부터 나는 날씨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되면서 조금 단단함이 더 해진 것 같다.


나의 직업이 엄마가 된 지
어느덧, 1072 일이다.

물론 엄마를 직업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온전히 합당하다고 할 순 없지만,
현재의 나는 '직업'이라는 공란에 '전업주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의 현재 직업은 엄마인 거다.

이렇게 오랫동안 온전히 엄마로 살게 될지도 몰랐고,
아마 앞으로 얼마 동안 이렇게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직업의 가장 어려운 점이 무어냐 묻는다면,
나는 딱 한마디로 이야기할 것이다.


나를 이기는 것


뭐 인생을 살아가며 항상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엄마가 되면서
가장 어렵게 느끼는 것은
진짜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나'이다.

대나무 숲을 통해
그들이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인 것처럼 말해왔었으나
사실 알고 있다.
그 모든 힘든 것의 기저에는 결국 '내가 있다는 것'을.



나는 태생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아침형 인간은커녕 완전히 저녁을 넘어 새벽형이고,

미리미리 계획하는 치밀한 스타일도 아니고,
좋게 표현한다면 창의적이고 임기응변에 강한
미룰 수 있는 대로 미루자 스타일이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렇지만 또 동시에 바지런함에 대한 선망을 가진 아이러니하고 모순적인 사람이며

수더분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쾌활함을 가진 예민한 사람이다.
(쓰다 보니 나... 문제적 여자이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사람이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외적 요인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를 이기며 살 수 있었다.


시간에 쫓겨,
체면에 쫓겨,
관계에 쫓겨,
그렇게 여러 이유와 요인들로 인해
아침형 인간,
부지런한 인간,
사람 좋은 인간으로 말이다.



하지만 엄마로의 삶은,
나를 쫓던 그 많은 것들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쫓기며 이겨나가야 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속 유진우와 같은 시간이다.


만약에 내가 나의 본능을 따라


새벽형 인간으로 밤을 지새우면,
다음 날 너희들과의 전쟁에서 참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집안일을 미룰 수 있는 대로 미루면,
산처럼 쌓여있는 그것들이 나의 예민함이라는 악마를 발현케 하고


예민함이 발현되게 되면,
뾰족하고 차가운 마음을 그들에게 쏟아내게 되어
'사랑스럽고 즐거운 엄마가 되자'는 나의 모토에 완전히 반하는 결과가 되며


외향적인 성향은,
이건 내 성향 중 가장 죽어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어른과 얘기하고 싶어요. 농담 좀 하고 싶어요. 말장난하고 싶어요. 네. 그래요.




나에게 있어 엄마로 사는 이 시간은
나의 본능을 거스르는
매일매일 나를 이겨야 하는

마치 수련의 시간이자 외로운 퀘스트 같다.


그 시간은 어느덧 천일이나 쌓였다.
시간의 힘은 무서운 것인지,

그렇게 나는
의지를 가지고 적정선을 찾아 늦은 밤 정도의 생활을 지켜내며,
할 일이 너무 쌓여버리면 나타나는 예민함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미리 조금씩 집을 치우고
집안일이 밀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예민함이 불쑥 들어오는 날엔
아직은 내 편인 듯 한 남편과 췩힌을 먹는다.

밖에 나가 에너지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예전처럼 밖순이는 아니게 되었고,
수다가 떨고 싶을 땐 이렇게 대나무 숲에 떠드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요즘은 꽤 나의 이 친구들이 꽤 말동무의 역할을 해주고 말이다.
(물론 여전히 성인과의 대화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허허)



이 수련의 시간이 조금 더 채워져서
내가 조금 더 엄마다워졌을 때
엄마라는 직업에 더 큰 자긍심과 이것으로 됐다는 오롯한 행복함을 가질 때
그때는 비로소 나도 엄마 직업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가진 그런 나로도 살게 되면 좋겠다.

그런 날이
더딘 듯 하지만
조금씩 오고 있다면 좋겠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퀘스트를 수행하며 산다.

퀘스트를 실패하는 날도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또 그만큼의 경험치는 올라가겠지.


오늘도
오늘만큼의 경험치를 올리며

오늘도 우리 레벨 업 해 봅시다! 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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