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몇 번의 인생이 있는 것 같다.
그 인생의 카운트는 인생이란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라 생각하는데 아마도 난 일을 하게 된 사회인이 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그 전까진 뭐랄까 그냥 하루하루였다면 그다음부턴 하루란 말이 조금은 가볍고 조금은 산뜻하기도 한 것 같아서 하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인생이다.
그러한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나의 첫 번째 인생은 좀 분주했다.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을 다녔으며 여러 곳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었다. 자주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었으며 오프라인 매장에서 쇼핑도 했고, 게다가 에너지 소비가 어마어마한 연애를 했지.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밀크씨슬과 멀티비타민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지금의 나를 생각했을 때, 그땐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상상도 못 할 굉장한 체력과 열심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인생은 아이를 낳으며 시작되었다. 휴직을 했으며 월등한 비율로 6세 5세 어린이들과의 대화가 많다. 소세지 볶는 것도 안 먹으면 그만이란 생각에 나의 여동생이나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버티다 동생에게 볶아달라 말하던 내가 육수를 내고 강황을 조금씩 섞어 압력솥에 밥을 짓는다. 피아노 반주라곤 기껏해야 C, F, G코드 정도면 되는 노래에 사용되고 있으며 그 어마 무시한 에너지 소비를 필요로 했던 연애가 종료되었다. 아이와 함께 지나가고 있는 나의 두 번째 인생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들과 감정으로 채워지고 있다.
나의 부모님에 대한 내 생각도,
나 자신에 대한 내 생각도,
나의 배우자에 대한 내 생각도,
나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내 생각도,
많은 것들이 조금씩은 달라지기도 보태어지기도 하며 두 번째 인생이 지나가고 있다.
첫 번째 인생에서의 나는 명랑하고 센치했으며 친구를 좋아했고 밤을 사랑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어스름 저녁 즈음은 늘 설렜으며 별로 영양가도 깊이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은데 참 그땐 한없이 심각했고 배꼽 잡게 깔깔댔었다. 두 번째 인생에서는 명랑보단 센치가 강화되었고 친구보단 그냥 혼자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합리화일지도 모르겠지만) 밤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 이유는 조금 달라졌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여전히 늘 설레지만 자주 찾아오지 않는 기회이기에 진짜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오히려 즐거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몇 번의 인생이라고 해도 인생 그래프의 곡선은 다소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나의 첫 번째 인생이 달음질쳐 가파르고 바쁘게 오르다가 결혼을 하며 완만한 기울기로 천천히 내려왔던 것처럼 나의 두 번째 인생도 비슷할 것 같다. 아이를 낳고 그게 연년생으로 번지면서(?)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매일매일이 가파른 나날들이었다.하지만 그 아이들이 커가며 나 혼자의 시간도 생겨났고, 협상이 가능해지면서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아마 이 아이들에게 나의 존재감이란 건 점점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다시 나의 두 번째 인생도 완만한 기울기로 조금씩 마무리가 되어 가겠지. 성질이 아주 다른 듯한 두 인생인데 비슷한 그래프라는 게 자뭇 신기하기도 하다.
나에게 몇 차례의 인생이 더 남아있을지는 모른다. 어떤 이는 한 번의 인생으로 끝까지 살아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그보다 훨씬 많은 몇 번의 인생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까.
요즘의 날씨는 나의 두 번째 인생의 지배적인 특징인 센치함이 가득하다 못해 자꾸만 넘치게 해서 괜히 나에게 아직 몇 번의 인생이 더 남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두 번째가 끝이 아니라서 나의 세 번째에는 다시 나도 조금은 빛났으면 센치함보단 다시 명랑이 강화된 세 번째였으면(사실 으른의 인생에 명랑함은 어쩌면 신기루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나도 몰랐던 새로운 나를 만나는 브랜뉴의 세 번째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