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바이투게더 - Anti-Romantic
2019년, 내가 인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 층에서 근무했을 때였다. 거의 매일 해외에서 입국하는 연예인들(주로 아이돌)의 입국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혹은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연예부 기자와 팬들이 게이트 앞에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기가 많은 연예인일수록 그만큼 많은 팬들이 모여들어 락 페스티벌 현장을 방불케 했고, 그에 비해 한산한 날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날 만큼 엄청난 인파가 몰렸던 적은 딱 네 번 있었다. 슈퍼엠(SuperM) 입국 날, 영화 <캡틴 마블>의 주연배우 브리 라슨의 내한일, 정준영 입국 날(이날은 특히 기자가 많았다. 정준영이 남자 기자에게 머리채 잡힌 현장도 멀리서 지켜보았더랬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 날이었다.
게이트 앞에 서 있는 팬들 중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답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혹시 오늘 누구 와요?”
“투모로우바이투게더요”
“투모ㄹ... 네?”
처음 듣는 그룹명에 발음도 잘 안 됐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이하 투바투)라는 그룹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검색해보니 방탄소년단 후배 그룹이란다.
‘그렇구나. 내가 너무 세븐틴만 좋아했나? 언제 방탄 후배그룹까지 나왔대… 근데 이름이 뭐더라? 투 어쩌구였는데….’
그 뒤로도 그들에게 무관심했던 내가 최근 들어 갑자기 투바투 노래에 아주 깊게 빠져버렸다. 출퇴근길은 물론이고 외출 준비를 할 때, 점심 먹은 후 산책할 때, 설거지할 때, 청소할 때,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음악 들을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투바투의 노래를 듣고 있다. 올해 봄부터 친구의 추천으로 타이틀곡 한두 곡 정도는 듣긴 했지만 다른 수록곡들까지도 이렇게 내 취향일 줄이야!
그중에서 오늘 소개할 곡은 정규 2집 ‘혼돈의 장: FREEZE’의 첫 번째 트랙 <Anti-Romantic>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YAkY8Dh9CU
사실 이 곡을 알게 된 지는 일주일도 안 됐다. 정규 2집이 발매된 지 5개월이나 지났음에도 나에겐 아주 따끈따끈한 신곡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여기에 소개한 곡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스밍 횟수가 낮은 상태에서 리뷰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익숙하지도 않은 곡을 소개하는 이유는, 물론 곡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지난날의 내가 했던 생각이 가사에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Anti-Romantic>은 일레트로닉 팝 장르로, 소년미가 돋보이는 다섯 멤버의 목소리가 아련한 멜로디와 어우러지며 청량하면서도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이다. 청아한 일렉 피아노로 시작해 신디사이저가 추가되면서*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운드는 풍성해지고 감정선은 더욱 짙어진다. <Anti-Romantic>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곡은 사랑을 믿지 않는 ‘나’의 이야기다.
I don’t know who loves me
And I don't care 어차피 낭비
설렘 따위 좀 겁이 나니까
난 알아
달콤한 love song 맹세의 그 말도
돌아서면 결국 낯선 그 someone
누가 자신을 사랑하든 알 바 아니고 상관도 없으며 어차피 사랑은 낭비라고 말하는 ‘나’는 사랑의 상처를 겪은 적이 있는 사람이다. 온 맘을 다해도 결국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사랑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Sorry I’m an anti-romantic
달아나고 싶어 저 멀리
이미 널 쫓는 내 마음이 작은 불씨로 타올라
Sorry I’m an anti-romantic
더는 믿지 않아 romantic
내 맘 전부를 다 불사르고 까만 재만 남게 될까 두려워
‘나’는 스스로를 ‘안티 로맨티스트’라 부르며 새로운 사랑을 멀리하려 하지만, 누군가를 향해 또 다시 점점 자라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등하고 두려워한다. 이처럼 <Anti-Romantic>은 정말로 사랑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 모두가 공감할 만한 가사를 담고 있다. 특히 나는 범규, 연준, 태현의 파트 ‘내 맘 전부를 다 불사르고 까만 재만 남게 될까 두려워’라는 가사가 마음에 콕 박혔다. 작사가가 여러 명이라 누가 이 부분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파트를 듣고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가 있나’ 여러 번 감탄했다. 사랑이 다 닳아버려 공허해진 마음을 ‘까만 재’에 빗대어 표현한 게 좋았다.
4년 전, 블로그 비공개 게시판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세븐틴의 우지를 열렬히 덕질하던 중이었고 그 애를 생각하면서 썼던 문장이다.
“죽어도 좋을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 다가올 이별이 무서워서라도 그 사람과 사랑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덕질을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듣게 된다. ‘만약 OO가 너한테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야?’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지만 금세 슬퍼지는 질문이다. 대개 나의 주접과 호들갑을 기대하며 던진 말일 것이므로 나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오버에 오버를 보태 대답해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사랑은 언젠간 끝나기 마련이고 끝이 있는 사랑을 할 바에야 아예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마 대부분 팬심은 이런 마음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아이돌 팬들은 아이돌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덕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제발 누군가의 팬더러 ‘어차피 걔는 너 모르잖아’ 하는 식의 무례한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투바투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라는 그룹명처럼 곡의 제목들도 특이하고 개성 넘치기로 유명한데, 예를 들어 ‘LO$ER=LO♡ER’ ‘0X1=LOVESONG (I Know I Love You)’ ‘5시 53분의 하늘에서 발견한 너와 나’ ‘날씨를 잃어버렸어’ ‘세계가 불타버린 밤, 우린... (Can't You See Me?)’ ‘동물원을 빠져나온 퓨마’ ‘그냥 괴물을 살려두면 안 되는 걸까’ ‘어느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 (CROWN)’ 등과 같이 동화에 나올 법한, 시적인 제목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소개하는 곡 <Anti-Romantic>의 제목도 그렇다. 기존의 제목들처럼 글자 수가 많거나 발상 자체가 독특한 건 아니지만 ‘Anti-’와 ‘Romantic’은 함께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런 제목들이 좀 과하다며 불호라는 의견도 제법 많은 것 같다.
심지어 투바투는 각 멤버마다 ‘메인댄서’ ‘메인보컬’ 등의 포지션이 존재하는 다른 아이돌그룹과 달리, 리더인 수빈을 제외하고는 그룹 내에 그 어떤 포지션도 없다. 각자 노래마다 자신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파트를 가져간다고 한다. 이처럼 어떤 공식을 파괴하려는 시도들이 낯설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이것이 투바투만의 매력이자 포화된 아이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라고도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투바투의 이런 점들에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여러 콘텐츠들을 찾아보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cOLdRJWN9g
암만 생각해도 2019년에 내가 인천공항에서 보았던 모아(투바투 팬덤명)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투바투는 지금이야 빌보드의 여러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4세대 아이돌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성장했다 해도 당시엔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인 그룹이었는데, 그때 그 수많은 팬들은 어쩜 그렇게 일찍이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걸까? 정말이지 케이팝 덕후들은 하나같이 선구안이 대단한 것 같다.
한편으론 ‘데뷔팬’이 되어보는 게 덕후로서 나의 꿈이었기에 거기 있던 팬들 중 여전히 모아로 지내고 있을 누군가가 부럽기도 하다. 언젠간 나도 누군가의 데뷔팬이 되어볼 수 있을까? 현재 나는 더보이즈의 팬이고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내 삶의 마지막 아이돌이길 바라지만, 만약 예상치도 못하게 누군가가 갑자기 내 맘속에 불쑥 들어오게 된다면, 이 노래의 가사처럼 까만 재만 남게 될까 두려워도 내 맘 전부를 다 불사르고 싶다.
*‘혼돈의 장: FREEZE’ 앨범 소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