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희 Aug 29. 2023

#4. 쓰레기통을 열어보니 내 꿈이 가득했다.

챕터2. 화면 너머의 이야기

#4. 쓰레기통을 열어보니 내 꿈이 가득했다  



  평소에는 빠릿빠릿하게 세상을 탐험하던 뇌가 술에 전 듯 행동을 멈췄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퇴사를 한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현실적인 불안감들이 하도 종류별로 다양해서 내 머릿속에는 매일 공습경보가 울렸다. 그래서 더욱 그런 걸까? 몸은 뇌의 과부하를 막으려는 듯 작고 사소한 유희와 쾌락을 탐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고 움직였다.



  퇴사하고 한 달을 미친 듯이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어찌 됐든 2년간 고생한 나를 위해서였다. 정확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고, 카페를 자주 갔던 것 같다. 그래서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휴대전화로 영상을 많이 봤다. 2년간 밀렸던 신곡과 드라마, 영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문화적으로 내 또래에 비해 많이 뒤처졌음을 느꼈다. TV를 아예 보지 않는 나는 새로 데뷔한 아이돌들의 이름이나 신곡도 몰랐고, 거리에서 나오는 노래는 도무지 아는 노래가 없었다. 코로나로 일하기가 어렵다는 생각만 했지, 미디어 시장이 그렇게 거대해졌을 줄도 몰랐다.



  그다음에는 뛰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을 보았다. 매일 걷던 출근길이 산책로로 변하자, 나는 수백 번을 걸었던 그 길에 일부로서 동화될 수 있었다. 그저 외면하면 소음들은 ‘다들 한결같이 어디를 바쁘게 가는 걸까?’라는 생각이 되었고, 시간을 보며 초조해하던 출근길 건널목은 주변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상을 만나는 시간이 됐다.



  마지막에는 설렘과 불안 사이에서 살 떨리는 외줄 타기 곡예를 하기 시작했다. 전공을 살리지도, 대단한 스펙을 가지지도 않았기에 자꾸만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스무 살 무렵만큼 술도 자주 마셨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스무 살에 처음 만난 대학 동기들과 즐거운 술자리와 그나마 회사가 걸어서 5분이라는 장점만 있던, 서울 고시원에서 스물여덟을 먹고 홀로 마시는 술은 온도가 너무나도 달랐을 뿐이었다. 외로움이 차올라 서울 방을 두고, 며칠씩 친구들이 있는 본가 파주로 올라가서 놀고는 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생각을 해보니 수많은 명언을 남긴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에 주인공 중 한 명인 안소희의 대사가 생각났다.  




“평범했던 내 인생이 그나마 봐줄 만하다고 느껴졌던 건, 술을 마신 순간만큼은 다 내 세상이었으니까.”
“망각은 신의 배려이며 술은 망각의 묘약이다.”



  주인공 세 명의 나이는 모두 서른 살이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 또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그 감정선에 크게 공감했다. 직장과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선택한 1.8평 고시원 방 안에서 작은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그들과 같이 술잔을 기울였고, 울고 또 웃고, 울었다.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히 긍정적인 사람은 맞았다. 언제나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고, 가슴을 두근거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무언가에 치이는 일상에서 내 긍정은 회복이 더딜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나서야 나는 드디어 책상에 앉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하고 싶은 걸 몰라’



  그때부터 나는 지난 한 달을 회상하며, 진짜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선택의 기준과 나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들이 있지만, 가장 순수한 나를 발견할 방법은 호기심만 한 것이 없었다.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이 생기고, 어떤 것들을 스스로 찾고 공부하는지. 호기심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영상을 보았고, 어떤 것을 검색했는지. 나의 호기심은 아득한 정도의 1초부터 찰나의 1년까지 정말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렇게 호기심을 통해 바라본 나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충동구매자였다. 단순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지나가는 광고를 보면 자꾸 구매하고 싶고,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이상하게 비우려고 해도 작디작은 내 집은 점점 채워져 갔다. 이는 공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2년 동안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일에 관한 생각을 버려 나갈수록 내 뇌는 오랜만에 신이 난 듯 다양한 것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나를 이해하는 것에도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흔히 좋은 말로 ‘사색에 잠긴다.’ 나쁜 말(?)로 ‘멍때린다.’ 말하는 행동이 늘어났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실제로 머리는 마치 새로운 차원을 여행하는 듯 나라는 우주를 탐구해 나갔다. 그렇게 나를 알아가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나라는 사람을 완벽히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높고 낮을 수는 있지만, 나의 가능성이나 잠재의식의 영역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남들이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있지만 모순적으로 우리는 5초 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만들어 냈다. 가히 수 싸움의 끝이라 말하는 바둑도 비교하면 광활한 우주 안에 작은 모래 알갱이처럼 초라해졌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뉴런 여행은 표현하기 어렵지만, 우습게도 나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이해하지 않는 영역에 도달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명확히 인지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고적 억압과 세상의 시선 속에서도 나라는 사람이 선택하고 써 내려가고 싶은, 쏟아붓고 싶은 삶의 역사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목표로 정의하기에는 표현하는 데 있어 모호하고 추상적인 감정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역사를 위해 해나가고 싶은 것들을 ’꿈‘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그리고 지나온 삶의 실수가 있다면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 기억이 닿는 시작점부터 27살 크리스마스 과거를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희로애락을 맛봤다.



때로는 부끄러움을 들었고, 때로는 자만심을 보았다.



찢어지고 부러지되 자라온 일상에 닿았다.



그리고 마침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과거의 나로 인해 버려진 수많은 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마침내 나는 그 구겨진 꿈들을 하나씩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펴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손처럼 주름진 꿈들은 그래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챕터2. 화면 너머의 이야기

2-1) 쓰레기통을 열어보니 내 꿈이 가득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3. 꿈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아이들이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