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것이 아니었던 이름을 지우는 것
가장 먼저 죽인 것은 이름이었다.
내 것이 아니면서도 나를 점령하던 이름.
어떤 감정은 호명되기 전부터 이미 맥박을 지닌다. 어떠한 형태도, 음영도 갖추지 않은채 자궁의 내부처럼 깊은 어둠을 고요히 데우며 머문다.
너라는 감각이 식도의 안쪽을 스치며 내려가 폐 뒤편에 그림자를 드리울 때, 나는 직감한다. 그것은 만져지지 않는 존재였으나 분명 태동하는 무언가임을.
그 감정은 마치 거처를 분양받은 것처럼 이미 곳곳에 기척을 남기며 제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사랑을 멈추는 일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무언가의 숨통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끊어내는 일과 닮아 있다.
사랑은 실체가 없지만 사라진 이후에는 육체 어딘가에 검푸른 멍처럼 흔적을 남긴다. 나는 너의 자리였던 곳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한참동안이나 누르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어떤 호흡도, 한 톨의 미련도 남지 않도록. 그 안에서 나는 시신을 닦듯 감정을 지웠다.
기억은 살점처럼 떼어내어 냉각했고, 감정은 밀폐용기 속에 단단히 묶어 숨겨두었다.
사랑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사랑한 채로 사랑을 죽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 후 나는 능숙한 배우처럼 움직였다. 잘 씻고, 잘 먹고, 잘 자고, 때로는 적당히 웃으며 ‘정상인’의 윤곽을 흉내 냈다. 사람들은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말 속에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자의 시린 무지가 섞여 있었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여백 따위는 남지 않는다. 그 자리는 뜯긴 살점처럼 조악하게 봉합되고, 봉합선 아래로만 고름이 차오른다. 그 안이 얼마만큼 썩었는지 타인은 알 수 없는 구조다.
그러다 문득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날카롭게 욱신거린다. 그것은 이름 없는 장기의 반란처럼 진단할 수 없는 슬픔 이었고, 공식화되지 못한 애도이자 내적 사망신고 였다.
너는 더 이상 감정이 아니었다. 내게는 명칭을 잃어버린 증상이었고, 부검되지 않고 묻혀질 사랑이었다.
전하지 못한 문장은 내장 깊숙이 구겨진채로,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편지봉투처럼 남아 있다. 마치 풀리지 못한 감정이 퇴적된 비밀스러운 무덤 같았다.
결국 사랑을 지운다는 건 감정을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의 일부를 절단해내는 행위에 가깝다. 선택이었으나 체념이었고, 구원처럼 보이나 자해에 가까운 처치였다.
누군가는 나를 잔인하다 말하겠지.
그러나 더 잔혹한 건 끝내야 할 줄 알면서도 감정을 계속 자라나게 두는 무책임이다. 나는 아주 이기적인 방식으로 나를 보존했고, 그 결과 너는 서서히 냉각되어갔다. 그리고 이내 그 차가움에 적응해갔다.
사랑은 결국 소멸하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꿔가며 잠복할 뿐이다. 언젠가 내가 봉인해둔 마음의 보관함을 실수로 열어젖히는 날, 가장 먼저 튀어나올 감정의 파편, 발화되지 못한 찌꺼기, 미처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존재의 사후적 몸짓.
이 글은 너를 떠나보낸 기록이 아니다.
사랑과 함께 잘려나간 나의 결손 목록이자 소거된 자아의 변형사다.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도려내며 함께 잃어버린 나의 잔해.
이상하게도 하늘이 유난히 세차게 푸른 날이면, 갈비뼈 아래 어딘가가 아직도 베인 듯 욱신거린다.
살아 있던 것을 죽였던 기억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글, 편집 | 유옥(瑜)
@0k.Y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