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春光乍洩, 구름 사이로 잠깐 비추는 봄 햇살

지독히도 쓸쓸하고 아름다운 영화 <해피투게더> (1997)

by 유원


영화가 내게 찾아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난데없이 내 인생에 침입해오는것과 비슷하다. 침입이라는 부정적인 어감을 지닌 표현을 선택하긴 했지만, 그 경험은 경이롭기도 하고 때때로 삶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고통스럽다.


해피투게더는 내가 본 첫 홍콩영화였다. (정확히는 화양연화가 첫번째지만 그땐 그것이 홍콩영화인줄도 모르고 봤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중화권 영화보다는 일본영화와 한국영화를 더 즐겨보았던터라 홍콩영화의 진입장벽이 늘 높게 느껴졌다. 젊은 시절 영화 좀 본(?) 엄마는 독립영화관에서 봤었던 끝내주게 지루한 프랑스 로드무비등을 얘기하면서 항상 빼놓지 않고 몇몇 홍콩영화의 이름을 함께 거론했다. 그럴때마다 꼭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넌 영화도 좋아하는 애가 그런 건 왜 안보냐? 나는 홍콩영화를 떠올리면 늘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었다. 노란 추리닝을 입고 쌍절곤을 휘두르는 이소룡이나 선글라스를 끼고 기름을 발라 머리를 넘긴 아저씨들이 총격전을 벌이는 가운데 인위적인 총소리와 긴박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는 류의 이미지였다. 후자는 아마도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에서 어느 정도 탄생한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간에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확실했다.


어느날 엄마와 티비를 보는데 배우 두명과 가수 한명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예능프로그램을 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행선지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배우 강하늘과 안재홍을 평소 좋아했어서 흥미롭게 보게되었다.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기도하고 이과수 폭포에 찾아가 물벼락을 맞기도 했다. 인상적인 탱고 음악이 자주 배경음악으로 깔렸다. 프로그램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해피투게더를 소개하면서, 세 멤버가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옛날부터 그 영화를 내가 좋아할거라고 말하곤 했다. (듣고도 언젠가 봐야지 하면서 미뤄뒀지만) 그 프로그램을 보고나서야 나도 왠지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영화도 있는 법이다. 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직후에도 쉽사리 재생하지 못한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다. 맛있는 반찬을 가장 아껴두었다가 먹는 초등학생의 심정이라고 해야하나.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밤 그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피투게더는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영화였다.


동성애를 다룬 좋은 영화들이 많지만, 동양권 영화는 서양권 보다 그 수가 드물다. 나는 동성애자가 아님에도 항상 그들의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몰입하고 말려든다. 하지만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한 1997년 당시에 이 영화는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그 시대와 동양권의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문화를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파격적이였을지 짐작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두 남자가 침대에서 벌이는 흑백의 정사씬으로부터 시작한다. 2020년의 나조차도 보면서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흑백으로 시작해서 흘러가다가, 어느 장면 부터 돌연 색이 입혀진다. 그 장면들에 압도당하는 경험은 놀라웠다. 연출 하나하나, 카메라의 작은 움직임조차 생경했으며 무엇보다도 감각적이었다. 초반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극중 보영이 다른 남자와 함께 아휘가 일하는 술집으로 들어가는데, 보영의 시선으로 뒤에 남겨진 아휘를 바라보는 짧은 컷이다. 두어번 돌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방식의 화면들이 단번에 나를 매료시켰다.


보영과 아휘는 홍콩에서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에 찾아온 연인이다. 목적은 이과수 폭포를 보기 위함인데, 제대로 찾아가지도 못하고 기약없이 체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헤어지게 된다. 영화는 둘의 관계가 종결되면서 시작된다. 그러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라는 보영의 대사와 함께 영화는 서서히 색채를 되찾는다. 재발병한 사랑은 면역도 없이 두 사람을 다시 옥죈다.


나는 아휘 역을 맡은 양조위를 화양연화와 색계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음에도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못했다. 심지어 보영 역을 맡은 장국영과 헷갈린 나머지 양조위를 장국영으로, 장국영을 양조위로 착각했다. (왜 영화를 볼때만 안면인식장애가 생길까?) 장국영이 섹시하다는 친구의 말에 난 양조위가 더 섹시하던데... 하고 말했다가 독특한 취향을 지녔다는 눈빛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보영이 장국영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소한 해프닝. 뒤늦게 덧붙여보면 변명 같지만 나는 양조위도 좋아한다.


아휘와 보영의 관계는 누가봐도 이 영화의 핵심이자 근원이다. 나중에는 이 두 사람이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충돌을 일으킨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영화가 퀴어영화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두 연인이 아휘와 보영이 아니라면 어땠을까? 더 나아가, 양조위의 아휘와 장국영의 보영이 아니면 어땠을까? 이 영화에서 절대 성립하면 안되는 가정문들이다. 그만큼 양조위와 장국영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행동과 대사와 눈빛으로 영화를 가득 채운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왕가위 감독은 자신 영화의 핵심적인 페르소나들인 양조위와 장국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양조위는 기다리거나 매혹되고 끌려가는 인물이고, 장국영은 배회하다가 돌아오는 인물이며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인물이라고. (왕가위와 양조위가 장국영의 실제 모습과 보영이 가장 닮았다고 입을 모아 진단하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의 아휘와 보영이 정말로 그렇다. 영화 첫 부분에서도 나오듯이 보영은 반복해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인물이고, 아휘는 늘 그런 보영을 받아준다. 아휘는 보영을 내치고 외면하면서도 결국 전화를 건 보영에게 찾아간다. 보영이 입을 맞추는데도 술병을 집어던지고 화를 내면서까지 그를 기어코 떠나지만, 피범벅이 된 손을 하고 비틀대며 찾아온 보영을 끌어안는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택시 안, 보영이 아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흑백 세상은 색을 되찾는다.


보영은 아휘의 낡은 방에 함께 살게 된다. 카메라는 그 작은 방을 상자 속을 들여다보듯이 네모낳게 잡아낸다. 거기에는 아휘가 담배갑을 빼곡히 채워넣는 선반과 얼굴 만한 크기의 노란색 티비, 보영의 가죽자켓이 걸린 옷장, 두 사람이 아휘가 해 온 밥을 먹는 식탁, 침대와 소파, 더러운 거울과 세면대, 이과수 폭포가 새겨진 전등과 두 사람이 담긴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재떨이 등이 어지러히 펼쳐진 협탁이 있다. 이 집의 형색은 그야말로 해피투게더 그 자체이며 아휘와 보영의 역사가 먼지처럼 쌓이는 장소이다. 거기에서 두 사람은 탱고를 추고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우기도 하며 서로를 바라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장면은 아휘가 침대에서 자고 있는 보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바로 이어서 소파에서 잠든 아휘를 잠에서 깬 보영이 또 바라보고 있는 씬이다. 서로의 잠든 모습을 그렇게 보아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소파는 아휘가 보영에게 침대를 내주고 자신이 자던 곳이기도 하며, 영화 마지막 즈음엔 보영이 아휘의 담요를 안고 울던 장소이기도하다. 이렇듯 그 방의 모든 물건과 가구에 서사가 담겨있다. 그렇다는건 우리가 두 사람의 사랑의 역사가 새겨지고 파괴되는 순간들을 화면속에서 고스란히 쫓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왕가위 감독은 중경삼림에서의 양조위의 입을 빌려 말한 바를("이 방에 점점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다")해피투게더에서 낭만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를 보며 당황스러움을 맞닿뜨리는 순간이 있다면 분명 폭포 장면일것이다. 뜬금없이 장대한 이과수 폭포를 위에서 부감하는 장면이 약 2분 동안이나 이어진다. 어떠한 나레이션도 없고 배경음악으로 waterfall cucuruucucu paloma라는 라틴음악만이 흘러나온다. 심지어 이런 컷은 초반과 후반에 두번 반복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장면이 이 둘의 관계의 재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책갈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초반부에 흑백이 컬러로 바뀔때에 한번, 후반부에는 보영이 떠난 아휘의 담요를 끌어안고 우는 장면과 아휘가 혼자서 이과수 폭포에 찾아가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물벼락 세례를 맞는 장면에 뒤이어 나온다. 처음에는 황당하게 느껴졌던 이 폭포 장면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자칫하면 뻔하고 인위적인 장치가 될 수 있는 이런 삽입을 절묘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도 왕가위 감독의 재능 중 하나 아닐까.


이 글을 쓰려고 영화를 한번 더 재생해보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되었는데, 처음 보았을때도 그런 비슷한 웃음을 지었던게 생각이 났다. 이 연인은 시종 다투기만 하는 것 같은데 대화 내용과 싸움 주제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유치하다. 아휘는 보영에게 그렇게 꾸미고선 어딜 다녀오냐고 눈치를 주고, 보영은 아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아휘가 일하는 식당의 동료와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 그거 했냐는 질문에 아휘가 화를 내며 넌 그럼 다른 사람이랑 안잤냐고 되묻는다. '누구랑 잤는지 다 말하려면 밤을 새야한다'는 보영의 쓴웃음엔 '나는 되는데 넌 안돼' 식의 뉘앙스가 깔려있다. 아휘가 보영의 여권을 돌려주지 않으면서 질투와 구속, 집착이 두 사람의 감정을 골을 깊게 만든다. 아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영이 손을 다쳐 누워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고. 그러면 그가 떠나지 않고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일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상 아휘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메이킹 필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로디그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국영은 스케줄 상 끝없이 늘어지는 아르헨티나에서의 촬영을 감당할 수 없어 중간에 귀국했다. 출연 비중을 떠나서라도 보는 사람은 저절로 아휘에게 이입하게 될 것이고, 보영이 이기적인 애정결핍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영같은 인물이 곧잘 우리에게 애증의 상대가 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해되지 않는 제멋대로의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이해하게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를테면 아휘는 보영이 떠난 뒤에 찾아간 어두운 극장에서 낯선 남자의 애무를 받으며 보영을 떠올린다. 보영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였을거라고. 영화는 아휘가 없는 아휘의 작은 방에 보영이 찾아가 열심히 쓸고 닦으며 한때 자신이 집어던졌던 담배갑을 선반에 가득 채워넣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보영에게 유일한 사랑은 아휘뿐이었을것이다.


보영이 떠난 뒤 아휘는 식당 동료인 장과 미묘한 관계가 된다. 이 장이라는 인물이 보영과 닮은 것은 감독의 의도라고 한다. 아휘는 보영이 없는 곳에서도 보영을 본다. 영화는 장과의 관계를 흘려보낸 아휘가 홍콩에 돌아오면서 끝난다. 보영은 이 서사 뒤에 홀로 남겨진 존재가 된다. 그가 더 고독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까? 그는 과연 폭포를 보았을지, 홍콩으로 돌아왔을지, 아니면 그 외딴 땅에 영원히 남았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왕가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 많지만, 내게 인상깊었던 것 중 하나는 이방인이었다. 이름모를 낯선 외지인들이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마구 떠들거나 인물들에게 뭔가를 따지거나 총을 쏘거나 한다. 주인공은 그 가운데에 앉아서 쓸쓸한 얼굴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운다. 감독은 해피투게더에서 그 낯선 군중 속의 고독이 극에 달한 상황으로 인물들을 몰아넣는 것 같다. 심지어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조차도 군중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 소머즈처럼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능력을 지닌 외로운 인물이다. 아휘와 보영은 말할 것도 없다. 아르헨티나라는 멀고도 이질적인 땅에서, 이미 여러번 끝나고 다시 시작하길 반복하면서 너덜너덜해진 그들 관계의 권태로움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 안에는 숨막히는 낭만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고통스럽고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어떤 평론가는 이 영화를 표현하는 단어로 'exile' 을 골랐다. 왕가위 감독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화면안에 고독을 잘 담아내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인물들이, 혹은 우리가 굳이 이역만리에서의 망명 상태가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고독일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해피투게더는 터틀스의 노래제목에서 따왔다. 그 노래는 얄밉게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 갈때가 되어서야 흘러나온다. 흥겹고도 어딘지 어두운 멜로디가 영화의 느낌과 꽤나 닮아있다. 왜 해피 투게더라는 제목일까? 그들은 함께 있다고 해서 행복하진 않다. 오히려 불행해보인다. 그럼에도 행복했던 순간이 조금이나마 있을 것이고, 그 순간은 그래서 더 찬란했을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어찌보면 정확히 두 사람의 관계를 진단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는 春光乍洩 (춘광사설) 이라는 중국어 제목도 가지고 있다. 춘광사설은 '구름 사이로 잠깐 비추는 봄 햇살' 이라는 뜻이다. 제목으로나마 영화는 이 연인들을 위로한다. 그 사랑과 실존의 괴로움 속에서, 그래도 너희들은 일순간이라도 따뜻하지 않았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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