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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뱃삯은 9만원

by 최동준
Instagram @_o.r.c.a _WWRW_21

오랜만에 병원에 왔다. 올해 3월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단약 했다. 고개를 휙 젓거나 빠르게 움직이려 할 때마다 갑자기 머리에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듯한, 중심을 잃을 것만 같은 부작용이 한동안 있었다. 갑자기 약을 왜 끊어버렸는지, 가끔은 부작용을 왜 즐거워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접수도 하시고 약을 지어주는 선생님은 파마를 하셨고 마스크 벗은 얼굴을 처음 봤다. 원장님은 조금 더 할머니 같아졌다.


그동안은 어땠는지, 잠을 잘 잤는지 여러 가지를 물어보셨다. 왜인지 여기서는 말을 잘 못하겠다. '어...' 같은 걸 세 번쯤 하면 작게나마 소리가 나온다. 그럼 점점 의자에서 일어나다시피 '네?' 하곤 고갤 내미신다. 나는 점점 추수를 앞둔 벼를 닮는다. 오랜만에 왔으니 검사도 새로 해보자고 하신다. 대신 병원 닫을 때가 다 되었으니 문제지와 검사지를 챙겨줄 테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올 수 있냐고, 남은 약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어...'


파마가 잘 어울리는 선생님이 2년 전에 했던 그 검사지를 마치 처음처럼 설명해 주셨다. 300개 조금 넘는 문항에 매우 그렇다, 전혀 아니다 같은 걸 체크하라고. 저번에 메뚜기 100여 종 그건가 싶었다. 4만 원 정도를 냈다. 다음 달엔 전셋집 대출이자도, 카드값도, 진단서 비용도 대책이 없다. 9만 원이 남았다.


무슨 바람이 들어그런지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1시간 정도 중랑천을 따라 걸으면 됐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누가 내 정신과 봉투를 알아볼까 불안했다. 도심지를 벗어나 물이 보였을 땐 속옷 봉제선이 자꾸 사타구니를 긁었고 발가락도 어딘가 자꾸 쓸렸다. 최대한 정상 같은 모습으로 걸으려고 애쓰다 보니 아는 길목이 나왔고 현관에 다다랐을 땐 전기장판을 껐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물이 달았다. 마지막으로 언제 물을 마셨나 싶다. 한참을 미적대다 라면을 끓여 먹곤 침대에 누웠다. 어젯밤은 왜 잠들기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밤까지 새우고 예비군 훈련까지 마치고 돌아왔는데. 별안간 침대가 번지점프처럼 가라앉아버리는 듯한 느낌에 짧게 발작을 몇 번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거 죽는 거였는데 내가 돌아온 건가 싶다.


검사지를 볼 선생님이 힘들까 봐, 떨리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깔끔하게 채우려고 했다. 김정태 시인은 대체 누구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주입을 해, 남들이 듣지 못하는 걸 듣는 건 내가 음향과를 나와서인데 뭐라고 해야 하지. 메뚜기는 어디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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