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기원]의 저자 한나 아렌트의 시선에서 해석한 <카스테라>
냉장고가 존재하고 한 세기가 바뀌기 전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 소설 <카스테라>의 시대적 배경은 20세기이다. 그렇다면 20세기는 어떤 시대였을까? 20세기 여성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에 관점에서 볼 때에 20세기는 전체주의의 시대였다.
산업혁명 후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은 잉여인간과 잉여자본을 발생시켰다. 제국주의가 잉여자본의 조직이라면, 전체주의는 잉여인간의 조직이다. 전체주의 정권은 개인을 쓸모없는 잉여존재로 만드는 정치적 도구와 정치를 발전시킨다. (출처: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필자는 소설 <카스테라>의 “최초의 훌리건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였다”라는 문장에서 착안하여 잉여인간에 불과했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냉장고’를 만나 전체주의의 ‘폭민(mob)’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으로서 해당 소설을 해석하고자 한다.
소설 속 카스테라의 주인공은 외로운 존재로서 묘사된다. 독신이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학교 앞의 높은 언덕 위의 자취방에 거주한다. 그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있지만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아르바이트와 같은 경제 활동에도 전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가치창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에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자본주의가 낳은 잉여인간이다. 또한 냉장고가 심하게 울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다버리기 보다는 그것에 익숙해져버린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인간상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수동적 인간상인 잉여인간은 사회에 대한 절망과 증오로 가득하여 자신을 구원해줄 구세주들을 기대하게 된다.
잉여인간에 불과했던 소설 속 주인공은 ‘냉장고’를 만나면서 점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간다. 냉장고는 전생에 리버풀의 훌리건으로 묘사될 만큼 굉장한 소음의 소유자이며 “밀어버려”를 주장하며 대중을 선동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냉장고는 세상을 ‘정화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부패와의 투쟁’을 해나갔는데 여기에서 강한 역사적 발언권이 생긴다. 강한 역사적 발언권을 바탕으로 대중을 선동할 줄 아는 냉장고에는 ‘카리스마적 리더’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카리스마적 독재자는 20세기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비유될 수 있다.
소설 속 <카스테라>의 주인공 ‘나’는 카리스마적 리더인 ‘냉장고’에 발언에 탐닉한다. 전체주의의 리더는 절망에 가득 찬 대중에게 개인적 정체성 대신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냉장고의 역사적 과제였던 ‘부패와의 투쟁’을 소설 속 주인공이 이어받아 나가는 모습은 소설 속 주인공이 전체주의의 ‘폭민’으로 변해가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체주의는 그 세력의 유지를 위해 선전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전체주의는 전체주의 계층 바깥의 ‘외부역’을 끌어들이고 이를 대중들이 불만을 쏟아낼 표적으로 여기게끔 하였다. 이들은 사회에 이득인지 해악인지의 기준에 따라 ‘외부영역’을 선정하였다. 히틀러가 선택한 유대인과 폴란드 지식인, 스탈린이 반혁명분자로 지목한 러시아 지성인들은 전체주의에 의해 희생된 ‘외부 영역’이었다. (출처: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전체주의의 폭민이 된 주인공은 철저히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사회에 이익이 되는지 해악이 되는 지에 따라 대상을 평가한다.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출판물들을 한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평가하며 사회의 이익을 저울질 하는 모습은 과거 전체주의 국가들이 국가의 해악인 지 판단한다는 명목으로 출판물을 검열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 후에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냉장고에 넣는다. 냉장고에 넣는다는 행위가 ‘냉동’과 ‘감금’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냉동시키는 것은 굉장히 비인륜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폭민으로 변한 주인공이 점차 단순히 사회의 이해득실에 따라 ‘외부영역’을 지정하고 이들을 매도하면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이렇게 인간성을 상실한 ‘폭민’들은 본인들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소설 속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냉동하면서 어떠한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른다고 인식하지 않고 ‘부패와의 투쟁’이라는 행위로 인식한다. 자신의 행위가 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체주의가 낳은 폭민들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합리화했다. 개인의 도덕과 윤리 관념이 역사적 운동의 일환이라는 그럴듯한 미명 뒤에 가려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미국’과 ‘중국’ 같은 거대한 국가 또한 ‘외부영역’으로 지정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미국’을 적으로 규정한 것과 일본이 ‘중국’을 적으로 규정한 것처럼 전체주의의 분노의 대상이 하나의 국가로까지 번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규정은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전체주의가 지배했던 20세기에는 ‘하나의 세계’ 자체가 복잡한 반목과 대립으로 얽혀있었다. ‘나’는 전쟁, 반목, 대립으로 얼룩졌던 20세기를 끝마치며 어떠한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공허함은 왜 더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에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라고 말하는 주인공에게서 20세기를 마치는 주인공의 아쉬움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의 다짐처럼 신기하게도 세기가 바뀌자 냉장고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오히려 냉장고에는 ‘차가움’이라는 이미지와 걸맞지 않게 ‘따뜻한‘ 카스테라가 놓여있다. ‘나’는 따뜻한 카스테라를 먹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에는 20세기를 전체에 대한 이해득실이라는 미명 하에 반목과 대립으로 보냈던 역사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또한 21세기에는 20세기와 달리 반목과 대립 같은 ‘차가움’보다는 사랑과 존중 같은 ‘따뜻한’ 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1세기가 완전히 ‘따뜻한’ 사회가 되었는지는 다시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앵그리 화이트(Angry White)의 표심을 자극해 트럼프가 당선되어 반이민 정책과 보호무역주의를 펼치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브렉시트 이후 자국 이기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성난 군중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카스테라>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의미심장하다. 우리들 모두 <카스테라>의 주인공처럼 쉽게 폭민으로 돌변할 수 있다. ‘악’은 우리 일상의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인 ‘냉장고’처럼 우리 일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카스테라>의 ‘나’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사회의 이익과 해악을 저울질하기 보다는 세상과 타인을 따뜻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랑’이 필요한 시점이다. 존재의 의미를 찾기보다 존재 자체를 의미있는 것으로 바라볼 때에 우리 삶의 온도는 ‘차가운 냉장고’에서 ‘따뜻한 카스테라’로 다가오게 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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