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 담긴 인간의 두 가지 의지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야 원하는 걸 쫓아가는 사람들과 안 그런 사람들. 원하는 걸 추구하는 정열적인 사람들은 원하는 걸 못 얻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 생기가 넘쳐요. 그러니까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별로 후회할 게 없어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의 등장인물인 맥신은 세상 사람들을 ‘의지’라는 기준에 따라 두 부류로 정의한다. 크레이그, 맥신, 레티, 레스터 박사 등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각기 다른 ‘목적’이 있고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각기 다른 ‘의지’가 있다. 이 비평문에서는 인간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개념으로 <존 말코비치 되기>를 해석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의지’라는 개념으로 삶과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철학자는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생에의 의지’를 주장한 쇼펜하우어이고, 다른 한 명은 ‘힘에의 의지’를 주장한 니체이다. 쇼펜하우어는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현실세계를 ‘표상’으로, 현실세계를 이끌어나가는 본질적인 힘을 ‘의지’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 의지는 인간이 살아있고자 하는 갈망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에의 의지’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맹목적인 삶의 의지가 객체화되서 나타난 것일 뿐이며 사랑 또한 종족 보존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성적 충동일 뿐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끝없이 허무한 욕망에 불과한 맹목적인 생의 의지를 멈추고 금욕적인 삶을 살 것을 주장하였다. (출처: Arthur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
반대로 니체는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이유는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를 넘어서 초월을 하려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힘에의 의지’로 불렀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어떠한 사상과 가치, 관념이 절대적인 가치관으로 추앙되는 것을 지극히 거부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세상을 개혁하고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는 삶이 인간이 지향해야할 궁극의 의지로 보았고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위버멘쉬(초인)라 칭했다. (출처: 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1892)
<존 말코비치 되기> 영화의 1차적인 세계관은 레스터 박사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몸을 바꾸어 나가며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레스터 박사는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를 그대로 따라가며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보여주는 인물로 쇼펜하우어가 말한 ‘생에의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레스터 박사의 맹목적인 ‘생에의 의지’는 그의 비서인 플로리스에게도 그대로 표출되는데, 그는 플로리스에게 저급한 성적 충동을 느끼고 그것을 서슴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발언한다. 즉, 그는 종족 번식과 영생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생에의 의지’를 가진 인간상인 것이다.
레스터 박사와 비슷하게 맥신 또한 ‘생에의 의지’를 가진 인간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맥신의 관심사는 온통 돈과 명예이다. 크레이그가 처음 존 말코비치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하였을 때 맥신은 통로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그 통로가 돈이 되는 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어떠한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하기 보다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영화 초중반의 맥신은 레티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말코비치의 육체에 있지 않을 때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후에 크레이그가 말코비치의 육체를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게 되자 크레이그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는데 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정신적인 교감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미래 세대 유전자에게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힘있고 매력있는 육체를 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스터 박사와 맥신과 달리 크레이그와 레티는 단순한 ‘생에의 의지’를 넘어서는 의지를 발현하는 인물들이다. 먼저 그들의 관심사를 보면 레티는 동물을 키우는 것에, 그리고 크레이그는 인형극을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동물과 인형극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선 큰 의미가 존재한다. 이들은 동물을 보호하고 인형극을 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아를 실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이들은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를 가진 인간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레티와 맥신의 사랑 또한 ‘힘에의 의지’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동성애는 종족 번식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레티와 맥신의 사랑은 ‘생에의 의지’를 넘어선 갈망이고 사회적 금기를 무시하고 자신의 본능에 따라 사랑을 쟁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힘에의 의지’의 발현이다. 존 말코비치와 레티의 육체를 넘나드는 이들의 사랑은 존재를 초월한 사랑이다. 더욱이 마지막에 맥신이 레티를 선택하는 부분에서 맥신은 ‘생에의 의지’를 따르던 인물에서 ‘힘에의 의지’를 따르는 인물로 인물의 성향이 변하는데 이는 맥신이라는 인물의 입체성을 보여주며 맥신이 단순히 삶에 필요한 돈과 명예를 넘어서는 더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마지막 등장인물인 크레이그는 그 누구보다도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인간상이다. 크레이그가 갈망하는 대상은 인형극이다. 그는 인형극이 돈벌이가 되지 않거나 주변 사람의 멸시를 받아도 인형극을 끝까지 사랑했다. 크레이그가 맥신을 사랑하는 점도 그녀의 젖가슴보다 그녀의 태도와 몸가짐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크레이그는 성적인 욕구에서 맥신에 대해 호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형극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몸짓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사랑으로 발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남의 몸을 조종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맥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존 말코비치의 육체를 이용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존 말코비치의 육체를 조종하는 것이 단순히 성적 욕망이나 그의 부와 명예를 쟁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존 말코비치의 육체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불모지였던 인형극에 다시 도전하고 존 말코비치의 육체와 결합하여 성공을 쟁취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인형극에 대한 사회적 인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또한 그는 영화 말미에 맥신을 지키기 위해 존 말코비치의 몸에서 나오게 되는데 이는 크레이그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부와 명예와 같은 ‘생에의 의지’ 또한 버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맥신에 대한 사랑을 위해 크레이그에서 존 말코비치로, 존 말코비치에서 크레이그로 존재(형상)를 변환한다. 이것은 크레이그가 생존이라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존재를 초월하는 인간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니체는 존재를 초월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궁극의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보았고 그 사람을 위버멘쉬(초인)이라 칭했다.(출처: 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1892) 니체에 따르면 크레이그는 위버멘쉬(초인)이다.
인물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존재(형상)를 변환하며 이야기 전개가 흘러가는 이 영화는 사뭇 기괴하게 느껴진다. 남의 육체를 빼앗는 것에서는 비도덕적이라는 느낌까지 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도덕이나 관념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이미지는 정태적인 반면 생명이라는 이미지는 동태적이다. 삶이란 동태적인 무언가다.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보다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삶의 역동성과 생기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삶은 결과보다 과정에 그 의미가 있다. 돈, 명예, 사랑을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맥신을 갈망하는 에밀리(크레이그)의 눈에서 생기가 느껴지는 이유이다.
(공백포함: 3914자 / 공백제외: 2998자 / 평가: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