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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일기 Feb 06. 2024

런던 회사 첫 출근

내가 런던 직딩이 되다니


아침 6시에 일어나 어제 풀던 문제를 조금 보다가, 어제 저녁에 미리 만들어둔 스팸야채볶음(?), 역시 어제 해둔 쌀밥, 그리고 런던에 와서 자신의 진가를 200% 발휘하고 있는 김자반을 꺼내 먹었다. 건강을 생각해서 사과도 하나 먹었고, 외국의 바리스타들도 반했다는 믹스커피도 한잔 마셨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화장을 했다. 어두컴컴한 백열등 밑에서 삐뚤빼뚤 눈썹을 그리면서, 주말엔 꼭 거울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첫 출근 날이다. 내가 런던에서 출근을 하다니. 그토록 외국에 나와보고 싶었는데, 마흔이 되어서야 나의 오랜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대학교 때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한동안 영국문화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10년 가까이 유튜브 영국남자 채널도 열심히 봤다. 런던 직딩 브이로그도 꽤 오래 봤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렇게 간접적으로만 접하던 런던에 와있다는게 너무 신기하기만 하다.


작년엔 뭐에 씌이기라도 한것처럼 링글을 매일 40분씩 하면서 한풀이를 했다. 어학연수도 못가봤는데, 이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싶어서 영어회화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내는 동기들 중에서 어학연수를 안다녀온 사람은 내가 유일했었다. 이제라도 마음껏 해보자 싶어서 매일 링글을 했다. 점심, 저녁, 새벽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야근이 있는 날이면 저녁시간에 저녁을 굶고 대신 링글을 했다. 솔직히 지금 이 나이에 영어회화를, 그것도 고작 하루 몇십분씩 원어민과 대화를 좀 해본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길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저 내가 해볼수 있는데까지 해보고 싶었다.


이제 링글이 아니라, 실제로 원어민들과 만나서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외국 경험이 흔한 요즘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 이런걸로 이토록 감동하느냐고 촌스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이 기회가 너무도 감사하고 소중하다.


그래도 첫날이니 조금은 포멀하게 옷을 입되, 추운 날씨를 감안해 패딩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구글 맵을 켜고, 수많은 런던의 출근 인구와 함께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걱정과는 달리 DLR에서 Central Line으로 갈아타는 것도 별탈 없이 잘 해냈다. 구글에서 DLR을 타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추천해주어서 그대로 출근을 했는데, 내일은 Elizabeth Line을 타는 방법을 시도해봐야겠다.



주말까지만 해도 출근이 너무 걱정되고 긴장되었었는데, 오히려 막상 부딪히니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혹시 잘 못알아들으면 다시 한번 물어보면 된다, 내가 원어민도 아닌데 영어 좀 못하면 뭐 어때, 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졌다. 안내데스크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나를 담당하는 직원이 나왔다.


오전 내내 IT 교육을 받고, 앞으로 몇개월간 내가 앉게 될 자리를 배정받았다. 노트북을 설치하고, 앞으로 나를 담당할 직원과 함께 이 방 저 방 인사를 다녔다. Hi, 나 여기 이번에 새로 왔어, 라고 말하면 다들 똑같은 질문과 반응들이어서 같은 말을 백번쯤 반복한 느낌이었다. 만나서 반가워, 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내 이름을 말해야 하는데 가끔씩은 타이밍이 엇나가기도 했다.


인사를 모두 마치고 나니, 점심 시간이 되었다. 월요일은 회사에서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날이라고. 보통은 재택근무도 많이들 하는데, 점심을 먹으러 월요일에 일부러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런던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회사에 나오고, 월요일과 금요일은 재택근무를 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연간 휴가도 기본이 5주라고 들었는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워라밸을 찾으려면 런던에 와야되겠구나 싶었다. 물론 살인적인 렌트비와 다소 불편한 점들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아침 내내 영어로 말했더니 배가 미친듯이 고팠다. 사실 내가 영어로 최장시간 얘기해본 경험은 링글에서 40분짜리 수업을 한 것이 거의 전부다. 게다가 영어로 말할 때는 이상하게 다른 자아(?)가 나와서 목소리톤도 조금 올라가고,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쓰게되는 것 같다. 서구권에서는 조용한 사람보다 활달한 사람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다보니, 혹시라도 그런 스테레오타입으로 내 첫인상이 남을까봐 더 활발한척 했던 것 같다.


밥을 먹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들 열심히 대화 중이다. 뭔가 선뜻 대화에 끼기가 쉽지 않다. 왕좌의 게임 얘기를 했다가, 고향 얘기도 했다가, 요즘 무슨 일하는지도 얘기 하다가 하는데, 대화의 흐름이 너무 빠르고 말도 정말 빠르다. 어디에서든 처음은 쉽지 않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첫 점심시간이 끝났다.


오후에는 내내 이메일을 확인하고, 회사의 배려로 한국계 직원을 한명 소개받았다. 호주 교포인 그의 한국어는 꽤 유창해서, 출근한 이후 처음으로 마음껏 다양한 대화들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우연히도 내 관심분야 쪽 팀원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도 해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하루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집에 오는 길에 장을 보고,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빵과 치킨으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 부엌에서 만난 루마니아 출신 하우스메이트로부터 탈공산주의 이후 동유럽의 경제가 얼마나 안좋아졌는지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그는 매일 남편을 위해서 요리를 하는데, 오늘은 아무리 봐도 족히 10인분은 되어보이는 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믹스커피를 선물로 주었더니, 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주말에 꼭 먹어보겠다고 했다.


방에 돌아와 방과 머릿속을 모두 정리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Torts를 끝내야 한다. 11월말부터 1월까지 갑작스러운 신변의 변화들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2월이 되어서야 자리를 잡고 다시 시작된 공부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이 모든 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최대한 즐겁게 보낼 생각이다. 런던에서 회사를 다니고, 또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너무 감사한 일이다. 감사한 마음을 되새김질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적어도 이 순간을 다시 돌아보면서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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