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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일기 Feb 07. 2024

런던에서 첫 회식

안전귀가에 성공하다


런던에 와서 첫 회식(?)을 하는 날이다. 왠지 오늘이 겨우 출근 둘째날이라는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어제와 오늘 하루 하루가 너무 길었다. 아직 정식으로 일을 배당받고 바빠진 것도 아니고, onboarding을 하고 적응하는 과정일 뿐인데도 그렇게 느껴지는게 참 이상하다.


오늘은 점심을 혼자 먹었다. 혹시나 다른 이들이 어제처럼 같이 먹자고 하지는 않을까 살짝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다들 바쁜 모양인지 사무실에서 간단히 때우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느즈막히 까페에 가서 과일샐러드와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로비 구석에 앉아 점심을 해결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따로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샌드위치 등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낮 시간동안엔 최대한 일에 몰입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야근을 하더라도 보통 8시쯤 퇴근한다고.



담당 파트너와 면담을 하면서 3주 후에 미국으로 시험을 보러간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이렇게 "나 시험 보러 간다"라고 떠들고 다닐 정도로 준비된 상태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 휴가를 써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사실 이제 누가 뭘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건 내가 그렇게 하기로 정했고, 나는 정한대로 미국에 가서 시험을 볼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백을 뺀 나머지 면담은 너무 즐거웠다. 셰익스피어, 샬롯 브론테, 제인 오스틴, 연극, 오페라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다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여지껏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땐 항상 내가 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의식하면서 얘기했었는데, 내 관심사를 얘기하는 시간만큼은 영어의 장벽이 훨씬 낮아진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단순히 언어가 장벽이 되는게 아니라, 서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회사의 커피머신도 이용해 보았다. 회식때가 되어서야 안 사실인데, 여기 직원들은 정작 커피머신이 있는데도 밖에서 커피를 사먹는다고 했다. 공짜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밖에서 커피를 사서 마실까 싶다가, 잠시 생각해보니 한국에서도 탕비실에 있는 커피를 안마시고 밖에서 커피를 사마시곤 했던것이 떠올랐다. 이런 것도 만국공통이구나.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일대일 대화는 괜찮은데 여전히 여러 사람이 모여 하는 대화에 끼는건 참 쉽지 않다는걸 다시 한번 느꼈다. 특히나 이 사람들이 흥분해서 말이 빨라지고, 영국 혹은 호주 액센트가 좀 더 심해지면 그 대화를 쫓아가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좀 적응 되기를...


회식이 끝나고 어떻게 하면 집에 안전하게 갈 수 있을지를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런데 나를 담당하는 직원이 근처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대고 "너네 도시 위험해서 난 우버타고 갈거야"라는 말이 도저히 안나와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두명의 다른 직원들과 함께 지하철역까지 왔다. 여전히 대화에 끼는게 쉽지 않고, 집에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갈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머릿속도 복잡해서 그들의 대화를 듣기만 하면서 걸었다. 벌써 날은 너무 어둡고, 문을 연 상점도 거의 없고, 거리에 사람도 많지 않다.


나와 반대방향으로 가야 하는 그들과 헤어지고, Overground라인으로 왔다. 런던 지하철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열림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DLR로 갈아타려는데, 버튼을 눌러도 문이 바로 열리지 않아 잠깐 패닉 상태에 빠질 뻔했다. 다행히 문이 열렸고, 문이 열리자마자 튕겨져 나와 열심히 걸었다. 지하철역에 사람도 없어서 사방이 막힌 계단을 한참 걸어올라가는 동안 수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갈아타는 동네가 하필이면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하는 동네 중 하나다.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여기로 가면 DLR 타는거 맞지?"라고 거듭 묻고 물어 DLR 환승에 무사히 성공(?)했다.



지하철에도 사람이 거의 없다. 중심가에서 야근하고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만 듬성듬성 보인다. 드디어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다다르고, 마지막 관문인 역에서 집까지 3분 남짓 되는 짧은 길을 통과할 차례가 됐다.



비까지 내리니 뭔가 한층 더 음산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날씨다. 코트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덜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 최대한 성큼성큼 걸어서 집으로 왔다. 대문에 키를 꽂아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회식 후 안전귀가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영국의 삶에 조금 더 스며들수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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