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땐 비가 그칠 때까지 버틴다
회사에 다니다보면, 별탈 없이 평온한 시기가 있는가하면, 격한 풍랑을 만나는 시기가 있기도 하다. 요즘의 나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고군분투 중인데, 회사생활은 내 의지만으로 개선이 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아직까지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고 있다. 여름부터 내내 무언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보려 애쓰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버텨낼지"에 좀 더 집중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내 편이 아닐 때에는 뭔가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체득한 경험 때문이다.
지난 서른 한살은, 나에게 정말 잔인한 시기였다. 당시 나는 집안의 가장이었다. 집안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30년 넘게 나를 키워주시고, 내게는 부모님보다 더 가까운 존재였던 외할머니께서 한동안 편찮으시다가 돌아가셨으며, 엄마는 큰 수술을 앞두신데다 우울증이 겹쳐 힘든 상황이었다. 이보다 더 힘든 상황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힘든 가정사를 겪으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집을 나오게 되었고, 학업과 일을 무리하게 병행하다가 학업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애초에 학업을 유지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한 일이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주객이 전도된 것이었다. 무리하게 몸을 사용한 대가로 건강도 망가져 거의 2년 가까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병원을 드나들었다. 덤으로 당시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도 헤어졌다. 불과 1년 사이에 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 당시의 나는, 여기보다 더 바닥이 있을까 생각하면, 바닥을 뚫고 지하 저 밑까지 파고들어가는 중이었다.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번듯한 직장도 가지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가정을 꾸리고 안정을 찾아갈 무렵, 내 인생은 큰 시련들이 연속으로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내릴 때마다,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키려 발버둥을 쳤었다. 하지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신을 원망하며 울어보기도 했고, 내 자신을 탓하며 한없는 우울함에 빠져들어보기도,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에 공황증세를 겪기도 했다. 사다리의 한 계단을 겨우 올라섰다고 생각했던 무렵 나는 사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인생의 추락은 그렇게 겉잡을 수 없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들어닥친 격한 폭우로 인한 홍수는 내 턱밑까지 물에 잠기게 만들었고, 그렇게 꽤 오랜시간 숨을 헐떡이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날부터 조금씩 비가 그치고 햇볕도 들고 차오른 물도 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 때 배운 것은, 그 어떤 상황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이 슬프고 힘든 일도, 결국엔 다 지나간다. 참고 견디다보면, 그 힘들었던 일들을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정말 온다. 정말 안올 것 같은데, 이대로 세상이 끝나버릴 것만 같고, 죽을 것만 같은데, 거기서 조금만 버티면, 그 끝은 반드시 돌아온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후에야,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씩 생각해나갈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으니 내 인생은 끝이 날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때부터 새롭게 삶을 시작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그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 전에는 감사한 줄 몰랐던 일들이, 감사하다는 것을 알게됐고, 건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되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고, 특히 사람의 마음이나 말만큼 변하기 쉬운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사람의 인생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토록 힘든 시간이 지나고, 나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몰랐으면 좋았을 세상의 이치들을 알게된다는 면에서 조금 슬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가면서 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삶은 항상 평온하지도, 항상 괴롭고 힘들지도 않다. 적어도 나의 삶은 그랬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든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겪게 되는 여러가지 힘든 일들이,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나를 주저앉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비가 올 땐,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일단 버티는 것이다. 비는 결코 영원히 멈추지 않고 내리지 않는다. 비가 멈출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리고, 비가 그쳤을 땐,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다만, 비를 맞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대비는 늘 해둬야 한다는 생각이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그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가 종종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상사에게 지적을 받는 날도 있고, 사람들에게 치이는 날도 있고, 또 가끔은 이상한 사람들과 엮여서 오랫동안 고생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무조건 참기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만,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면, 상황이 바뀌고 개선될 여지가 있는지를 한 발 물러나 냉정하게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라면 조금 더 버텨보는게 스스로에게 득이 될지도 모른다(물론 회사의 인적구성이나 구조가 애초에 답이 안나오는 케이스라면 뒤돌아볼 것 없이 퇴사가 답이겠지만). 그리고 그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시간에 끌려가지만 말고, 내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좋은 시기가 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훈아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가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