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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일기 Nov 21. 2022

주제파악이고 뭐고 일단 하자

"나 자신"이라는 엄청난 산을 넘어보자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바빴던 탓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글을 발행하는게 한동안 망설여졌다. 머릿속엔 하루에도 몇번씩 글로 옮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떠오르곤 하는데, 그것들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풀어낼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메모장에 적어놓은 아이디어만 쌓일대로 쌓였다. 솔직히 작가서랍 속에 써두고 발행하지 못한 글들도 꽤 많이 쌓여있다. 막상 글로 옮겨쓰고도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엔 발행을 포기한채 저장만 해둔채 몇개월을 보냈다. 솔직히 누가 나한테 완벽한 글쓰기를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책을 엮어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부담을 느끼고 난리인지 나도 내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글쓰기 뿐 아니다. 2주 전 팀장님이 업무 개선안을 생각해보고 보고서를 써오라고 지시했는데, 나는 개요를 작성한 이후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똑같은 위치에서 제자리걸음 중이다. 역시 잘 써야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팀장님 앞에 멋진 보고서를 내놓고 싶은데 도저히 그렇게 쓸 엄두가 안나니 진행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팀장님이 정한 보고서 기한은 이번달 말일까지이지만, 저번주까지 쓰겠다고 했던 스스로의 약속은 이번주에도 미뤄지는 중이다. 요즘 회의도 많고, 늘 있는 잡다한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업무시간에 집중해서 보고서를 쓴다는게 쉽지 않긴 하다. 하지만 나에게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핑계다. 덕분에 나는 2주동안 내내 이 보고서 내용을 잘 때도, 샤워할 때도, 아침에 출근할 때도, 퇴근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벗어나려면 보고서를 완성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이 무한루프 속에서 고통스러워만 하는 중이다. 


이번달 말에 있는 발표 준비도 이제 꽤 진행됐어야 하는 것인데, 9월초에 배정받은 과제를 아직까지 손도 안댄채 해야지, 해야지 하는 말만 되새김질 중이다. 지난 달에 써야 했던 논문은 이번달의 과제로 다시 돌아왔다.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내 발을 꽁꽁 묶어둔 것 같이 꼼짝도 못하고 얼어버린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부채감만 쌓인채, 나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런 내 자신이 싫어 또 한참은 자기혐오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자꾸만 실행의 문턱 앞에서 스스로 좌절하고 마는 내 자신에 대해 분석하고, 반성하고, 또 야심찬 계획들을 적고, 그리고 또다시 그 문턱에서 무너지는게 일종의 패턴이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나는 이런 내가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내 자신이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되다니. 게다가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내가 완벽주의자라니!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해 너무나도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완벽주의자일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완벽주의자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에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완벽"이라는 상태를 추구하는 경향성 때문에 스스로를 지독하게 괴롭히다가 지나치게 높은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것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가당치도 않을 완벽하고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를 원했던 만큼, 시작하기도 전에 그 높은 벽에 부딪혀 지치고 실망하고 좌절한다. 오랫동안 그 높은 벽을 넘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지만, 동시에 도저히 넘을 수 없을것만 같아서 너무 괴로웠다. 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내 자신이 실패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때문에 나는 도무지 행복해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Brianna Wiest의 "The Mountain is You"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가 왜 성공에 이르지 못하고 매번 좌절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매우 단순하고 쉬운 말로 풀어낸 놀라운 책이다. (외국 독서채널 유튜버들이 추천하는 것을 보고 접하게 된 책인데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The Mountain is You"라는 책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이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염원해온 바를 이루는 것을 방해한 것은 내 주변의 상황이나 장애물,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는 것을. 말로는 간절히 원한다고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안될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고, 내가 원하는 바가 실현가능하다고 진정으로 믿지도 못했다. 세상이 나를 믿어주지 않고 무시한다고 원망하곤 했지만, 사실 내 자신을 가장 의심하고 작은 존재로 여겼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채 나는 내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대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조금씩 "나 자신"이라는 산을 넘어보기로 했다. 아직까지 넘어보지 못한 산이라,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른다. 팀장님이 내 보고서를 싫어할 수도 있고, 브런치에 쓴 내 글이 너무 형편없고 재미 없어서 아무도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학술지에서 내 논문을 심사한 결과 도저히 게재할 수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애초에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것도,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는것도, 모두 의미없는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안하느니만 못한, 그시간에 차라리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며 쉬는게 더 나을만한 결과만 돌아올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 산은 영원히 오르지 못할 산으로만 남게 된다. 그러니 일단 산 밑에서 삽질이라도 조금씩 시작해보려 한다. 주제파악 따윈 더이상 필요없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내 길을 갈뿐이다. 


Beenzino - Break [MV]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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