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진행중인 열병같은 마흔의 사춘기
얼마 전, 연락이 끊겼던 대학 동기와 연락이 닿았다. 일을 하다가 우연히 그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반가운 마음에 친구의 연락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만났을 땐 네다섯살 아기와 함께한 모습이었는데, 벌써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고, 이후로 유치원생 둘째도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참 외롭고 힘든 과정을 겪었다면서 일찍 결혼 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지만, 그동안 참 열심히 삶을 일궈온것이 느껴져 보기 좋았다. 대학 4년 내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공부했고, 동기 중 제일 먼저 취업을 하고, 또 부지런히 제일 먼저 결혼도 했던 친구. 그런 친구의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는 얘길 들으니 새삼 내가 참 많이 늦었구나, 라는게 체감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에게 지난 10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삼십대 초반, 지옥같은 시간들을 버텨내면서 "이십대보다 나은 삼십대를 보내서 행복한 마흔을 맞겠노라"고 다짐했던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나는 마흔, 불혹이란 나이를 맞는다. 그리고 그때 다짐했던 "행복"은 여전히 저 멀리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평범한 삶"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뒤돌아보니, 난 참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겨우겨우 여기까지 왔다. 나는 대학에 진학한 이후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꿔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가난과 불행의 굴레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열등감을 동력으로 도저히 안되는 형편에 바득바득 우겨 공부를 했다. 할 수 있는거라곤 공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계획했던대로라면 그래도 그 전과는 다른 삶으로 진입했어야 했는데, 나는 아직 그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몸과 마음이 모두 그 압박을 차마 견뎌내지 못했고, 그 결과 나는 오히려 저 지하 밑으로 추락해버렸다.
지나고보니, 주어진 인생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쉽게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 인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당시의 나는 너무 어리석고 교만해서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어설픈 노력, 어리석고 덜 자란 생각들로 일련의 시련들에 대응하다 보니 고르는 것마다 오답 투성이였다. 실패, 실패, 실패, 그리고 또 실패.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계속 실패만 하다보니 세상을 살고 싶은 의욕 자체가 싹 사라져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다. 이미 일어난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몸과 마음을 다시 다잡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다시 나의 궤도로 돌아와 길을 걷고 있다. 아직도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고, 나는 그 누구의 길도 아닌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
한동안 나는 결혼을 왜 하지 않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다. 특히 교수님이나 직장상사로부터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더더욱 마음이 힘들었다. 소위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나고도 결혼하지 않은 내가, 뭔가 문제 내지는 하자가 있는 사람처럼 비춰지는 느낌이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교수님도, 상사분도 모두 조금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런 얘길 꺼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힘들었던건, 나도 내가 결혼을 미루고 싶어서 미뤘던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언제하냐는 질문과 세트처럼 함께 따라다니는 질문이, 혹시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있냐는 질문인데 이 질문이 늘 어김없이 등장하는 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늦게까지 결혼을 안하고 있을 수가 있어?"라는 생각이 깔려있어서인 것 같다. 이 질문 역시 불임에 대한 나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건드리다 보니, 나는 사람들이 이런 얘길 할 때마다 번번히 더 큰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 인생 시계가 늦어진 탓에 나중에 후회를 남기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두렵다.
맞다. 많이도 늦은 인생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진짜 늦은 때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열등생이라고 해서 그저 포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느린 걸음이라도, 남들보다 너무 많이 뒤쳐져서 이젠 앞서가는 남들의 뒷모습조차도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래도 나는 나의 길을 멈출 수는 없다. 어차피 나보다 한참 앞서있는 그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도 무의미한 일이다. 솔직히 늦었다는 생각에 자주 조급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길을, 내 방식대로, 내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 놓인 길만 바라보며 걷고 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이것 뿐이고, 내 최선과 사력을 다 할 수 있는 것도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