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눕피 Oct 17. 2018

나를 여기 두고 모질게 떠나려는 '20대'를 돌아보며

안타까운 시절, 하지만 나름 열심이었다.

  2009년, 나는 4년제 대학의 신입생이었다. 하지만 캠퍼스의 낭만을 잘 즐기지 못했다. 시대 탓은 아니었다. 그저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아무 데나 껴서 쉽게 떠들지 못했고, 시끄러우니 날 좀 내버려 두라고 소리치지도 못했다. 목표와 목적이 없는 삶이 이렇게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마 스무 살의 5월이었다.
동시에 지적인 허영에 빠져 에리히 프롬, 롤랑 바르트, 홍세화, 리영희 등의 책을 탐독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부지런히 읽었다. 피츠제럴드를 읽고 카뮈를 읽고 샐린저를 읽고 이문열을 읽고 김훈을 읽고 신경숙을 읽었다. 좋은 문장에 놀라던 기억들이 선명하다. 도대체 어떤 책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던 건지를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니, 기억이 없다. 아무튼 목표와 목적이 없이 행동하는 일에는 참 열심인 인물이었다.
  수선스러운 캠퍼스는 예뻤다. 말들이 많았고 모든 것이 건강해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대학생의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수업이 파한 12시부터 오로지 동기들과 ‘함께’ 술을 먹기 위하여 7시간을 기다렸다. 사투를 벌인 끝에 먹는 술은 달았지만 씁쓸했다. 쓸모없는 말들이 오고 갔다. 자꾸만 막차 시간을 확인하느라 놓쳐버린 그 날의 대화들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매일 꾸미고 다녔다. 옷을 자주 샀다. 대부분의 경우 평범하거나 지루한 스타일을 지향했었는데. 미국 배우 ‘Adam Brody’의 영향이 컸다. 당시 내 휴대전화에는 온통 그의 사진뿐이었다. The O.C라는 미국 드라마 속 그의 캐릭터를 닮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는 법부터 옷 입는 법까지도 따라 하려 했으니 한심함 그 자체였다. 하루는 나보다 5살 많던 남자 선배 하나가 ‘너 애덤 브로디 따라 하냐?’라고 내게 물어봐 주었는데, 그날 밤 나는 시원하게 맥주를 몇 캔 마셨다. 아! 자축한 것이다.

  나는 광고를 전공했다. 솔직히 말해 내게 남은 것은 많지 않다. 교수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워낙 휘발성이 강한 학문임을 알았기에 애초에 인생에서의 멋진 쓰임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지하철 안에서 광고 천재 데이비드 오길비의 책을 드러내며 읽는 순간에만 나는 부끄럽게도 전공을 사랑하는 학생이었다.

  대학생의 꼬리표를 달고 몇 년이 지났을까. 나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모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가려는 나와 문득 마주한 순간이 있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또 어느 책에서 대충 이런 구절을 읽고 무척이나 공감하던 따분한 날도 있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는 나쁜 날씨가 이어질 때가 아니라 구름 한 점 없는 날들이 계속될 때이다.'


그렇게 쓸데없이 심각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건수를 찾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던 당시의 내 옆에는 지긋지긋한 놈, 광고가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것은 마침 잘된 일이었고, 그렇게 나는 나중에 광고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그에 따른 막연한 계획을 수립했었는데, 막연함이 주는 특유의 안전함에 보호되어 계획은 오래도록 실제 집행되었다. 세상 모든 일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지만, 한 사람에게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인과의 틀에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오만이고 보면, 나는 나름 혼란의 시기에 내 옆에 있던 광고를 우연히 붙들었던 것이고 그렇게 광고는 내 미래를 감사하게 저당 잡아주었다. 따라서, 무엇이든 읽고 닥치는 대로 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기를 자연스럽게 희망하게 됐다. 마치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말이다. 내가 쓴 카피 몇 줄이 TV나 라디오, 신문, 유튜브 따위에서 뜨겁게 흘러나오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카피라이터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광고 바보’라는 말이 있다. 광고를 전공하고, TV를 볼 때도 광고만 골라 보고, 광고 관련 아르바이트와 인턴십만을 챙겨서 하는 그야말로 광고에 미친 바보 같은 학생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나는 ‘광고 바보’였다.

중등학교와 대학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일은 혼자서 조용히 문학책을 읽거나 특정 장르의 음악을 미친 듯이 파고들어 감상하거나 산문을 쓰며 혼자 만족하는 일 등이었다. 그것들을 제외한 다른 일들은 내 인생에 있어 부차적이었다. 그것들 덕에 나는 인생이 조금도 따분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할 겨를이 없었다고나 할까. 읽고 쓰는 것이 나의 습관화된 일상의 영역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을 때, 나는 ‘직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 나이 스물셋이었다. 내게 직업 선택의 고려 사항은 꽤 분명했다. ‘글’과 어울리며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일, 언젠가 꽤 짭짤한 ‘돈’을 만질 가능성이 있는 일, 감각적이며 세련된 겉멋이 존재하는 일. 나는 별 고민 없이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대학 전공까지 살릴 수가 있다니! 축복이어라!

나는 업계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외국계 광고대행사에서 교육을 받고, 인하우스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을 했다. 그때 나는 내가 대단한 광고인이라도 된 양 들떠 있었다. ‘광고’와 ‘일’을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마음은 젖혀 두고, 억대 연봉을 받는 유명 광고인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 연예인 이야기, 내가 만든 양 자신 있게 소개하던 회사의 대표작, 가고자 하는 직업의 길을 뚜렷하게 정했다는 사실이 내게 주던 불완전한 안전함 따위에 정신이 팔렸었다.

그러던 내게도 대학교의 4학년 2학기는 빠짐없이 찾아 왔고, 나는 ‘취업은 현실이다.’라는 대한민국 전설의 아포리즘을 절절히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취업은 현실이었다. 나는 환상과 상상 속에서만 광고인을 꿈꾸었다. '왜 광고업이어야만 하는가, 왜 카피라이터여야만 하는가, 왜 우리 회사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미루고 무시한 결과는 '불합격'이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읽고 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 광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 광고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는 이유, 광고 회사에서 교육받았다는 이유, 유명 광고인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이유, 자기소개서 작성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따위로는 면접관의 마음을 훔칠 수가 없었다.


"왜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고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중요한 게 지금 계속 안 나와요."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해야죠."


대학교의 마지막 학기를 포함해 1년 넘게 나는 꾸준히 가물에 콩 나듯 올라오는 신입 카피라이터 채용 공고에 자기소개서와 면접으로 대응했다. 광고 회사를 제외한 다른 분야의 채용 공고는 클릭도 하지 않았다. 그땐 그것이 멋이고, 간지고, 가오고, 일편단심이고, 성실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스물여덟의 끝자락, 나는 광고가 아닌 다른 분야로 느닷없이 돌진하였다. 밥벌이에 대한 조바심 탓이었다. 절박한 나는 면접관들을 향해 광고가 싫어졌다며 주접을 떨었다.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실실대며 절박한 나의 생-show를 받아주었다. 조금 특이한 놈이긴 한데, 뭐, 잘할 수 있을 거라며 내게 위로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부터 튕겨 나왔다. 10개월의 시간이었다. 나는 세상을 만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제발 만만한 곳이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2018년 10월 11일, 퇴직서를 작성하고 때아닌 찬 바람을 맞으며 헛헛함을 가득 안고 집에 돌아와 때마침 켠 유튜브 속에서 한 심리학과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인생을 장난처럼 살지 말라. 서른을 눈앞에 둔 나를 아프게 자극하는 그 말, 인생을 장난처럼 살지 말라.


  내가 뭐 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내가 뭐 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내가 뭐 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언젠가 듣고 곱씹던 인생 대선배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어떻게든 네 인생을 사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는 고향을 더 좋아하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