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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Jun 09. 2019

자알 즐겼다면 겨얼코 낭비가 아니니까.

제가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 모은 책이나 음반이 정리된 책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것들로부터 얻은 가치의 합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경우에는 계통에 따라 분류해 책장에 꽂아 넣었는데, 책꽂이에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고마운 작가들을 머릿속에 나란히 두고 생각해보면 일정한 연관성이랄까, 특정한 흐름이랄까, 하는 것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비슷한 것들로부터 계속 이끌리게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에 걸쳐 형성되는 취향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 향방을 확실하게 결정한다고 생각하는데, (넓은 스펙트럼의 취향을 지닌 균형적인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 시기에 무엇이든 골고루 받아들여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중학교 1학년생이던 2003년, 나는 미국의 힙합 음악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드렁큰 타이거나 CB MASS, 에미넴, 아웃캐스트 등의 힙합 음악을 어설프게 즐겼던 기억은 있지만, 힙합이라는 문화에 흠뻑 빠져들어 그것을 내 삶의 가장 큰 사건으로 규정하고 깊이 공부하며 즐기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의 중반을 넘어서였던 2003년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아이보리 색감의 둥그런 본체에 연보라색 테두리를 두른 디자인의 SONY CD 플레이어를 통해 대부분의 음악을 들었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침대에 누워 문을 닫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고 CD 플레이어와 연결된 기다란 컨트롤러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CD가 빠르게 돌아가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앨범의 인트로 뮤직이 흘러나오면 나는 정신줄을 바로 놓아 버렸다. 마치 영화나 만화 속에서 미지의 우주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신비한 순간처럼 짜릿한 기분으로. 그땐 미국 힙합 앨범 몇 장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고, 10여 년 전의 뉴욕 할렘가와 LA 롱비치의 한 복판에 서 있는듯한 기분을 느끼며 시공간을 마음대로 파괴하곤 했었다.


2003년만 해도 레코드샵이 꽤 존재했었다. 지금은 교보문고와 붙어있는 핫트랙스나 알라딘 중고 음반 매장을 제외하고는 음원 애플리케이션의 위세에 짓눌려 대다수의 레코드샵이 궤멸했지만 말이다.

당시 나는 집에서 가까운 인천 신세계 백화점의 '신나라 레코드'를 그야말로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레코드샵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곳에는 달콤한 소리가 있었고, 음악을 소중하게 즐기는 이들의 뜨거운 마음이 있었으며, 즐거움의 풍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해외 힙합 코너 앞에서 입을 헤벌리던 학생이었다. 야동에 붙은 빨간딱지보다는 힙합 CD에 붙은 빨간딱지가 나는 더 좋았다. 값이 꽤 나가는 외국판 힙합 앨범을 매번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그곳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는 앨범 커버와 제목을 기억해놓고 집으로 돌아가 인터넷을 통해 해당 앨범을 찾아 즐기곤 했었다. 그러한 행위는 당시 내게 일종의 재미있는 학습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활용해 앨범에 대한 배경 설명을 정독하고, 가수의 프로필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영어로 된 트랙리스트를 해석해보고, 노래 한 곡 한 곡의 가사를 나름으로 번역해보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친절하게 번역된 가사를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지루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어떤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무심코 던졌을지도 모를 몇 마디가 때로 일반인의 한 순간을 뜨겁게 휘어 감는다. 존 레넌과 버트런드 러셀이 그랬단다.


Time you enjoy wasting, was not wasted.


무언가에 쫓기듯 책과 음악을 늘 곁에 두고 20대를 버텨왔다. 약아빠지질 못해서, 나의 정신과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 그저 너무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고 즐기며 대책 없이 병신처럼 살았다. 객관적으로 쓸 데 하나 없는 것들을 주관적으로 아주 열심히 즐기고 학습했던 것이다.

언젠가 나의 이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역사와 쓸데없이 싸질러 놓은 몇 마디의 글과 말들이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힘이라도 되길 바라는 진심이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유일한 이유이자 브런치를 계속 이어나갈 확실한 명분이다. 설령 단 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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