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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Aug 18. 2019

계기만 있다면 누구나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계기가 있고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쓴다.

    고등학교 2학년 , OO대학교에서 전국 고교생 논술대회가 열렸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그날의 어떤 인상적인 장면들은 여전히 강렬한 모양새로 나의 마음속에 무늬 박혀있다. 첫째, 주말 하루를 반납하고 막연히 대학 입학에 도움될 거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 가짐(상장이나 하나 건지자!)으로  커다란 강당 하나를 가득 채운 전국 각지 성실 우등생들의 수많은 뒤통수, 그리고 그들을 둘러보며 절로 터져 나왔던 '(허걱!)' 소리의 기억, 둘째, ‘환경오염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라는 막연하기 짝이 없는 열린 질문 공격에 적잖이 당황스럽고 막막했던  심경의 기억, 셋째, 당시 허영심을 가지고 읽었던 여러 세계 문학  어떤 문장들을 마치  생각인  자연스럽게 인용하며 어떻게든 환경오염과 그것들을 연결시키려 발악하던 나의 사기꾼 기질에  자신도 깜짝 놀랐던 기억 등이 대표적이다. 이상하게 어떤 기억들은 도통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데, 무려 12 전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해도 되는 것인지 머리가 도대체 어떻게  걸까 싶다.



아무튼 그날 나는 유명 작가들의 문장과 생각을 등에 업고 환경오염과는 별 연관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일필휘지로 죽 늘어놓으며 급히 답안 작성을 완료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수일이 지나서 나는 우리 학교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은상'을 타게 되었고 학년 부장 선생님 옆으로 멋지게 불려 가게 되었다.



“나는 네가 글깨나 쓰는 줄 몰랐는데? 어이, 대단한데?”


그날 나는 누군가의 낮은 기대치를 뒤엎는 쾌감은 인생을 살며 맛볼 수 있는 느낌 중 꽤 짜릿한 거란 걸 깨달음과 동시에 다른 건 몰라도 ‘글’을 열심히 붙들면 나중에 커서 무엇이든 되지 않겠느냐는 미래에 대한 대책 없는 위탁 정신을 몸과 마음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어떤 작가의 말마따나 과거란 것이 돌아본다고 다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제 와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니 학창 시절의 '상'과 '벌'이란 것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낀다. 학창 시절의 상과 벌은 그것의 실제적 가치와 효용과는 무관하게 나와 친구들을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게도 했고, 때로 주춤하고 주눅 들게도 했다. 생각해보건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지긋지긋한 말씀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이다.


    시간이 흘러 군에 입대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파워포인트’와 ‘아래아 한글’로 영관 장교를 위한 보고 자료를 작성하는 ‘행정병’이 되었다. 어느 정도 ‘짬’이란 것이 차고 내게 시간이 그야말로 남아서 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업무 중 몰래 ‘소설책’을 펴놓고 ‘아래아 한글’에 그대로 옮겨 적으며 도저히 안 가는 시간을 버티어내는 이상한 버릇을 들였는데, 어느 날인가 ‘미국’에서 좀 배우고 왔다는 장교 하나가 내게 다가와서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네가 이런 책도 읽을 줄 알아? 무슨 말인지는 알고 읽어? 뭘 쓰는 거야? 한번 봐봐.”

남자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군 생활이란 것이 그렇다, 그땐 별 것 아닌 일에도 욱하고 누군가 스쳐가듯 던지는 작은 이야기에도 쉽게 상처 받는다. 군대는 겉으로는 꽤 터프하고 팍팍한 곳처럼 비치지만 실상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속은 생각보다 물렁물렁하고 여리다. 각자의 이름과 계급은 분명 존재하나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잠을 자다 보면 한 개인의 존재감이란 것이 ‘익명성’ 속에 파묻혀버리게 되고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한없이 약해진다. 그래서 군대 훈련소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곳이란 말은 꽤 통찰력 있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의 개성을 잃어버리면 ‘바보’가 되는 법이니까.


나는 그 장교의 모욕적 언사에 최대한 점잖게(점잖은 척) 대응했던 걸로 기억하는데(그런데 상사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내 옆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서 뜬금없이 '새벽 독서'의 장점과 그가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펼치는 그의 어설픈 독후감 발표를 통해 나는 그가 책을 정성 들여 읽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빈곤한 독서 철학을 본인이 알고 있는 책 제목과 저자의 이름을 열심히 나열함으로써 메꾸어보려는 빤히 속이 보이는 유치한 시도를 할 때에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입으로만 떠드는 건 정말 위험한 것이로구나. 진정한 고수들은 대개 과묵하고 침묵한다는 것의 의미, 즉 무언가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과묵하게 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란 걸 직접 경험을 통해 실감한 것이다. 그가 내 앞에서 늘어놓은 이야기의 절반은 진부했고, 그나마 나머지 반도 틀린 이야기 투성이었다.


'글'이란 말과 다르게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릴 여지가 적다. 그것은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이유의 하나이기도 했다. 설령 감정에 이끌려 글을 풀어나가다가도 글쓰기라는 행위 속에는 적어도 수정의 여지, 재고의 여지란 것이 있기에 글쓰기는 늘 부족하고 모자란 나의 생각을 조금 더 가다듬을 수 있는 열린 기회처럼 여겨졌고, '글'이란 결국 더 괜찮은 모습의 나, 겸손한 모습의 나로서 나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수단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말이나 글이나 '낙장불입'의 세계이긴 매한가지이지만, 적어도 말과 글을 일대일로 비교하면 그렇다는 말인 거다.

어쨌든 나는 그날 이후로 뚫린 입이라고 '말'로 함부로 쉽게 지껄이기보다는 '글'로 나를 정성스럽게 표현하는 일에 내 인생의 에너지를 더 보태기로 결정했다. 있는 그대로 급하게 터져 나오는 '말'이 대변하는 내 모습은 늘 어지간하지를 못해서 늘 나와 주변을 실망시키곤 한다. 뭐, 딱히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지만... 그나저나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가 당시 필사하던 책은 아마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던 것 같다. 소설책을 두고 이런 책도 읽을 줄 아느냐며 빈정대던 그 중위의 속마음을 나는 여전히 이해할 길이 없다.


 



글쓰기란 것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쉽게 즐길 수 있는 활동은 아닌 걸로 보인다. 친구 A는 내게 글쓰기가 '그냥' 짜증 나서 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고, 친구 B는 레퍼런스가 부족해서 글쓰기를 계속 끌고 갈 힘이 없다고도 말했다. 누나 A는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왠지 모르게 '그냥' 싫다고 말했고, 친구 C는 공대 졸업한 공돌이가 무슨 글쓰기냐고 '그냥' 됐다고 말했다. '글쓰기'가 '그냥' 싫다는 그들을 향한 나의 주제넘은 참견은 솔직히 이거 하나다. "아직 확실한 계기가 찾아오지 않은 것뿐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 그땐 쓰고 싶지 않아도 쓰게 될 걸?"



글을 쓴다는 사실 속에는 내게 부족해지기 시작하는 개인적 확신의 증거가 담겨있다.


-알베르 카뮈-


카뮈가 한 말이다. 개인적 확신의 부족을 확인하고 그것을 스스로 설명하거나 변명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글을 쓴다는 말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어디선가 '퇴사'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브런치이고, 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직장인들은 '퇴사'와 함께 브런치를 '시작'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나 또한 작년 10월에 전 직장을 퇴사하며 브런치를 시작했다. 수십 년 전의 카뮈는 일찌감치 수십 년 후의 내 상황과 감정을 단 한 줄로 완벽하게 정리한 셈이었다.

무언가를 쓴다는 건 결국 무언가를 남긴다는 일이다.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남기 마련인 무언가를 쓴다는 건 개인적인 고민과 생각의 흔적을 자기 몸 밖에 던져놓는 일이고, 그것은 떠밀리듯이 어쩔 도리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의 모욕적인 언사로부터 자극 받든 칭찬의 말을 가장한 빈말로부터 힘을 얻든, 불현듯 밀려드는 인생에 대한 고민에 괴로워하다가 깨닫게 되든, 우연히 읽은 책 한 구절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얼얼함을 느끼든 '쓰기'를 강요하는 몸과 마음의 명령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뭔가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글을 썼다.


-조지 버나드 쇼의 전기 <지성의 연대기> 중에서-


며칠 전 영국의 전기 작가 헤스케드 피어슨이 쓴 버나드 쇼의 전기를 부분 부분 다시 읽다가 글쓰기를 지속해나가는 것의 의미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 문장과 만났다. 버나드 쇼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한 문장이지만, 나는 해당 문장으로부터 사람들이 계속 글을 써 나가는 일의 단순한 동력을 알게 되었다. '뭔가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없을 때', 그럴 때에 사람들은 연필을 잡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글을 쓰는 것이다.




계기가 있어야 사람이 바뀐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말이라서 언젠가 소설가 김훈이 말한 대로 당연한 말을 또 한 번 반복하는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말씀들을 토대로 생각해보건대 단 한 번의 결정적 계기만 주어진다면, '글쓰기'란 자기의 생각을 덜어내거나 더해내는 쉽게 저항할 수 없는 자기표현의 몸짓과도 같아서 이런 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봇물 터지듯' 주체할 수 없이 이루어지며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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