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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Nov 08. 2019

어르신들의 패션 센스에 감탄할 준비되셨습니까?

인스타그램 계정 'Gramparents'를 보고 제가 느낀 게 많아요.



짬을 무시하면 안 되는 거라!
흐흐.

-세기말 래퍼 원썬-



의식하고 애쓰면 잔뜩 힘이 들어가서 자연스러운 멋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패션이든 글쓰기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별 다른 생각 없이 편한 마음으로 오로지 '실용'과 '자기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멋은 '꾸밈 과잉'의 태도로 점철된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게 분명하다.


인스타그램 계정 'gramparents'는 각국으로부터 수집한 멋쟁이 노인들의 패션을 구경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미지 보관소다.

머리 위로 무심하게 올라앉은 버킷햇과 캡, 안정감 넘치게 두 발을 감싸고 있는 뉴발란스 슈즈, 빈티지한 색감과 함께 무슨 일이든 거뜬히 해낼 태세로 무장한 치노 팬츠와 블루진은 'gramparents'의 포스팅을 빛내는 단골손님이다.


(출처: gramparents)
(출처: gramparents)
(출처: gramparents)
(출처: gramparents)


'gramparents' 계정의 운영자는 뉴욕 브루클린 베이스의 의류 브랜드 Adsum의 브랜드 매니저 Kyle Kivijarvi. 그는 시애틀의 retirement home(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실버타운)에서 여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구가 된 어르신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걸 깨달았단다. 그것은 곧 오직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르신들의 '자기 취향에 대한 이해'와 '정직성'이었고, 그것은 달리 말해 '유행'이 아닌 '개인의 스타일'에 집중하는 어르신들의 '경향성'이었다.



Adsum X Gramparents 웹사이트 소개글 "Respect your elders", 이윽고 숙연해진다.





계정 운영자 Kyle Kivijarvi가 브랜드 매니저로 활약하고 있는 Adsum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gramparents 계정의 소개글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꽤나 울림이 있다.


누구에게나 속도를 늦추어야 하는 시기는 찾아오는 법이다.

그때가 되면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보게 되고,

항상 제 자리에 있던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스눕피 의역-


개인적으로 철학이 깃든 감각-팔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힘을 갖는다는 평소의 지론이 있는데, 일개 인스타그램 계정을 하나 운영하면서도 이런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 감동적인 일이다.



(출처: gramparents)


(출처: gramparents)


영화 Crazy Stupid Love의 한 장면, Gramparents 계정 운영자가 싫어하는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출처: Pinterest)


당신이 스티브 잡스요?

아니.

그럼 혹시 억만장자 애플 컴퓨터 대표요?

아니라니까.

오, 그럼 뉴발란스 스니커즈 신을 일은 평생 없겠네요.

-영화 Crazy Stupid Love 중에서-




(출처: gramparents)


AAA 무지티셔츠에 Gramparents 로고를 박아 35달러에 판매하는군요. 이 시대 브랜딩의 시작은 인스타그램 계정으로부터! (출처: gramparents.co)



자, 이제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려보죠. 올해 5월 W 코리아의 프리랜스 에디터 김선영 선생님이 'gramparents' 계정을 소개하는 짧은 기사(할아버지 패션?)를 열며 첫머리에 오늘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건(?) 하나를 짚고 넘어가셨더군요(센세). 불가리아 태생의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프가 작년 한국에 방문했을 때, 동묘 거리에서 만난 대한민국 어르신들의 미친 패션 센스를 폰 카메라에 담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줄줄이 포스팅했던 사건이요.




(출처: kiko kostadinov's instagram)
(출처: kiko kostadinov's instagram)
(출처: kiko kostadinov's instagram)


함부로 흉내 낼 수도, 쉽게 따라 할 수도 없는 대한민국 생활인의 실용 패션, 사실 우리 주위에 차고 넘칩니다. 인천에 살며 서울을 자주 오가는 제가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하는 퀴퀴한 '1호선' 지하철에서는 오늘도 패션 선각자 어르신들의 '서브웨이 런웨이'가 부지런히 펼쳐지고 있죠.


그럼요, 청바지에 흰 티는 이렇게 입는 거죠. (출처: 불분명)


대학 시절, 3월의 첫째 주, 9월의 첫째 주, 이렇게 두 차례씩 펼쳐지는 '개강 런웨이'는 구경하는 재미가 너무나 쏠쏠하여 '결석'보다는 '출석'을 부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막 군에서 제대하여 복학했던 시기를 예로 들면 남학생들의 신발은 '천하-통일'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같이 '쏘로굿'이라는 브랜드의 워커를 신고 있었거든요. 그 살벌했던 풍경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저는 서울의 대학가를 전시 상황 혹은 거국적 막노동의 현장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와 새삼 주위를 돌아보니 대한민국 어르신들의 패션은 개별적으로 휘황하며 개인적으로 고집 있는 '고유의 것'들로 넘쳐흐르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발견'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늘 그 자리에서 자기 개성이라는 몫만큼의 빛을 연신 발하며 패션 스타일링을 운용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감히 경시했을 뿐이죠.


오늘의 글을 열며 몇 년전 인터넷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meme을 양산한 쇼미더머니 출연 1세대 래퍼 '원썬'의 명대사를 인용했습니다. 인생은 역시 수미상관입니다. 원썬의 또 다른 명대사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짬에서 나오는 그 봐이브가 있을 거예요.
크흐흐흐.

-세기말 래퍼 원썬-

    


여러분 오늘부터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십시오. 짬에서 나오는 봐이브로 고유의 멋을 뽐내는 대한민국 어르신들의 패션 스타일에 주목해보세요. 여러분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꾸안꾸'의 간지 또는 전위적 예술성의 경지를 그들로부터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일단 저부터 1호선 노약자석으로 급히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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