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눕피 Nov 20. 2023

제길슨! 1년도 다 갔어요.

마틴 마르지엘라, 추억 보부상 그리고 무도 중독



마르지엘라: 침묵이 금


패션 커리어를 시작한 83년 이래로 침묵 속에 일관한 개척정신으로 현대 패션의 황금 같은 바이블을 무의식적으로 제작해 버린 패션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는 2008년에 공식 은퇴했다.


데뷔 이후 좀체 얼굴을 보여주지도, 인터뷰에 응하지도 않던 신비주의의 아이콘과도 같던 그가 2018년, 벨기에 패션 어워즈의 수상을 기뻐하며 Dazed 데이즈드를 통해 소감을 전했다.


길고 긴 침묵을 깬 것이다.




그는 편지에서 은퇴 당년이었던 2008년, 너무 커져버린 브랜드 수요와 전 세계적 압박을 본인이 더는 당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으며, 소셜미디어가 실어 나른 과다 정보가 '기다림의 설렘'을 박살내고, 서프라이즈적 요소의 전면을 무효화하는 바람에 그것들(기다림의 미학과 뜻밖의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인 자신을 후회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마르지엘라는 낡고 버려지고 외면받은, 시장 가치를 상실한 것들의 역사를 긍정하고 그것들을 엮어 올려 새 생명을 부여한 디자이너다.


오래된 군용 양말 더미로 만든 스웨터, 빈티지 샌들로 만든 재킷, 인조 가발로 만든 코트, 깨진 그릇으로 만든 조끼, 비닐봉지로 만든 티셔츠와 같은 놀라운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은 남자.





그리고 버려진 놀이터, 지하철역, 지하도, 구세군 가게에서 펼쳐진 런웨이 기획과 오래된 가구와 세컨 핸드 옷 무더기 위에 앉아 그 쇼를 관람하던 사람들 간 예술 같은 콜라보.



Martin Margiela's F/W 2000 - 버려진 화물 열차와 함께



주목받지 못하고 스러진 것들의 수많고 한 많은 역사적 시간의 무서움을 본능적으로 이해한 사람, 그래서 그것들의 아쉬움 가득한 에너지 앞에 겸손할 줄 알았던 사람,


그래서 패션 산업 문제와 크리에이티브 한계의 대안까지 몇 수 앞을 내다본 격이 된 뒤지게 교훈적인 천재!





마르지엘라에 관한 뉴욕 타임즈의 한 기사에서 이런 멋진 표현과 마주했다.



옷이 말했고,
디자이너는 침묵했다.



예상 가능한 놀라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을 주는 방법 - 흘러간 시간의 점과 점을 연결해 새로운 테마를 준비한다. 작업물을 만든다. 그리고 침묵한다.


나 같은 잔챙이들이나 원래 이렇게 입만 살아서 나불나불하는 법ㅠㅠ


침묵하며 정진하는 모든 크리에이터들에게 무한한 경의를!




스눕피: 추억 보부상


광고를 전공하던 학부생 시절,


전공 지정 강의실에서 어떤 수업을 들었는데, 몇 번인가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떴을 때에는 지난 학기의 내가 지난 학기의 그 자리에 귀신 같이 앉아 있었다. 뭐지?


그리고 지난 학기의 그 교수님께서는 지난 학기의 그 화면과 지난 학기의 우리를 번갈아 보시더니 지난 학기의 그 이야기와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줄줄이 쏟아내셨다. 뭐지?





아, 제길슨!


같은 이야기를 조금씩 다르게 하는 전공 필수 강의를 얼마나 더 골라 듣고, 철 지난 미국의 사회과학 이론을 몇십 번 더 달달 외워야 나는 무려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시험날이 다가오면 큼지막한 답안지의 맨 위 인적사항 전공란에 나는 '광고홍보학과'를 적어 넣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때의 내겐 그것이 나란 사람의 대부분을 설명해 주는 핵심 정체성이자 삶의 전부였다.


그 일밖엔 할 게 없어서,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달리 없어서 맹목적으로 밀어붙이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으레, 그저, 소중한 세월을 하루하루 깎아 먹는 그 괴로움과 반면의 편안함에 취해서.





조금은 한심하고 미련한 모양이었어도 나를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와 준 그것들이 가끔 떠오르곤 한다.


영리하고 야무진 선택과 행동보다는 다소 미련하고 맹목적이었지만 그때의 우리(한국인 특)로선 달리 벗어날 방법을 몰랐던 그것들이 나중의 우리에겐 더욱 사무치고 아리고 보고 싶고 그런 거라면서 수동적이었던 과거의 나를 또 한 번 미화한다.



가장 나쁜 것은
알면서, 모르면서
자기 안에 감옥을 품고 사는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들이.

<파라예를 위한 저녁 9시에서 10시의 시> 중에서




스눕피: 무도 보는 차도남


요새 블로그에서 하도 눈물 눈물 거렸더니 뒤지게 나약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결심했다.


올겨울, 나는 차도남이 되어볼 것이다!





하지만 어제 정준하 형의 재수 학원 짜장면 에피소드를 다시 보다가 또 울었다.


글썽글썽 그리고 또르르 ㄷㄷ





진짜 옛날 무도 왜 이렇게 좋지?


진짜 미쳤다!


요새 내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이다.


200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주는 것도 없이 받기만 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듣고 싶은 노래]

겨울엔 톤 스티스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 춥네요. 잘 지내시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