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눕피 힙합 에세이 <상편> 올드 칸예가 바꾼 세상
칸예가 정규 데뷔 앨범을 발매한 2004년으로부터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부러 시기를 맞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히 올해는 이 형이 고양종합운동장에서 내한 공연을 준비 중이라는 가슴 떨리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는 데다가,
가끔씩 삶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 형에 관해 무슨 이야기든 떠들어줘야 개운해지는 나의 성질 때문에 오늘도 역시 나는 참지 못하고 그리운 올드 칸예(*중요: 올뉴 칸예와는 전혀 다른 사람)에 관하여 주저리주저리 잡스러운 썰을 한번 풀어보려고 한다.
그간의 칸예 포스트를 자체 결산해 보니, 누가 대한민국 대표 추억 보부상 아니랄까 봐 <올드 칸예>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기울어진 취향 탓에 2010년의 MBDTF 앨범 발매 시점을 포함, 그 이후 시절의 칸예에 관한 개인적인 감상 콘텐츠가 상대적으로 상당히 빈곤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다음 포스트에서는 2010년 이후의 칸예에 관하여 (약 10년 넘도록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열심히 주워듣고 자연스레 흡수한 어쭙잖은 잡지식의 종합적 한도 내에서) <하편>을 준비해 수다스럽게 또 떠들어볼 계획이다.
자, 그럼 오늘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 볼까?
칸예가 래퍼 초년병 시절에 발매한 정규 1집, 2집 그리고 3집 앨범을 소위 곰돌이 3부작 혹은 에듀케이션 시리즈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세 앨범 커버에는 모두 공통적으로 곰돌이가 한 마리씩 등장하는데, 이 곰돌이 캐릭터의 외형적 혹은 그를 둘러싼 배경적 변화를 따라가 보면, 올드 칸예가 자기 삶의 증명으로서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를 이미지로서 확 이해할 수가 있다.
먼저 2004년에 나온 정규 데뷔작 <The College Dropout>의 앨범 커버를 보면 실제 대학 중퇴자였던 자기의 삶을 대변하는 마스코트로서 ‘중퇴한 곰돌이(Dropout Bear)’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해당 앨범의 속지를 보면 이 중퇴한 곰돌이가 수행평가, 동창회, 운동회, 졸업식 등의 학교 행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섞이질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무래도 공부보다는 음악이 훨씬 더 좋았던, 특히나 생각도 많고 의심도 많던 그에게, 학교 생활이란 것은 꽤나 겉돌기만 하는 부적응의 시간이었을 심산이 크다.
그리고 이듬해 발매된 2집 앨범 <late registration>(2005)의 커버 위에 이 중퇴 곰돌이가 또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이때의 곰돌이는 일종 성공의 상징이라고도 부를만한 ‘루이뷔통’ 백팩을 메고 나와 텅 빈 대학의 강의실과 도서관을 나 홀로 돌아다닌다.
보란듯한 성공 이후의 약간의 미련이었을까?
자기 출세의 감을 실감하고 극대화하려는 수작이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거야. 쩝.
그리고 이어지는 3집 앨범 <Graduation>(2007)에서 이 곰돌이는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등장이 될 거란 걸 예감한 듯 최후와 어울리는 최고의 스타일을 뽐내며 등장한다.
스타일리시한 바시티 재킷을 입고 반짝거리는 황금 목걸이를 두른 세상 하입한 중퇴 곰돌이는 이 세상을 가볍게 졸업하듯 저 우주를 향해 멋지게 날아오른다.
그러니까 올드 칸예는 대학을 중퇴하고,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물론 약간의 외로움과 고독을 동반했으나), 자기만의 꿈을 좇아 누구보다 멋지게 성공하는 성장 소설의 주인공이자 그러한 내러티브의 매력을 매우 세련되고 젊은 감각으로 대표해 증명하던 상징적 인물이었다.
특히 3집 앨범에 이르러서는 커리어 내내 풍선처럼 부풀었던 자의식을 (아주) 조금은 내려놓고, 심플한 랩 스타일과 함께 ‘나’보다는 ‘여러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함께 파이팅" 하자는 참여형의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충실히 전달하기도 했다.
마음속에 나만의 소중한 꿈을 간직하고, 각자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가면, 성공의 길이 보일 거라고, 올드 칸예는 자주 말했고, 이 부정적인 세상으로부터 어떤 불편한 의심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때엔 나 자신이 그 완벽한 증명이 아니냐면서 부정의 싹을 잘라냈다.
이를테면 칸예는 <I told you so> 혹은 <야너두? 야나두!>의 아이콘이었던 셈이다.
거 봐, 내가 뭐랬어?
나도 또 너도 성공한댔지?
실제로 올드 칸예의 초창기 무대를 보면, 앞서 언급한 곰돌이 탈을 쓴 친구가 그의 뒤에서 열심히 디제잉도 하고 음악에 맞춰 즐겁게 춤도 추고 그런다. 말하자면 중퇴 곰돌이는 그의 분신이었고, 이 친구는 이 세상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꽤나 즐겁게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소 기억의 왜곡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원래 칸예는 4부작의 곰돌이 시리즈를 기획했었다.
하지만 4번째로 공개될 예정이었던 <Good Ass Job>이라는 앨범이 철저히 나가리 되면서, 중퇴 곰돌이가 등판하는 에듀케이션 시리즈는 2007년의 3부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본디 재치 있고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한 앨범이 될 예정이었던 곰돌이 4부 앨범 작업이 중단된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돈다 웨스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3살 무렵,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동아들 칸예에게 ‘돈다’는 이 세상의 전부였고, 그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맞이한 자기 인생 침체기의 폭풍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소용돌이치던 내면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정규 4집 앨범 <808s & Heartbreak>(2008)를 발표한다.
3집까지의 칸예가 프레쉬하고 컬러풀한 힙합 혁명의 전사와 같았다면, 4집의 칸예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노래로 증명한 감성의 철학자였다.
어머니 ‘돈다’의 죽음, 여자친구와의 이별, 팝스타로서의 지난한 삶과 그에 기반한 정체성 분리 장애까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칸예, 하지만 그를 다시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은 역시 음악뿐이었다.
그는 산산조각 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있는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음악적 스타일을 강구했다. 그래서 앨범 타이틀의 소스가 된 롤랜드 TR-808 드럼 머신으로 미니멀한 비트를 만들었고, 최소한의 멜로디를 활용했으며, 랩 같은 노래 혹은 노래 같은 랩을 했고, 로보틱한 사운드를 때리며 때로 감정을 죽였고, 오토튠 피칭으로 흐트러지는 감정을 극대화하거나 조절했다.
당시 그는 오토튠의 지나친 사용을 비판하며 음악적 완성도를 운운하는 평론가들을 향해 오토튠은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역으로 지적했다. 또 그와 오랜 기간 작업을 함께한 음악 엔지니어 ‘마이크 딘’은 칸예가 그의 4집 앨범을 통해 구현하려던 사운드는 평론가들이 짜고 치듯이 언급하는 미니멀리즘의 지향이 아니라 이전에 없던 힙합을 만들겠다는 새 의지의 발현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음악적 시도와 함께 한 인간의 가라앉는 마음을 노래로 구체화했다.
이모 랩의 극치였달까.
전화위복이라는 성어가 썩 어울리는 표현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간에 곰돌이 4부 앨범 대신 이 세상에 등판한 칸예의 '808' 앨범은 이후 등장한 팝 스타일의 현대적 원형이 되는 혁혁한 공을 올린다. 예를 들면, 4집에 이르러 '샘플' 베이스의 힙합과 결별하고 전자 음악 프로듀싱에 전력을 다한 칸예의 발자국 바로 뒤로 수많은 힙합 프로듀서와 래퍼들이 그대로 따라붙었고, 그렇게 2000년대 후반의 힙합 사운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관련하여 미국의 팝(힙합) 음악은 칸예의 4집 앨범 전후로 나뉜다고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였고, 음악깨나 들은 분들이라면 (당시엔 몰랐어도) 지금에 와 칸예의 4집 전곡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어보면, 이후 등장한 얼마나 많은 팝 음악(K팝도 물론 포함)이 이 앨범이 제시한 사운드와 주제에 하위 가지를 치며 발전한 것인지를 자연스레 깨닫게도 된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올드 칸예의 신입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등병 시절의 칸예는 미국 힙합의 인습과 고정관념을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가 불어온 새 바람은 뒷세대 래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힙합 콘텐츠의 길라잡이가 된다.
그러니까 칸예는 빈민가, 게토의 고통받는 스트리트 갱스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고, 실제로 자기 자신을 'Regular Guy'라고 불렀다.
올드 칸예는 약 팔고, 총 쏘고, 징그러운 문신이 가득한, 쉽게 가닿기 힘든, ‘힙합’을 이야기할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어떤 스테레오 타입이 진하게 느껴지는, 그런 캐릭터적 인물이 아니었고, 평범한 우리들이 일상 선상에서 동화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보여주었다.
데뷔 초부터 컬러풀한 폴로셔츠에 백팩과 같이 상당히 프레쉬한 중산층 대학생 느낌의 패션 센스를 뽐내던 그는 그러한 외적 스타일에 어울리는 매우 감각적이고 이미지적인 랩을 선보였다.
사실 힙합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의 컨셉은 차라리 '언더독'에 가까웠고, 주류보다는 '틈새'에서 훨씬 더 잘 통할 군번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가 뿜어내는 스타일과 매력은 대중 시장에 그대로 꽂혀 들어가 버렸다.
콘텐츠의 관점에서도, 예를 들면 개인의 꿈, 가족 이야기, 흑인 커뮤니티 내의 소비주의적 모습, 한 인간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일에 관한 생각 등 이 세상에 대한 고찰과 함께 자의식에 기반한 메시지 중심의 랩을 그는 주로 선보였었고, 또 음악 안으로 자기가 믿는 종교를 끌어와서 보편적인 복음을 전파하기도 했다.
사운드가 되었건 소재가 되었건 스토리텔링 컨셉이 됐건 당시 올드 칸예가 보여준 모든 움직임이 지금 우리가 즐겨 듣는 현대 힙합의 기틀을 닦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실 자신이 몸 담았던 갱단과 마약 거래 시절을 얘기하는 양반들 앞에서 비디오 게임 매거진을 탐독하며 특정 패션 브랜드에 심취해 어떤 아이템을 깔 별로 사모으는 비릿한 대학 중퇴 래퍼란 뭐랄까 위화감도 꽤 있고 면이 안 서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올드 칸예가 그러했고, 그에 더해 거침없고 눈치 하나 안 보는 대담한 말본새의 매력까지 얹어지며 아주 새롭고도 신선한 힙합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됐다.
사실 지금이야 여친한테 차이고, 사랑 때문에 울고, 진로에 관한 고민이나 시시콜콜한 가족 이야기를 늘어놓는 등 대수로울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담은 힙합 음악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만 해도 그러한 콘텐츠가 절대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당시 좀 치던 래퍼들을 생각해 보면, 당장 티아이, 제이다키스, 50센트, 에미넴, 제이지 뭐 이런 사람들이 생각나는데, 약 팔고, 총 맞고, 욕하고, 상당히 거칠고도 어떤 쎄한 과거가 있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들이 비록 완벽히 연기된 기믹이자 캐릭터였을지라도 말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칸예는 세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면서 자기 의심과 회의에 기반한 현실적인 메시지와 일종 휴머니즘을 힙합 씬으로 본격 끌고 들어 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칸예의 에고 Ego가 앨범을 구성하는 악기처럼 기능한다는 말까지도 돌았다.
왜 이렇게 사람 죽이는 얘기만 하는 걸까?
신의 편에 선 래퍼는 없는 건가?
일반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도 필요하지 않나?
실제로 올드 칸예가 당시 자신의 음악을 만들 때에 이러한 고민을 상당히 많이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와 더불어 그는 진정한 꿈을 좇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자기계발서적인 메시지를 지속해서 던지는 래퍼였다.
칸예는 본래 예술 대학과 주립대의 영문과에 다니다가 학교를 관두고 음악 활동을 본격 시작했는데,
그것이 주로 프로듀싱이었고, 저메인 듀프리, 탈립 콸리, 비니 시겔, 제이지와 같은 꼰대 래퍼들에게 아주 기가 막히는 곡을 제공해 주는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다가, 이후 자기 얘기를 너무 하고 싶어서 래퍼로 성공적인 데뷔를 치르고 마이크를 꽉 잡은 케이스이다.
하지만 당시엔 랩 실력도 솔직히 좀 부족했고, 밑바닥 출신의 그런 거친 감성이 전무해서 그를 둘러싼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고, 따라서 그의 래퍼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본 사람도 업계에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그런 선입견과 숱한 평가와 판단의 말들을 기어코 뚫고 랩 슈퍼스타의 지위에 오른 그의 그림은 사실 그 자체로도 굉장히 아름다운 작품 같이 느껴진다.
비트 찍던 프로듀서가 래퍼로 전향하는 일, 아니, 내친김에 글로벌 팝스타가 되어 버리는 올드 칸예의 미친 귀감 스토리는 지금 돌아봐도 참으로 독보적이고도 독창적인 행보라고 부를만 하다.
올드 칸예는 프로듀싱이든 랩이든 패션이든 자기만의 스타일, 혹은 본인 표현에 따르면 어떤 인종적인 강점을 잘 살려 대중적 어필 포인트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특히 이 형은 본능적으로 무엇이든 섞는 걸 너무나도 잘한다고 느껴졌는데, 커머셜한 팝 스타일과 언더그라운드 스타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교묘하게 고유한 음악적 포지션을 잘 구축했고(사실 둘 다 잘했고),
패션 또한 의도적으로 브랜드 체급을 두고 기가 막힌 믹스 코디의 힘을 보여주었으며,
어쨌든 힙합이라는 우산 아래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그런 감각만은 확실히 살아있었기에 다른 대부분의 래퍼들과 표현의 방식은 꽤나 달랐어도 길바닥 허슬러의 신조나 정신 이런 것들을 확실히 잘 지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왜 그런 모습 있지 않나? 성공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빡세게 일하고 열심히 사는 그런 간지!
그리고 앞서 반복해 밝힌 종교적 메시지와 자기의 음악 취향, 패션 취향 등을 적절히 섞어서 자기만의 인생 개념, 나만의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냈다.
자기만의 기준이 확고하고, 나만의 스타일이 잘 정립된 사람들은 어떤 길을 걷더라도 용케 내 길을 찾아 그 길을 잘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늘 매력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올드 칸예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본인에게 있어서 성공의 기준이란 하나의 곡을 멋지게 히트시키고, 그 곡에서 샘플링한 노래를 추후 자랑하는 것이라며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성공에 따른 과시의 대상이 그저 뻔한 자동차나 시계 이야기가 아니어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고, 이 사람은 그때그때 자기의 업과 그것을 이루는 과정을 순수하게 섬기는 뜨거운 열정을 간직한 사람이구나, 하는 점이 진심으로 느껴져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칸예의 샘플링은 뭐랄까 하나의 믿고 듣는 브랜드에 가까웠고, 따라서 어떤 곡을 가지고 놀든 그 모든 결과물을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감각이 확실히 있었다.
예를 들자면 3집의 메가 히트곡 <Stronger>는 공개 초기에 일렉트로닉 음악 팬들로부터 "네가 뭔데 감히?"라는 욕을 무지하게 많이 먹었고, 힙합 음악 팬들로부터는 "이건 좀 아니지 않냐?"와 같은 비아냥을 상당히 많이 들었는데, 그는 결국 힙합은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이러한 참신성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며 결국 본인의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끝내 옳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자기만의 개성으로 승화시키는 그런 모습은 참 존경스러웠다.
관련하여 칸예 본인 표현에 따르면 자신이 샘플링한 다프트 펑크의 원곡(Harder, Better, Faster, Stronger)은 본디 매우 White한 노래인데, 힙합의 감성과 자기만의 음악적 강점을 확실히 믹스하여 상당히 Black하게 만들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아무리 뻔하고 만연한 노래를 가져오더라도 나만의 스타일을 색칠해 쉽게 예상할 수 없도록 수정하고 편집하는 그의 미쳐 돌아버린 타고난 감각은 정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보였다.
샘플링 이야기가 나온 김에 칸예의 샘플링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볼까 한다.
주지하듯 사실 올드 칸예는 편집자형 아티스트에 가까웠다. 물론 그러한 창의의 기조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빈티지 소울 클래식 음악의 일부를 따와서 거기에 현대 힙합의 비트를 섞어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그것이 그의 커다란 음악적 공로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이 형은 음악도 빈티지, 패션도 빈티지를 참 좋아하는, 과거를 충실히 따르는 역사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사실 샘플링 힙합 뮤직이라는 것은 칸예가 프로듀싱에 활용했다는 이유로 특별해진 것은 전혀 아니다.
물론 당시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던 동료 프로듀서 '저스트 블레이즈'와 함께 칸예의 음악 속에는 샘플 사운드의 피치와 스피드를 올려 기묘하게 매력적인 고유의 사운드(칩멍크 소울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등의 어떤 작법적 차별점이 분명 존재했고, 그것들이 실로 우수한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힙합 세상에서 샘플링이란 개념은 사실 새로울 것 하나 없고, 더구나 원래 존재하던 노래를 이리저리 오리고 자르면서 가지고 노는 행위는 도리어 힙합 음악의 원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칸예는 그것(샘플링 힙합)을 다시 게임의 중심으로 갖고 들어와서 주류 팝 음악으로 히트시켰다는 점에 오히려 커다란 의미와 공이 있었으며, 신세대 리스너들에게 옛날의 멋진 음악을 재발견하고 소개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관점에서도 무척 의미 있는 행보를 보여준 셈이 되었다.
구구절절 자기 얘기를 부산스럽게 늘어놓는 시끄러운 사람이면서도 결국 진짜 올드 스쿨 힙합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증명한, 본질을 꿰뚫는 온고지신 같은 교훈으로 가득했던, 그의 이름은 올드 칸예였다.
약간의 살을 붙여서 이야기하자면,
정규 1집에서 그의 전매특허 기교인 신박한 클래식 샘플링이 상당히 돋보였다면, 2집에서의 올드 칸예는 힙합 게임 안에서 쉽게 만나보기 어려웠던 바이올린, 비올라, 드럼과 같은 라이브 악기 연주를 앨범에 녹여내어 '표준' 혹은 '평범'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게임 체인저로서의 신선한 구성력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이 형은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거듭하며 전작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형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전작 말이야,
너무 서둘러서 만든 것 같아.
- 1집을 회상하던 올드 칸예
음, 말이 좀 길어지는데, 샘플링 음악에 관한 내 생각을 조금 더 얘기해 보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올드 클래식 샘플링은 서정적인 허세를 부릴 때 활용하기에 아주 좋은 카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차에서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면, 뻔하디 뻔한 노래가 아닌, 저기 깊이 잠들어있던 보석 같은 옛 음악을 다시 여기 몰래 꺼내어 와 감상할 때에 정말 근사한 무드가 형성되지 않나 싶은데, 올드 칸예는 뭔가 그러한 감각과 감정의 맛을 확장해서 프로듀싱에 적용한 게 아닐까 싶은 나 혼자만의 헛된 상상을 좀 해보게 된다.
이미 검증된 너무 좋은 옛 노래가 이렇게나 많은데, 그것들의 일부를 예쁘게 잘 뜯어 와서 지금 이 상황, 지금 이 감성에 맞게 새롭게 부활시키면 얼마나 멋질까? 듣기 좋지 않아? 일단 좋으면 된 거 아냐? 너희들이 원한 게 이런 거 아니었냐고?
아무튼 이 형은 타고나기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정말 잘 이용하는 것 같았는데, 이러한 점은 세상을 대하는 일에 한참 부족한 내가 현재의 나보다 한참 어린 그 시절 칸예의 발자취를 더 많이 찾아보고 진지하게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 각도를 조금 틀어 칸예의 기행과 뻘소리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얹어 볼까 한다.
물론 그것들의 수위가 점점 세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아시다시피 칸예의 별난 행동이 최근에서야 벌어진 일만은 아니다. 데뷔 초부터 칸예는 스타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어떤 통념 같은 것을 거스르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방송에 나와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두고 조지 부시 대통령을 디스하거나, 힙합 씬, 나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차별 문화에 대해 대놓고 강한 비난의 목소리를 내던 형이었다.
"힙합은 장벽을 허무는 문화여야 하는데, 힙합 씬의 모든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차별해요. 저는 동료 래퍼들이랑 친구들에게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어이, 그만들 좀 해!"
"인종 차별은 낡은 개념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죠.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 방에서 튕기는 공과 같달까요. 고양이와 놀아주고 싶지 않을 때, 튀는 공을 던져주고 공을 두고 싸우게 하면, 튀는 공은 튀는 것 외에는 아무 목적도, 아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인종 차별입니다.
칸예는 커리어 내내 대체로 위험을 감수하는 스타일로서 자신을 대중 전시했는데, 그러한 위험 부담이 그래도 늘 성과(사람들의 관심)로 연결되던 그런 성공 경험 때문에, 그것이 스타로서의 그의 시장성과 상품성을 끌어올리는데 아무래도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한마디로 예측 불가능성이 매력인 이상한 사람이랄까?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그래도 세상에 문제가 생기면 할 말은 똑바로 하는 그런 자세, (당시나 지금이나) 꽤나 터프한 래퍼들마저도 회피하는 주제나 사안이란 것은 분명 존재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욕먹기 싫은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명인으로서 어떤 사안에 있어서나 흔들림 없이 자기 목소리를 투명하게 내곤 하던 올드 칸예의 그런 용기가 난 언제나 멋지게 느껴졌었다. 상당히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청소년 시절의 나를 좀 감았다고 해야 할까? 더구나 나는 언제나 예측이 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오늘의 내 글도 칸예 형처럼 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겠으니 이쯤에서 적당히 정리를 하는 게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앞서 밝혔듯이 이번 포스트의 후속인 <하편>은 2010년 이후의 칸예에 관한 잡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고, 혹시 올드 칸예에 관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생기게 되면 (뭘 새삼스럽게) 새로운 포스트를 하나 기획해 또 구구절절 떠들어보겠다.
아무튼 칸예가 정규 1집 앨범을 발매한 2004년 그리고 2집 앨범을 공개한 이듬해 2005년 즈음은 세상의 노래들이 슬슬 싱글 중심의 다운로드 시대로 이동하던 시기였는데, 당시의 올드 칸예는 모든 트랙이 완벽하게 잘 준비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길이 부드럽게 잘 닦인 짜임새 있는 앨범을 들고 나왔었고, 앨범 공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클래식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으며, 곧장 그래미 어워즈 수상이라는 영광으로까지 이어졌고, 내친김에 그는 힙합의 지형을 확 바꾸었다.
'꼼꼼함'과 '세심함'을 필수 구성 요소로 갖추고 있던 올드 칸예 형의 초창기 앨범을 진지하게 감상할 때면, 하나의 시리즈를 완결하듯 트랙 하나하나에 나름의 이야기가 촘촘히 잘 담긴 통 앨범을 순서대로 듣는 행위가 주는 만족감이라는 것이 음악을 사랑하는 헤비 리스너들 입장에서 참으로 소중한 가치였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그러한 문화유산(?)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은 요즘 시대의 한없이 가벼운 힙합 음악 콘텐츠와 마주하는 오늘날엔 동시에 꽤 애석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고개를 약간 돌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숏폼 콘텐츠라는 것이 크게 흥할 뿐이고, 아주 단발적인 메시지들만 마구 쏟아지며 정신을 어지럽히는 요즘이기에 더더욱 '롱폼(?)'의 개념으로 긴 호흡을 가져가는 완결된 기획 작품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I miss the Old Kanye
돌아보면 세상을 뒤흔들었던 올드 칸예의 진짜 매력은 그의 개인적 경험과 그가 내놓은 수많은 창의의 기물이 놓인 지점이 그가 요구하거나 의도한 (대중) 문화의 진보 수준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데 있었다.
진짜 천재 아니야?
올드 칸예를 사랑했던 우리는 우리의 슈퍼스타가 우리 일상의 잔걱정을 깨끗이 지워주는 대담한 '리더'이자 막막한 앞길을 환하게 밝히며 몇 수 앞을 먼저 내다보고는 우리를 찬찬히 돌아보고 실실거리는 '천재'이길 바랐다. 그래서 곧 죽어도 꿈과 희망만을 이야기하면서 부정에는 쏜살같이 눈을 돌리던 근본적으로 인도주의적인 한 남자의 다음 말(馬)과 다음 말(言)은 언제나 가슴 부풀도록 기대가 되었었는데, 지금 당장 말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기다림의 끝에 선 인물이 이렇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요상한 모습만은 결코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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