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작은 비밀
작년에 회사를 관두고 오롯이 혼자가 되어 무소속 인간으로 일본에 놀러 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타국의 호텔 욕조에서, 당장 의탁할 것이라곤 따뜻하게 차오르는 투명한 물뿐인 그곳에서, 어딘가에 또 매이기 전까지, 내 안의 아쉬운 소리는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박멸하겠다며 홀로 다짐했다. 발가벗은 밥벌이의 노예가 자유의 개념을 깨닫는 가장 애처로운, 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학 시절, 인상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돌아봐도 일본의 욕조 속처럼 나는 혼자였다. 어딘가로 홀로 숨거나 달아나는 과정에서야 내 굳은 감각이 깨워졌으니까. 수업과 수업 사이가 늘어질 때, 나는 중앙도서관 지하의 문학 코너의 책장 구석에 몸을 기대어 당장 눈에 걸리고 손에 잡히는 소설 속 언어와 그것이 가르치는 세상을 대하는 센스를 배웠고, 날이 좋은 날엔 충무로역부터 안국역, 광화문역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으며, 약수동과 이태원동의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혼자 걸어야 엉킨 생각이 정리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장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게 만드는, 싫은 일에 그저 싫다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용기를 주는, 가장 비효율적인, 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방법이었다.
지난 주말 아침에 눈이 일찍 떠졌다. 유튜브 앱을 열고 피드 스크롤을 몇 차례 내렸더니 전설의 일드 '롱바케'의 요약본 썸네일이 나를 자극했다. 결혼식 당일에 파혼당한(다른 여자와 야반도주한 약혼남으로부터 버림받은) 서른한 살 달뜬 여자의 좌충우돌 러브스토리.
열여섯인가 열일곱에 처음 만난 드라마인데, 어느덧 내 나이 서른여섯. 슬프다. 그런데 나이 때문인지 상황 때문인지 '기무라 타쿠야'의 이런 대사가 유난히 마음을 휘젓는 건 왜일까.
30년도 넘게 살았으면서
사람을 너무 믿고 있어.
그러니까
아사쿠라 상이 도망갔잖아.
앞서 잘난 척 혼자만의 깨달음에 대해 개폼 잡고 써 갈겼지만, 실은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세상과의 동기화가 끊어지며 자꾸 삐걱일 수 있겠다는 더 큰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리오.
싸잡아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것이 십프피의 숙명이 아닐까요.
"자네가 그들의 스타일을
따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자네가 약간의 재치와
요령만 발휘하면
그들도 기꺼이
자네 삶의 방식을
인정해 줄 거야."
서머싯 몸 <면도날> 중에서
■ 오늘 함께 듣고 싶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