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성공한 걸그룹의 가장 성공적인 앨범
혼자 살면서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한 번씩 정체성이 결핍된 듯한 요상한 기분에 젖어들곤 한다. 끌려가듯 살고 있는 우울한 느낌과 그럼에도 어쩌자고 행복한 감정 사이에 무수한 점을 찍으며 무한히 오가는 정서적 유랑 상태에서 만년 건달 같은 삶을 이어간다.
피츠제럴드의 어떤 단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주인공이 “말이 없는 공간엔 무게가 있다”라면서 '정적'의 이로움을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출처도 없이 메모장에 대충 적어놓은 걸 보니 어지간히 와닿았나 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과 공간은 저녁 샤워 후의 소파 위다. 정적의 이로움을 즐기기에 이보다 완벽한 순간은 없다. 하지만 30분을 채 못 버티고 지루함의 무게에 짓눌린다.
쯧쯧, 불쌍하군.
음악이라도 틀어야겠다.
요샌 다시 옛날 앨범을 찾아 듣게 된다. 사춘기 시절 CD깨나 사모으며 앨범 수록곡 하나하나를 소중히 챙겨 듣던 버릇 때문인지 1번 트랙부터 차근차근 가사까지 곱씹어가며 제대로 감상에 빠져본다. 대충 몇 곡 골라 듣는 건 당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 밤의 선택은 90년대 R&B 필청 앨범, TLC의 <CrazySexyCool>(1994)이다.
1990년 무렵, 톰보이 컨셉의 여성 힙합 트리오를 만들어 보자는 기획사의 아이디어로부터 탄생한 TLC는 T‑Boz 티보즈, Left Eye 레프트 아이, Chilli 칠리, 이렇게 세 멤버가 주축이 되어 힙합, 팝, R&B를 매력적으로 조합한 고유의 신선한 사운드(TLC 사운드로도 불렸다) 위에서 진취적이고 주도적인, 그야말로 ‘기준’ 있는 여자의 비전을 노래했고, 바야흐로 90년대 여성 주체의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CrazySexyCool>은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걸그룹의 가장 성공적인 앨범이었고, 여성의 사랑, 섹스, 허무와 그 결과를 감각적으로 다루며 R&B 장르의 남성 중심적 서사를 뒤집은 시대의 목소리와도 같았던 작품이다.
마약 중독과 HIV 확산, 총기 문제 등의 당대 사회 이슈를 정면으로 다룬 메가 히트곡 “Waterfalls”부터 외로움의 빈자리를 찾아 불륜은 불륜으로 대응하겠다는 가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사운드와 보컬로 강력한 존재감을 남긴 재즈 그루브와 힙합 소울을 담은 명곡 ”Creep”, 여성의 성적 욕망을 가감 없이 표출한 Babyface 베이비페이스의 섹시 바디 멜로디 “Red Light Special”과 프린스가 극찬한 커버곡 “If I Was Your Girlfriend”까지 도대체가 단 한 곡도 거를 일 없는 탄탄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심지어 멤버들의 감정선까지 흠잡을 데 없는,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무장된 클래식 앨범이랄까.
“우리는 프로듀서들에게 처음부터 <CrazySexyCool>이라는 앨범 이름을 전달했어요.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었거든요.
사운드도 그에 맞아야 했어요.
모든 여자에게는 Crazy하거나 Sexy하거나 Cool한 면이 있죠.
세 가지 모두를 가질 수도 있지만,
누구든지 그중 하나는 더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앨범에는 90년대 R&B·팝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베테랑 프로듀서이자 LaFace Records의 공동 설립자 LA Reid LA 리드와 Babyface 베이비페이스는 물론, 10대 때부터 이미 Boyz II Men 보이즈 투 맨의 데뷔 앨범을 작업한 히트곡 메이커 Dallas Austin 댈러스 오스틴 그리고 신예 천재 힙합 프로듀서 Jermaine Dupri 저메인 듀프리까지 최고의 제작진이 두루 참여했다.
<CrazySexyCool>의 대표 곡은 빌보드 200 차트에서 무려 2년 이상을 머물렀고, TLC는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다이아몬드 인증(1천만 장 판매 이상)을 받은 걸그룹이 되었다.
자, 이제 그만!
Wiki스러운 음악 소개는 이 정도로 족할 것 같다.
여름이 되면 확실히 여름 냄새나는 노래가 땡긴다.
오늘은 TLC 식의 여름 찬가, 매력적인 팝 발라드 “Diggin’ On You”를 디깅 해본다.
노래의 서사는 이렇다.
7월 4일,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공원에 앉아 잔잔한 마음으로 쿨에이드를 마시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자 주인공에게 한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쟤가 너한테 관심 있대.
지금껏 본 사람 중 최고래.
뻔하디 뻔한 개수작질.
몇 번이나 들어본 멘트이지만, 오늘은 왠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린다. 관계에 휘둘리기 싫고, 진심을 내어줄 여유도 없어서, 새로운 인연은 생각도 없었는데!
도대체 너의 말이 왜 이렇게까지 나를 흔들어놓은 걸까?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뭐 그런 느낌이다. 빠져든다. 빠져들어. 너에게 푹 빠져든다.
TLC는 미국의 여성 그룹으로서는 전례 없이 빌보드 탑 5 히트곡 명단에 4곡의 싱글을 올렸고, 베이비페이스가 프로듀싱한 "Diggin' On You"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5위를 차지했다.
우리 노래는
시간이 지나도
통할 거라고 믿어요.
당장 내일 발매해도
라디오에서 계속
울려 퍼질 거예요.
T-Boz
9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명반 순위에 지겹도록 이름을 올리는 작품, 시대의 유행을 넘어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아주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TLC의 사운드와 보이스는 '오리지널'의 힘을 멋지게 증명한다.
누구에게나 계절의 언어가 되는 음악이 있고, 그런 노래를 (언제든 쉽고 편하게) 매년 다시 꺼내 들으면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에 젖을 수 있는 건 디지털 음원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천복 같은 특권일 것이다.
무덥고도 무더울 올여름,
잊고 있던 여러분의 계절 노래와 다시 만나는, 행복한 디깅의 순간이 넘쳐나는, 그런 행운 가득한 나날이 되시길!
■ 오늘 함께 듣고 싶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