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감상적인 사운즈한남 방문기

카페 '더 라스트 페이지'를 만나 진심으로 행복했다.

by 스눕피

보통의 개인 블로그처럼 방문 장소를 구구절절 리뷰하는 일은 가급적 지양하려고 했다. 되도록 어느 정도 주제와 소재를 통일하여 브런치에 나름의 짜임새를 두고 싶었고, 무엇보다 예삿일을 나열하면서 이곳이 난잡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촌놈의 타고난 기질이란 우연히 좋은 곳에 들러서 훌륭한 기운을 한 번 느끼고 나면 입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애석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도리도 없다.


티맵에 전적으로 의존해 사운즈 한남에 힘겹게 도착한 건 지난 주 월요일 오후 2시였다, 애매한 시간이다. 일명 백수 타임(나는야 쇠로 만든 낯가죽을 뒤집어쓴 자랑스러운 백수이니까.) 기계적인 목소리로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한결같은 친절함을 더해 길을 일러주는 티맵 누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한남동의 좁은 골목 이곳저곳을 이미 몇 바퀴나 돈 후였다. 티맵의 조금은 불친절한 화살표 탓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쓸데없이 어렵게 도착한 사운즈 한남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만난 제법 근사한 분위기를 연출해주는 적정한 조도의 전구들의 나열은 나의 기분을 쾌하게 하였다. 그 불빛들은 내게 마치 여기에서 앞으로 꽤 근사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며 우쭐대고 건방을 떠는 건물의 재수 없는 속삭임과도 같았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사운즈 한남의 입 속으로 쓱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달까. 이건 뭐 신밧드의 모험도 아니고...... 조수석에서는 친누나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도착과 동시에 누나를 정신없이 흔들어 깨우자 누나는 조금 짜증을 냈다. 사운즈 한남 카페 ‘콰르텟’에 가자고 노래를 부른 장본인은 분명 누나였는데...... 아무튼 발레 파킹을 정중하지만 비굴하게 맡기고서 지하 주차장과 곧바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는 내부 공사 탓인지 사방의 벽면을 어두운 색감의 부직포 따위로 무심하게 포장하듯 막아놓았는데, 그것도 일종의 감성 구축을 위한 의도된 설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이런 미쳐버린 의미 부여의 습관은 중독이고, 흡연처럼 쉽사리 끊을 수가 없다.


태초의 목적지였던 1층에 위치한 카페 콰르텟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SNS 속 카페의 명성에 정확히 부응하듯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곁눈질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스윽 관찰해보니 나는 그들의 눈에서 앞으로 50분 내에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우린 추호도 없으니 괜히 어슬렁거리지 말고 다른 카페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나와 누나는 그러마고 했다. 나와 누나는 눈치 하나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이다.

카페 콰르텟으로부터 미련 없이 빠져나와 사운즈 한남의 한가운데로 나와 뻥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건물을 빙 둘러보니 베이지와 그레이 색감이 안정적으로 조화를 이룬 세련된 건물이 내뿜는 도회적이고 안락한 기운이 나를 자극했다. 희뿌연 미세먼지로 가득한 잿빛 하늘과 건물의 완벽한 조합은 미세먼지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명확히 설명할 길이 없어 보였다. Special Thanks To 미세먼지.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일단 화장실에 한 번 가봐야겠다.’

음, 예상대로 화장실은 깨끗했다. 사운즈 한남 지하주차장에 입성하면서 느낀 그 적당한 불빛과 적정한 어두움을 화장실이 다시금 반복해주고 있었다. 마치 부끄러운 볼일의 기억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또 기왕이면 기분 좋게 지우고 나가라는 듯이. 따뜻한 물로 손을 씻고 빵빵하게 채워진 페이퍼 타월을 두어 장 꺼내어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배가 부르니 식당(일호식)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카페 콰르텟에 빈자리가 나길 기다리려니 우리는 또 그저 먹기 위해 오래 기다리는 일을 애당초 그리 즐기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이다 보니 그냥 1층의 내외부를 한번 쭉 돌아보며 앞으로의 거취를 결정하기로 했다.

정확한 문안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1층 Aesop 매장의 유리문 바깥으로 드러나 있던 정갈한 카피를 몇 번 되뇌어 읽고 매장 바깥에 놓인 Aesop의 핸드크림 샘플을 몇 번 펌핑해 손에 충분히 덧바르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뭘 살 것도 아니면서 무작정 들어간 매장에서 보여주는 고객의 행동은 대개 둘로 나뉜다. 태연하고 고집스럽게 상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온전히 즐기거나, 무언가에 쫓기듯 재빨리 매장 밖으로 탈출하거나. 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서 후자를 택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핸드크림의 고운 냄새를 만끽하며 1층에 위치한 독립서점 스틸북스의 겉면을 훑었다. 그렇지. 요즘 사람들은 이런 걸 또 좋아하지. 이 최첨단 시대에 스마트한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하려면 모름지기 한번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드는 일에 무엇보다 집중해야 한다. 다른 건 부차적인 문제이다. 욕을 하면서 들어가든 감탄을 하면서 들어가든 구시렁거리며 들어가든 일단 들어가 보고 싶도록 순간의 호기심을 폭발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스틸 북스를 두고 솔직히 하고 싶은 말은 별로 없다. 어떤 유명 문화심리학(?) 교수가 언젠가 말했던 한마디로 스틸 북스에 대한 나의 감상평을 갈음해볼까 한다. '21세기는 편집의 시대다.'


카페 콰르텟에 못 갈 바에야 사운즈 한남 밖으로 나가서 다른 카페에 가보자는 누나의 의견을 가차 없이 잘라내고 나는 1층이 아닌 다른 층에도 제법 괜찮은 카페가 두어 개쯤은 더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운즈 한남에 머무르길 누나에게 강권했다. 결론적으로 나의 주장은 옳았고 우리는 5층에 위치한 카페(이자 와인 바) '더 라스트 페이지'에 마침내 입성하게 되었다.


아니, 시작부터 존 키츠의 시구라니. 이건 반칙이잖아. 게다가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담은 종이 쪼가리와 함께 배달되는 영수증이라니. 이건 진짜 고의성이 짙은 심각한 수준의 반칙이잖아. 심지어 의도적으로 오타를 만든 것인지 'boats against the current'를 'boats again stthe current'라고 프린팅한 후 X표와 함께 펜으로 무심하게 고쳐놓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카페 주인님이 혹시 생전에 워낙 오탈자가 많았다던 작가 피츠제럴드의 광팬이라서 그런 간지를 오마주의 형태로 일부러 노려 박으신 건 아닌지...... 놀라운 의심 한 바가지가 일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피츠제럴드의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의 친척 뻘......?

피츠제럴드와 젤다, 데이지와 톰을 바로 지금 여기로 소환해도 네 사람의 대단한 허영심을 거뜬히 만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인테리어와 음악 그리고 냄새가 조화를 이루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제 여기서 이 표현을 한번 써주면 되는 건가? 혼모노......


DALI 스피커의 내추럴한 사운드, 높디높은 커튼의 포근한 색감(변태처럼 커튼을 몇 번이나 매만지고 왔다. 세탁 안 했을 텐데......), 시의적절하고 조화로운 소파와 테이블, 투머치하지 않은 소품들의 절제된 자기주장까지. 굳이 아쉬운 것을 하나 꼽자면 공기청정기....... 내가 뭐라고 아쉬워하냐...... 진짜 왜 그러냐......


아무튼 씁쓸하고 시큼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부드럽고 고소한 아이스 카페라테를 누나와 사이좋게 나눠 마시며 카페(이자 와인 바) '더 라스트 페이지'에서 보낸 월요일 오후의 그 한가롭고 상쾌했던 기분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음에 다시 한번 들르겠습니다.


아, 힙스터들이 열광하는 곳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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