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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침묵과 부재 속에 의자가 스스로 연기하는 기적

#15-3. 열다섯 번째 책) 외젠 이오네스코, <의자>


이 희곡집에 수록된 이오네스코 세 편의 희곡들을, 언어를 무너뜨리는 세 가지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의자>에서 보여주는 이 마지막 방법이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하다고 생각합니다.

열다섯 번째 책, <대머리 여가수> 중「의자」, 외젠 이오네스코, 프랑스, 1952.






결국 무대는 이 부재의 존재들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155~156p中



마지막 세 번째 작품, <의자> 입니다.

이 작품은 앞선 두 작품과 본질적으로 연결되며 이른바 삼부작의 완성, 즉 최종적인 마침표를 찍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앞서 다루었던 두 작품과 결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교하자면, <대머리 여가수>가 언어의 불완전함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면, <수업>은 그로 인해 야기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고, 이 작품 <의자>는 이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말하는 작품입니다.

<의자>는, 앞선 두 작품 속의 주된 테마 두 가지를 모두 이야기하면서, 최종적으로 한 걸음 뒤로 빠지는 듯한 자세를 보여 줍니다.

즉, <대머리 여가수> 속 '불완전한' 언어와, <수업> 속 언어 사용이 불러 일으킬 '갈등과 광기' 를 종합하여 보여 주면서, 이 문제를 인간이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전 두 작품에서, 작가가 부조리함의 문제에 대하여 깊숙이 파고들면서 그 비합리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의자>에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상황을 넓게 바라보려는 어떤 초연함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초연함은 의욕을 잃고 지친 사람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수준을 뛰어넘어 해탈한 모습에 가까우며, 앞선 두 작품에 이어 <의자>가 일종의 화룡정점으로 읽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초연함 덕분에 <의자>는 '태도'를 획득하면서, <대머리 여가수>나 <수업>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태도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또 한 번 말하지만, 이오네스코의 극에서 인물들은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오해합니다.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말이 오가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언어는 모호해지고 언어를 잃은 인물들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이전 글 #15-1<대머리 여가수> 에서


그리고 이렇게 넋이 나간 듯,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인물의 지위를 잃고 배경의 일종으로 전락한다면, 그 빈자리를 메우는 존재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이전에 말한 바 있습니다.


인물들이 빈 자리에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

말인즉 '언어' 라는 주인공입니다. 언어는, 그의 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재인 셈인데, 이 주인공은 형체도 없고 말도 없고 무대 위에 직접 나타나지도 않지만, 극에 등장하는 모든 실제적인 인물들을 능가하면서 하나의 관념적인 주인공으로서 작품 전체를 지지합니다.

그것도 아주 유일한 주인공이자 단독적인 주인공으로 말입니다.

-이전 글 #15-2 <수업> 에서


이는 <의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한 술 더 떠서 이 작품에서 인물들은 심지어 소거됩니다.

존재를 박탈당했다, 고 표현해도 좋을 일종의 제명 행위로, 아마도 작가는 생명력을 잃은 인물들을 극에 실제로 등장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인물들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이 앉는 '의자'가 그들의 존재를 입증시켜 주며, 작가가 말한 대로, 무대는 결국 '의자'로서 표현되는 부재의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부재의 존재' 라는 말이 성립된다니, -이것만 보아도 이오네스코가 말한 언어의 부조리함이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텅 빈 의자들을, 어떤 공허를 표현하기 위해서, 정확하게는 언어라는 극도의 공허를 표현하기 위해서 고안된 장치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비존재라는 존재, 혹은 부재하는 것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의자'는, 텅 빈 무대를 극심한 부조리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의자가 스스로 연기하는 셈입니다.






마지막 순간, 변사가 귀머거리에 벙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작품은 끝납니다.

변사의 등장에 모든 극적 긴장감이 집중됩니다. 수많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놓은 자리, 이제 변사가 역사적인 연설을 할 차례에서, 그가 할 줄 아는 말은 "…므, 므므므, 므므 …" 와 같은 신음소리 뿐입니다.


이곳은 의사소통의 유일한 수단인 언어가 파괴된 현장입니다. <의자>에서는 그 현장을 가장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변사의 정체가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다는 사실은, 이전 두 작품을 읽은 우리에게는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이 결말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미 인간 언어가 어떤 결함을 안고 있는지, 그로 인해 인간의 소통이 얼마나 '희한한 일' 이며, '넌센스' 이자 하나의 '모순' 인지, 이오네스코의 격한 주장을 여러 번 들어 온 독자에게는, 변사가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것이 당연하게 여져길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가 귀머거리에 벙어리와 다를 게 없는 것은 아닌가…….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장면이 웃기다는 점 말입니다.

분명한 코미디로서의 의도가 이 장면에 존재합니다. 이 장면은 독자(혹은 관객)들을 웃기기 위한 장면이고,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설정된 변사는 의도적으로 우스갯거리가 됩니다. 말하자면, 의도적인 익살의 주조가 깔려 있습니다.

작가는, 언어가 파괴된 현장에서 혼란을 겪는 인물들을 위로하지도 않고,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그들을 조롱합니다. 마음껏 비웃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코미디화 시켜 놀립니다, 조롱합니다.


그것이 왜인지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조롱만이 유일한 윤리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오네스코의 희곡이 '언어를 공격하는 일종의 테러' 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언어에의 몰지각한 믿음과 환상을 깨고, 강도 높은 공격으로 언어의 빈틈과 결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상적 기반이 언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언어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인간이 쌓아 온 모든 지식, 문화와 사상, 말하자면 모든 '앎'에 대해 항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위태롭게 쓰러질 위기에 처했을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작가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미학(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태도)의 문제입니다.*


작가는 쉽게 회의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언어의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쉽게 포기하거나 무책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오네스코가 그의 극 작품을 통해 인간 언어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상, 우리는 그에게 책임감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롱'은 이오네스코가 택한 유일한 윤리적인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고통 다음에 이어지는 웃음. 결국 인간은 비극적인 삶에 짓눌려 있지만 '조롱'을 통한 웃음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된다. 웃음은 해방이다. 그리고 유일한 가능성이다.
-김 찬자,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읽기 -존재와 그 부조리한 일상의 풍경> 中


결국 '조롱'이 의미하는 것은 초월이자 해방으로, 그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비웃고 웃어넘길 수 있는 한, 우리는 그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위의 인용문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위에서 다음과 같이 쓴 부분


이전 두 작품에서, 작가가 부조리함의 문제에 대하여 깊숙이 파고들면서 그 비합리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의자>에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상황을 넓게 바라보려는 어떤 초연함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초연함은 의욕을 잃고 지친 사람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수준을 뛰어넘어 해탈한 모습에 가까우며, 앞선 두 작품에 이어 <의자>가 일종의 화룡정점으로 읽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초연함 덕분에 <의자>는 '태도'를 획득하면서, <대머리 여가수>나 <수업>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태도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은, 바로 이 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덕분에 이오네스코는 그 부정할 수 없는 비극적 강도에도 불구하고, 희극 작가입니다.**





*이 문장은 <百의 그림자>에 대한 신 형철 평론가의 글에서 빌려 왔습니다.

**이 문장은 김 찬자 교수의 저서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읽기 -존재와 그 부조리한 일상의 풍경>에서 빌려 왔습니다.






앞서 이오네스코의 극에 '반(反)연극', 그리고 '언어극' 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거기에 이어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이름을 덧붙이겠습니다. <의자>를 '조롱극' 이라 부르겠습니다.


일상을 깨뜨리고 현실에서 탈피하는 연극로서의 반(反)연극이었고, 언어를 정말로 가혹하게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위해' 쓰인 작품으로서, 언어의 극이자, 언어에 의한 극이라는 의미로 언어극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비극과 부조리의 상황에서도 회의주의로 추락하지 않고, 웃음을 통해 초월할 줄 아는 연극으로서의 조롱극입니다.


조롱이라는 윤리적인 태도를 획득함으로써, 절망 대신에 희망을 보여 주고 극복을 꾀합니다. 언어와 삶의 무의미성에 대해 웃고, 가뿐히 웃어넘기며 조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가 보다 압도적인 잔혹성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롱이란, 다소간의 경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절망에 빠지거나 비극적 감상에 젖는 대신 조롱으로 대응하는 태도.

-이것이 이오네스코가 보여 주는 언어를 무너뜨리는 세 가지 방법 중, <의자>가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하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09.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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