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연습 Oct 31. 2021

한 편의 잔혹극, 피해자는 언어.

#15-2. 열다섯 번째 책) 외젠 이오네스코, <수업>


<수업>은 이것을 읽는(혹은 보는) 독자(혹은 관객)들에게, 언어가 불러올 수 있는 갈등과 광기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그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강도 높은 비극에 도달합니다.

무서운 작품입니다.

열다섯 번째 책, <대머리 여가수> 중「수업」, 외젠 이오네스코, 프랑스, 1951.






설명이 안 되는 희한한 일의 하나로,
하나의 모순이자 넌센스… 입니다.
-101p中



두 번째 작품 <수업> 역시 <대머리 여가수>의 동일선상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언어에의 공격성을 <대머리 여가수>에서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훨씬 공격적인 작품입니다.






이전 글 #15-1 <대머리 여가수> 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오해합니다.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말이 오가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언어는 모호해지고 언어를 잃은 인물들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생명력을 잃은 인물들, 정말로 그렇습니다. 인물들은 어딘가 넋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영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색으로 치면 일종의 반투명한 빛깔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이렇게 쓴 부분도 있습니다.


인물들은 이러한 과장의 기법에 근거하여 언어를 잃어버렸고, 뿌리가 잘린 식물처럼 서서히 죽어갑니다.


언어와 불화한 인물들은 모국어를 잃어버린 상태, 언어를 상실한 일종의 '고아' 와 같은 상태로써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 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생명력을 잃은 인물들이 등장인물의 지위를 잃고 배경의 일종으로 전락한다면, 그 빈자리를 메우는 존재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생명력을 잃고 존재감이 사라진 인물들 사이, 가장 육중한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 무엇인가……, 인물답지 않은 인물들 사이, 가장 한가운데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것이 무엇인가……, 를 생각해보면 단 하나, 언어밖에 없습니다.

인물들이 빈 자리에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오네스코의 극에서 '언어'는 등장인물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말인즉 '언어' 라는 주인공입니다. 언어는, 그의 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재인 셈인데, 이 주인공은 형체도 없고 말도 없고 무대 위에 직접 나타나지도 않지만, 교수와 학생 그리고 하녀, 이 극에 등장하는 모든 실제적인 인물들을 능가하면서 하나의 관념적인 주인공으로서 작품 전체를 지지합니다.

그것도 아주 유일한 주인공이자 단독적인 주인공으로 말입니다.






'수업'은 교사와 학생,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지식 전달자와 수용자의 관계로 성립되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리고 이때 그 커뮤니케이션을 원리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언어라는 기반입니다.

따라서 '수업' 이라는 장(場)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어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소통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라고, 이오네스코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교수와 학생은 무언가를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관계로 커뮤니케이션을 발생하게 되어 있지만, 그 '무언가' 가 무엇인지를 표현할 유일한 수단인 언어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소통은 무력히 실패하고 좌절됩니다.


따라서 희곡 <수업>에서는, 많은 불성립이 발견됩니다.

소통의 불성립, 대화의 불성립, 교환의 불성립, 의미의 불성립, 합리의 불성립, ……, 말하자면 '수업' 이라는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종 불성립들은 대부분의 독자(혹은 관객)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어떤 그로테스크함을 이끌어내는데, 이것은 (이전 글 #15-1 <대머리 여가수> 에서 말했듯,) 과장의 기법으로 현실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불성립의 집합은 <수업>이라는 제목을 더욱 부조리하게 강조시키며 다시 한 번, 언어가 과연 믿을만한가 하는 격한 항의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복하자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불성립 -소통의 불성립, 대화의 불성립, 교환의 불성립, 의미의 불성립, 합리의 불성립…… 들은, 이 작가가 언어를 해체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믿었던 언어가 낱낱이 해체되어 제 기능을 잃었을 때 발생하는 갈등과 광기를, 이오네스코는 '수업' 이라는 부조리한 장(場)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산산이 조각나버린 언어는 의미를 잃고 일종의 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발음은 그 언어 전체의 가치를 지니죠. 발음이 나쁘면 아주 난처해집니다.
-91p中


작중 교수의 대사입니다.

그는 언어를 인간이 내는 어떤 소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엔 개가 짖는 소리라든가, 올빼미가 우는 소리, 개구리가 내는 소리… 와 같이, 인간 언어 역시 그저 말로 뱉을 때 나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발음할 때 나는 소리만이 언어의 유일한 가치이며, 따라서 발음이 나쁘면 아주 난처해질 수 있다는 작중 교수의 대사는, 언어에 대한 모든 종류의 믿음을 깨 버리면서 우리에게 과격한 공허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이며 또 부조리로 가득한지, 그리고 그것의 사용이 인간에게 어떤 갈등과 광기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지.

<수업>이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이오네스코의 태도는 아주 사납고 공격적입니다.

덕분에 이 극은 아주 노골적인 잔혹성을 띄게 됩니다.






앞서 이 작품을 비롯해 이오네스코의 대부분의 극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언어' 라고 말했습니다.

단독적인 주인공으로서의 언어는, 작가와 관객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유일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 속에서 교수나 학생이 어떻게 되는지보다, '언어'가 어떻게 되는지를, 언어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를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학생이 처참하게 죽습니다. 교수의 보이지 않는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잔혹하고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정말로 죽은 것은 학생이 아니라 언어이고, 이 사건의 진짜 피해자 역시 학생이 아니라 언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우리가 지켜본 것은 '언어'의 살해 현장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인간 언어인 셈입니다.


따라서 <수업>이라는 이 한 편의 지독한 잔혹극에서, 우리가 상정해야 할 유일무이한 피해자는 언어입니다.

언어가 상처를 입고, 그 아우라를 잃어버립니다. 주인공을 고문하는 잔혹극, 언어 파괴의 현장. 이것이 바로 작가의 목적이자 이 작품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평생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이오네스코의 눈에는,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소통하고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일이 정말로 모순처럼 보였을 것 같습니다.


설명이 안 되는 희한한 일의 하나로, 하나의 모순이자 넌센스… 입니다.
-101p中


-라는 대사가 그 심정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어를 잘만 사용하며 살고 있고 이건 그렇게 '희한한 일' 이라거나, '모순' 이라거나, '넌센스' 같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말하자면 실제로 언어가 <대머리 여가수>나 <수업>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최악의 쓸모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이오네스코의 작품들이 가치를 갖는 것은, 그간 한 번도 제기된 적 없는 문제를 문학을 통해 제기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하지 못한 질문을 아무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던졌다는 점입니다.

언어가 이 상태로 완벽하며 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던 순진한 믿음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언어의 약점을 발견하고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야기할 갈등 혹은 광기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이오네스코의 '언어 해체 작업'(혹은 언어 공격)은 놀라운 업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 모든 '언어 해체 작업'의 이면으로, 어쩌면 그가 정말로 언어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사실은 언어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발견이라고, 개인적으로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언어를 정말로 가혹하게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저는 이것이 언어를 '위해' 쓰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수업>을 '언어극' 이라 부르겠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언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쓰인 언어의 극이자, 언어에 의한 극, 언어를 위해 쓰인 극, '언어극'.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언젠가 이 작품 속 언어에 대한 잔혹한 공격이 깊은 애정의 반어로 읽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09.23.21.

instagram : 우리 시대의 책읽기(@toonoisylonelinesss)

naver blog : blog.naver.com/kimhoeyeon

작가의 이전글 언어가 형편없이 몰락한다, 산산이 부서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