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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언어가 형편없이 몰락한다, 산산이 부서진다…….

#15-1. 열다섯 번째 책) 외젠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대머리 여가수>는 일종의 테러에 가깝고 가장 큰 공격의 대상은 언어입니다.

인간 언어의 약점을 파고들며 결국엔 철저히 무너뜨리면서, 잔혹한 방식으로 언어를 고발합니다.

70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새롭습니다.

열다섯 번째 책, <대머리 여가수> 중「대머리 여가수」, 외젠 이오네스코, 프랑스, 1950.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
-58p中



이렇게 오래되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을 리뷰하는 일은 혹시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아닐까, 그래서 약간은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대머리 여가수> 라는 제목으로 엮인 여기 세 편의 희곡들은 이오네스코라는 작가의 가장 선구자적인 작품들입니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수많은 해석과 담론을 이끌어냈기에, 이 작품을 두고 더 이상의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해 꼭 써 보고 싶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을 사람들이 꼭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 그래서 열 다섯 번째 책으로 꼭 이 책을 가져오고 싶었습니다.


<대머리 여가수> · <수업> · <의자>로 이어지는 이오네스코의 작품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학술적인 정설이 이미 존재합니다만, 그런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이미 그에 대한 수많은 학술서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한 독자로서 저의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하는 정도로만 그쳐야겠습니다.

흔히 '반(反)연극', '부조리극'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 세 편의 희곡들을 읽는 일은, 읽고 쓰는 이의 일상에서는 정말로 충격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리도 충격적이었고 놀라웠는지, 그 충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지금부터 한 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야기할 작품 <대머리 여가수>는 1950년에 쓰인 이오네스코의 데뷔작입니다. 70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전위적입니다.


깡총, 웬 깡통, 웬 깡통,
깡통 아니고 깡총, 깡통 아니고 깡총,
깡통 아니고 깡총……
-58p


이 작품에서 인물간 대화의 양상을 살펴보겠습니다. 대략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스미스 : 개한텐 벼룩이 있어요. 개한텐 벼룩이 있어요.

마틴 부인 : 깡총, 깡충, 껑충, 껑청, 껑껑.

스미스 부인 : 우릴 깡통 속에 넣으려고?

마틴 : 황소를 훔치느니 달걀을 낳겠소.

-58p中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폭력성을 감지했다면, 아마도 우리가 제대로 읽은 게 맞을 것입니다.

인물들은 무지해서 소통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만큼 또 무지해서, 그야말로 이중의 무지로 둘러싸인 채, 제각각 고립됩니다.

말과 말이 오가며 대화가 이루어져야 할 자리에, 구멍이 생기고 공백이 남습니다. 튀어나온 말들은 대화로 성립되지 않고 그저 말, 말 뿐인 말, 아무 의미 없는 불완전한 말로 추락합니다.


언어가 심각하게 손상을 입고 붕괴합니다.






이오네스코의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언어를 무너뜨리는 것.


<대머리 여가수>는 아주 단순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주 분명한 의도를 갖고 쓰였으면서, 철저하게 그 의도에 따라 움직이며, 마지막에는 결국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면서 끝납니다.

아무런 서사도, 개연성도, 가장 기초적인 극작의 기본 논리도 없이 시종일관 말장난만 하다가 끝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말장난'의 심각성을 발견하는 순간, 이 작품은 무섭도록 진지해집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쩌면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언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머리 여가수>에서 난무하는 저 말장난들을 보고 있자면, 언어가 과연 믿을만한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아무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오해합니다.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말이 오가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언어는 모호해지고 언어를 잃은 인물들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우리는 인간 언어가 매우 합리적이며 빈틈없이 논리적인, 일종의 인간 이성의 결정체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맹신합니다. 맹신이라는 말이 별로라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오네스코가 해낸 일은 바로 그런 무지에 항의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당연한 믿음을 깨고, 언어가 과연 믿을만한가? 하고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언어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대하여, <대머리 여가수>라는 작품으로 과격하게 항의를 표한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그것이 과장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가진 작은 결함이 이 작품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과대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다, 라는 명제가 언어는 애초부터 불완전하다, 라는 식으로 과장되면서 극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아마도 <대머리 여가수>가 희곡인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극 문학에서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과장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오네스코가 소설이나 다른 형식이 아닌 희곡의 형식을 빌려 온 이유가, '과장'이라는 기법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아주 사소한 결함을 극적인 기법으로 과장한 결과입니다. 표현하자면, 과장이라는 방법론으로 언어의 약점에 일종의 돋보기를 갖다대 주는 일을, 이 작품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의 결점을 잘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대머리 여가수>에서 우리가 감지한 무언의 폭력성은 아마도 이런 부분에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인간 언어의 약점을 파고들어 결국엔 철저히 무너뜨리려는, 이 작품에 짙게 내제되어 있는 '언어 붕괴' 라는 목적성, 잔혹한 방식으로 언어를 고발하는 그 촌철살인의 목적성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이 작품이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분명히 이 작품은 그냥 장난이 아니라 풍자로, 코미디가 아니라 조롱으로 읽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락이 아니라 철학으로 읽힙니다.






고아……
난 고아예요.
-126p, <의자> 中



이오네스코의 작품 속 인물들은 이러한 과장의 기법에 근거하여 언어를 잃어버렸고, 뿌리가 잘린 식물처럼 서서히 죽어갑니다.

언어와 불화한 인물들은 모국어를 잃어버린 상태, 언어를 상실한 일종의 '고아' 와 같은 상태로써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 갑니다.


이오네스코가 평생에 걸쳐 작품화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은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것, 언어의 부조리에 관한 문제였으며, 우리가 <대머리 여가수>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소통의 불가능성과 언어가 붕괴할 때의 그 처참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하나의 테러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앞서 '이 세 편의 희곡들을 읽는 일이, 읽고 쓰는 이의 일상에서는 정말로 충격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제 왜 그러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란, 그리고 독자란, (혹은 그 둘 다인 사람이란), 누구보다도 언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일 텐데, 읽고 쓰는 이에게 '언어가 과연 믿을만한가' 라는 질문은 거의 모욕적이거나 혹은 이단적으로 들립니다.

언어 위에 서서,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대머리 여가수>와 이오네스코의 다른 희곡 작품들은, 엄청난 반역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읽어도 될까, 이렇게 말해도 될까, 혹은 이렇게 써도 될까… 하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덕분에 이 작품을 읽은 우리는 이제 생각에 빠집니다. 충격을 받고 일상에서 깨어나며, 단조에서 탈피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작품을 '반(反)연극' 이라 부르겠습니다. 일상을 깨뜨리는 연극, 현실에서 탈피하는 연극, 반대로 가는 연극, 스스로 연극임을 거부하는 연극이자 흐름을 거슬러 올라는 연극,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혁명의 연극이면서 반역의 연극. 그런 의미로서 이 작품을 '반(反)연극' 이라 부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비롯한 이오네스코의 희곡들은 말그대로 시대를 앞선 작품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책을 펼쳐 보아도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09.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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