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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끝나지 않는 죽음과 고통의 시

#19. 열아홉 번째 책) 천 희란, <자동 피아노>


읽는 내내 한 편의 길게 쓰인 시를 읽는다고 느꼈습니다.

죽음과 고통의 시. 그리고 자동 피아노처럼 끝나지 않는 연주.

이 시는 영원히 반복되므로, 갇혔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열아홉 번째 책, <자동 피아노>, 천 희란, 한국, 2019.






나는 지금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장 아메리, <자유죽음>



몇 년 전, 스스로 죽음의 코앞까지 다가갔던 이 작가는, 자신이 직접 보고 온 죽음의 풍경을 한 편의 시로 증언해 냅니다.

매일, 매 시간, 매 순간 죽고 싶다고 느끼며 십여년이 넘는 나날 동안 자살사고에 시달려 왔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말을 읽다 보면, 죽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하며 정말로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아득함은 무엇이고 또 어디서 오는 걸까요. 아마 이것은 우리 중 누구도 죽어본 적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죽음만큼이나 영원한 미스테리인 것은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한 이 작가는, 아마도 우리들 중 가장 죽음에 가까이 갔다 온 사람일 것만 같습니다.

그녀는 원인 모를 어떤 이유로 인해 극심한 불안과 죽음 충동에 사로잡혔고, 그런 삶에 익숙해지자, 그때부터는 '불안과 충동이 그 자체로 나 자신인 것만 같았다.(142p)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작가가 '글쓰기'라는 동력으로 끝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글쓰기야말로 '혹독한 삶 속에서 내가 나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145p)' 라고 설명하는 이 작가는, 쓰는 행위를 통해 죽음의 코앞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그녀는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죽음을 가장 자세히 살펴보고 온 사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기록입니다.


<자동 피아노>라는 이 죽음의 기행문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믿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고, 과장되어 있거나 꾸며져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를 설득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죽음이란 어떠한 의견이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기 때문에, 설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증언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 <자동 피아노>는 전혀 소설로 읽히지 않습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에세이에 가깝다고 해야겠으나, 저는 왠지 이 작품이 시처럼 느껴집니다. 죽음에 대하여 절규에 가깝게 노래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의 노래, 혹은 하나의 연주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노래라는 것이 끝나지 않는 영원한 돌림노래와 같아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 순환되고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여전히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이 있고, 어쩌면 죽음은 그에게만 유일하게 목격되었습니다.

그 목격자는 글쓰기를 통해 살아남았고, 이제 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보고 온 죽음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제 그녀가 증언할 차례입니다.






증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



맞는 말입니다. 죽음과 글쓰기 사이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유사점이 있다면, 반드시 혼자서 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은 작가가 첫 문장으로 '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라고 쓴 것은, 아주 당연하고 또 적절한 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 작가가 죽음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죽음의 극복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 쓰다 보면 죽지 않게 되리라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글로 써서 남기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믿음, 이 글쓰기가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믿음 같은 것 말입니다.

확실한 건, 글을 쓰는 동안은 살아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죽음. 그래, 죽음이다.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17p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죽음만이 죽음을 이겨낼 수 있다는 듯이, 죽음에 대해 쓰다 보면 죽음이 물러날 테니, 죽음의 이야기로 죽음에 대항하겠다는 듯이.


그러므로 이 시(혹은 노래 혹은 연주)의 첫번째 절(節)은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며, 죽음이 이 작가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했으므로, '죽음'을 이 시의 제 1절이라 하겠습니다.






1. 죽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작가는 죽지 않기 위해 죽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녀가 본 죽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 라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조리 써내려가려 합니다.


죽음은 언제나 바깥에 있다. (…) 어쩌면 지금 여기는 죽음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의 세계.
-16~17p


하지만 그러기 위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통'입니다.






2. 고통)


고통과 죽음은 서로 다르게 발음되는 두 동의어라 여겨질 정도로 떼어내기 힘든 관계입니다. 고통은 쉽게 죽음으로 연결되고, 반대로 죽음 역시 너무나 많은 고통으로 파생되고…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 작가에게 고통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자 피해서도 안 되는 것,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시작한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고통에 대한 이야기로 치닫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절입니다. 제 2절, '고통'.

'죽음'에서 '고통'으로 이어지는, 상승인지 하강인지 알 수 없는 이 휩쓸림에서, 이 작가는 다시 한 번 괴로워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알려지지 않았다. (…)
그때 고통은 의미 없음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의미이다. 지독한 의미이다.
-32p


너무 많은 고통 속에서, 고통의 너무 많은 의미 속에서, 고통에 대해 씁니다, 고통받으면서…….


고통은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장악할 뿐이다.
고통은 그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 고통의 관점으로.
-33p


이제 죽음에 대해 쓰려던 이 작가의 작업은 고통에 대해 쓰는 작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쓰면 쓸수록, 말은 자주 모순되고 충돌합니다. 문장들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죽음에 대해, 그리고 고통에 대해 쓰고 있지만 텍스트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공허하기만 합니다. 텅 빈 문장들이 무의미하게 지면을 채워나갈 뿐입니다.


이런 문제를 작가 본인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써내려가는 대부분의 문장들이 서로 어긋나 있고 말의 아귀가 맞지 않으며, 혼란스럽고 모호하다는 것을, 작가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제 3절은 '언어'입니다.






3. 언어)


고통을 문장으로 바꾸어 적을 때, 이 행위를 일종의 번역이라고 본다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손실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언어는 무언가를 표현하기에 효과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결코 '완벽한' 수단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언어란 2차 가공입니다. '돌'에 대해 쓴다고 해 보겠습니다. 어떤 표현을 동원하더라도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그 '돌'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사려 깊게 쓴다 해도, 쓰는 순간 원래의 것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 어떤 것도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될 수는 없으며, 쓴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훼손인 셈입니다.


'고통'은 특히나 그렇습니다. 고통이 우리의 언어로 번역될 때, 반드시 치명적인 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원래의 것과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언어로 표현된 고통은 이미 우리가 아는 고통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오감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내면적/정서적으로, 각종 방식으로 체감해 오던 '고통' 은, 그것을 언어로 변환하는 그 순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는 것입니다.


번역이라는 표현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최선의 번역만이 있을 뿐, 완벽한 번역이란 없습니다. 번역되는 순간,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고통을 글로 쓰는 순간, 그것은 우리가 아는 '진짜 고통' 과는 이미 다른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해, 죽음에 대해 쓰겠다던 이 작가의 의지는 그렇게 좌절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나의 죽음의 관하여.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나는 정작 내 머릿속을 차지한 것들에 대해서는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109p


결국 그렇게 많은 문장들을 쏟아내고도, 이 작가는 죽음에 대해서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지금껏 스스로 써온 죽음에 관한 모든 문장들이,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죽음과 차갑게 무관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죽음과 고통을 언어로 옮기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내가 없다. ……
-109p


자신이 보고 온 죽음의 풍경을 언어로 재현해내겠다는 이 작가의 의지, 이 작가가 살기 위해 품었던 그 의지는, 언어라는 피할 길 없는 한계에 부딪히며 무너집니다.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설명할 수 없는 고통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내게 고통이 되어 돌아온다. 그런 내가 무엇이든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면, 나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외에 무엇을 쓸 수 있겠는가.
-96p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또 한 번의 고통.

이러한 이중의 고통 속에서 이 작가는 다시금 죽음을 떠올립니다, '죽고 싶어'집니다.


결국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죽음→고통→언어로 이어져 왔던 흐름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죽음→고통→언어→죽음→고통→언어→죽음……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순환 고리를 만들며 영원히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제 4절은 없습니다. 대신 이 시는 무한한 도돌이표처럼 계속해서 다시 1절 '죽음'으로 돌아갑니다.






4. 순환)


앞에서 왠지 이 작품이 시처럼 느껴진다고, 죽음에 대하여 절규에 가깝게 노래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하나의 노래, 혹은 하나의 연주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라는 것이 끝나지 않는 영원한 돌림노래와 같아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 순환되고 영원히 반복된다고도 말했습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치 영원히 반복/재생되는 자동 피아노처럼, 절대로 끝나지 않는 연주를 합니다.

어느 날 이 작가에게 죽음이 찾아왔고, 그녀는 죽지 않기 위해 죽음에 대해 쓰려 합니다. →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고통들과 맞서면서, → 자신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려 하지만 언제나 한계에 부딪힙니다. → 이 실패와 좌절은 다시 죽음을 불러 일으키고, 작가는 다시금, 죽지 않기 위해 죽음에 대해 쓰려 합니다. → …….

<자동 피아노>는 1)죽음, 2)고통, 3)언어라는 세 개의 절로 이루어진 장시(長詩)고, 이 세 개의 절은 영원히 순환되며 돌고 돕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이 굴레에 영원히 갇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를 상상한다.
그리고 곧, 다시
내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16p


증언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는 내가 언제 여기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다."



맞는 말입니다. 한 번 이 순환 속에 갇힌 사람은 그 전의 삶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자동 피아노는 전원 코드를 뽑지 않는 한, 영원히 같은 연주를 반복할 것입니다. 코드가 꼽혀 전원이 들어오고 있는 이상, 이 연주는 무한히 계속될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전원 코드를 뽑아 버리면 갑자기 연주가 뚝 끊기며 멈출 텐데, 혹시나 이것이 이 순환 속에서 작가가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어두운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늘 죽고 싶다고 생각하며 죽음만을 유일한 미래로 여겨오던 이 작가가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바로 이 지독한 굴레 덕분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언어라는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계속 쓰려고 하기 때문에, 이 작가는 계속해서 살아 남습니다. 즉, 쓴다는 행위가 이 작가를 살려 냅니다.

앞에서 제가 썼던 말대로, 확실한 건, 글을 쓰는 동안은 살아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고통→언어의 순환에 영원히 갇히더라도 이것이 마냥 비극이라고만 생각될 수 없는 이유는, 이 덕분에 작가가 계속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끝나지 않는 순환 속에서, 작가는 삶을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자동 피아노처럼 늘 같은 음악 안에 갇히더라도, 이 작가에게는 그것보다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찌 보면, 이 순환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 때문에 이 작가 역시 삶을 끝내지 않고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 시가 제 1절 '죽음'이라는 원점을 향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순환을 죽음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생명으로의 회귀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이 순환은 끝없이 죽음으로 돌아가며 고통이 반복되는, '죽음'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아마도 이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순환은 결코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삶은 이 순환 덕분에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므로, 그녀가 이렇게 쓰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내가 쓴 소설 대부분이 죽음을 향한 충동과 살고 싶다는 구조 요청을 동반하고 있었음을 더는 감추고 싶지 않다. (…)

<자동 피아노>는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증상이었다.

-137~139p,<작가의 말>中



이렇게 <자동 피아노>라는 '증상'을 지켜보며 각자의 안에 너무나 많은 감정이 오고갔으리라 생각합니다.


천 희란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죽음이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 이 작가에게 죽음이란 중요한 주제이겠거니 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이 작가의 거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글을 쓰는 목적이 자신의 죽음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읽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죽음과 고통과 언어로 이루어지는 어떤 거대한 순환에 갇힌 한 인간의 '살아남기'를 보여 줍니다. 아니, 이 작품은 이미 '살아남음' 그 자체입니다.





1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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