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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그저 읽기만 했을 뿐인데 어딘가 환기된다는 느낌.

#18. 열여덟 번째 책) 조 예은, <칵테일, 러브, 좀비>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무작정 읽힌다기보다는 '발견'되는 이야기에 가깝고,

덕분에 분명 우리 안에 있었지만 그간 모르고 있던 것들을 비로소 끄집어낼 수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로 이루어지는 감정적 성찰이라 하겠습니다.

열여덟 번째 책, <칵테일, 러브, 좀비>, 조 예은, 한국, 2020.






내 목에는 17년째 가시가 걸려 있다.
-7p,<초대>中



발칙한 상상력이라 해야 할까요. 어딘가 음습하면서 기분 나쁜, 축축하고 끈적이는, 불쾌하면서 서늘한 이야기들입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네 편의 작품들 속에는 각기 다른 네 가지 감정들이 하나씩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공포' 혹은 '슬픔' 혹은 '기쁨'.


-이렇게 어떤 단어 하나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란 사실 많지 않습니다. 감정은 하나의 단어로 정의되기에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감정을 '슬픔' 이라고 간단하게 불러 버리는 순간, 그 감정은 슬픔이라는 말로 단순화되고 규범화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심각한 훼손입니다.


그래서 어떤 감정들은 단어로 정의되는 대신, 이야기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소설가의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작업, 우리 삶 주위에서 언어로 명백하게 표현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미지의 감정들을 낚아채어, 단어가 아니라 이야기로 정의내리는 일일 것입니다.


이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단편들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읽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느끼는 무한히 많은 감정들 중 하나를 소설 속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 동안 그런 감정들을 '슬픔'이라던가 '기쁨'과 같은 단순한 단어들로 불러 왔다면,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단순하고 국지적인 단어들 속에 갇힌 감정을 해방시켜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슬픔'은 단순히 슬픔일 뿐 아니라 다른 무엇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 역시 두려움일 뿐 아니라 다른 무엇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 번째 수록작 <칵테일, 러브, 좀비>에서 좀비가 된 아빠를 거실 의자에 묶어 두고 괴로워하는 모녀의 감정은, '슬픔'이라는 단어로도, '두려움'이라는 단어로도 마땅히 표현될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은 오로지, <칵테일, 러브, 좀비>라는 하나의 이야기로만 설명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무작정 읽힌다기보다는 '발견'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나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든 모호하고 기묘한 감정들 사이를 수 차례 넘나들었다면, 아마도 우리가 작가의 의도대로 이 이야기를 잘 읽어낸, 아니 잘 발견해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책의 네 단편 속 감정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초대>


자신의 목에 17년째 커다란 가시가 걸려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 첫 문장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읽는 이에게 어떤 찝찝한 이물감을 선사합니다.

잔혹하고 불쾌한 장면을 묘사하는 데 서슴지 않는 이 작품은 그 대범함에 있어 어느 정도냐 하면,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입니다.


콰직, 칼날이 단단한 것을 으깨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뜨끈한 핏물이 튀었다.
나는 대가리가 잘린 횟감처럼 고개를 젖히고 죽은 정현을 응시했다.
-39p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운 상황 속으로 독자들을 몰아 넣으며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 줍니다.

아마도 이 작품을 깊이 몰입해 읽은 독자라면, 읽는 내내 정말로 자신의 목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길고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듯한 저릿한 이물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2. <습지의 사랑>


물귀신과 숲귀신의 순박하고 아이같은 사랑을 그린, 순박하며 아이다운 소설입니다.


생에 대한 미련과 분노를 드러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44p


우선 이 소설은 단순하게 어떤 사랑과 그 사랑을 방해하는 자들의 대립 구도로 읽힐 수 있는데, 그 사이에 윤리적인 잣대를 놓음으로써 '사랑-윤리' 라는 두 개념의 연대를 만들어내려는 듯 보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윤리를 위협하는 비윤리로부터 그 사랑을 지켜내는 윤리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사랑을 수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자연이라는 어떤 마법적인 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다소 아쉽기도 합니다.






3. <칵테일, 러브, 좀비>


표제작인 <칵테일, 러브, 좀비>는 가족 서사라는 장르적인 장점을 잘 살린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족 구성원 간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동정과 애정을 넘나드는, 연민과 증오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감정을 이야기로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이럴까? 증오 없이 사랑만 하는 가족 따위는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건 다 가식이다. 적당한 가식이 세상을 유지시킨다는 걸 안다.
-44p


어느 날 아빠가 갑자기 좀비로 변한다면? 이라는 유치한 발상이 하나도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세련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4.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마지막 작품으로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기는 소설입니다. 아주 잘 짜인 스릴러식의 구조가 인상 깊고, 오로지 서사만으로도 큰 충격을 주는 작품입니다.


내가 더 빨리 집에 왔다면 달라졌을까?
-113p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고 절대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라는 운명론적인 비극을 주제로, 역시나 이 작가의 장기 중 하나인 가족 서사를 놀라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지, 깔깔깔." 이라는 악마의 마지막 대사를 읽는 일은 총체적인 무기력과 좌절을 느끼게 합니다.

네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섬뜩하고 무서운 작품이자 짜임새 높고 치밀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네 편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 단편들에서 어떤 감정을 발견할 것인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런 소설들을 읽다 보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있어 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지만 특히나 이 책 <칵테일, 러브, 좀비>는, 결국엔 이것을 읽는 우리들이 완성시킨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10.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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