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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타인이라는 악취

#17. 열일곱 번째 책) 구 병모, <네 이웃의 식탁>


공동체라는 폭력과 타인이라는 지옥,

협동이라는 굴레와 사람이라는 공포,

관심이라는 허위와 이웃이라는 악취.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

열일곱 번째 책, <네 이웃의 식탁>, 구 병모, 한국, 2018.






극과 극의 냄새 두 종류가 뒤섞여
더욱 기묘한 악취를 풍겼다.
-160p中



이 가혹하고 매정한 소설. 전체 스토리는 단순합니다.

나라에서 젊은 부부를 대상으로 지방의 한 소도시에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을 건립합니다. 입주 자격으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명의 자녀를 낳겠다는 자필 동의서. 최종적으로 이곳에는 열두 가족이 입주할 수 있으며 이들은 이 공동주택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공동으로 생활하고 공동으로 육아하며 함께 살아갑니다.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은,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한 이들이 공동체가 개인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지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는 점에서부터입니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이름은 뭔가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여놓은 것 같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 단어 하나하나에 얼마나 절실한 무게감이 실리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게감이란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진짜 현실' 이라는 가혹함에서 비롯됩니다.

이제부터 이 무거운 단어들을 가지고 <네 이웃의 식탁>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꿈

- 잃어버린 것.


모두에게 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꿈이 있습니다.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어떤 인물이든 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삶의 포인트가 아이에게 맞춰지면서 원래 꿈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즉 자녀를 가진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개인은 불가피하게 묵살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라는 공동체 내의 역할이 지워지면서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자신의 꿈과 함께 조용히 묻히게 되는 것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시간을 보내는 데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면서 체세포의 수를 착실히 불리는 거야말로 어린이의 일이었다. 그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일은, 주로 시간을 견디는 데 있었다. 시간을 견디어서 흘려보내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일. 그곳에 펼쳐진 어린이가 또다시 새로운 형태 모를 선을 긋고 예기치 못한 색을 칠하도록 독려하기.
그러는 동안 자신의 존재는 날마다 조금씩 밑그림으로 위치 지어지고 끝내는 지우개로 지워지더라도.
-67p


결국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이러한 점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일이며, 자신의 존재가 밑그림이 되고 끝내는 지우개로 지워지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일입니다.


시도때도 없이 우는 다림이를 달래면서 동화책 화가로 일하느라 또 매일 밤을 새워야 하는 효내에 대한 (30~47페이지에 걸친) 자세한 묘사는 아이를 낳는 일이란 한 사람에게 얼마나 거대한 부담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 와중에 입주자 본인의 손으로 자필 서약한 '입주 기간 동안 세 명의 자녀를 낳겠다'는 약속은 어찌 보면 거의 폭력의 행사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물론 사랑의 결실이겠지만 그것이 불가피하게 약간의 희생과 약간의 포기와 약간의 타협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개인에게는 얼마간 폭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런 곳에서 꿈이란, 얼마나 가혹한 단어입니까.






2. 미래

- 이미 정해진 것.


이들에게 미래란 반쯤은 이미 정해진 무엇입니다.

'정해진 미래'.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행복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미래를 알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쉽게 예상 가능한 일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정해진 미래란 두 가지 양상으로 펼쳐지기 마련인데 먼저,


기회가 닿으면 아이들이 탈 만한 정원용 그네 또는 미니 미끄럼틀 같은 것이나 좀 들여놓으면 될 터였다. 어차피 아이들이 많아질 곳이므로. 볕 좋은 날 각 집에서 버너라도 내놓고 바비큐 파티를 하면 좋겠다는 그림이 여자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
-191p


-와 같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점철되는 미래가 있는 반면,


다림이가 유아 의자에서 팔을 뻗으며 제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금 뒤에는 울음을 터뜨릴 테고, 엎어지기 전에 저 죽 그릇부터 치워야 한다. 퇴근 시간 전까지 스케치 컨펌은 불가능하겠지. 역시 내일 아침을 기약하고 밤샘 예약이다.
-31p


-처럼 불안하고 힘에 부친 나날들 역시 예고되어 있습니다.

전자가 보상이고 후자가 이에 따르는 책임이라고 간단하게 말해 버린다면, 그 둘 사이 균형이 무너졌을 때 -특히 보상에 비해 책임이 너무 가혹하다고 여겨질 경우에는-, 결혼과 가정 생활의 미래란 비극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서로 남의 아이를 맡아 키우고, 남의 아이가 먹을 음식을 차리고, 남의 아이와 놀아 주며 그 과정에서 남의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공동의 육아에서, 그들은 정해진 미래가 제공하는 보상과 그에 따른 책임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조금 격하게 말하자면,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하는 순간 그들의 미래는 벌써 정해진 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고, 현재의 선택은 그 예정된 미래를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해서만 유효합니다. 그곳에서 미래에 대한 결정권은 대부분 상실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미래에 자신의 모습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은오와 요진네 가족처럼 도망칠 것인지.

이들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사안은 오직 이 둘 뿐입니다.






3. 실험

- 거부할 수 없는 것.


이 작가는 하나의 실험으로써 <네 이웃의 식탁>을 썼을 것만 같습니다.

많은 인물들을 한 곳에 몰아 놓고 거대한 이웃 공동체를 형성하게 했을 때, 한 개인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랄까요.


실험 공동주택. 이곳의 입주민들은 좋은 조건 -압도적으로 저렴한 집값, 자연과 가까운 환경,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 같은 것들에 설득당해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공동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이며, 자진해서 실험체가 되기로 결정한 이들입니다.

공동육아와 이웃 공동체라는 일종의 실험실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녀와 가족, 각자의 인생을 걸고 실험합니다, 혹은 실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타인과 함께 생활할 때 발생하는 수많은 인간관계 속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의 실험적 시뮬레이션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주택에서 생활하면서 피실험자들은 각자 불가피하게 충돌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작가는 해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21페이지에서 47페이지에 걸쳐 아주 길게 묘사된 홍단희와 조효내 간의 대립은 각 인물들 사이의 어쩔 수 없는 시점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모든 인물들은 서로 다르고, 각자의 사정이 있으며 다른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상의 대립으로 서로 맞부딛히는 일은 개인에게 크고작은 생채기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은 바로 그 점에 대한 탐구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개인이 공동체가 될 때 필연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상처에 대해 이 작가가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인데, 그 여러 각도란 이를테면 내(內)/외(外)의 관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효내와 단희 간에 발생하는 갈등은 두 인물에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상을 안깁니다. 요진과 재강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불편함 혹은 은오와 단희 사이에 발생하는 모종의 껄끄러움 역시 인물들이 즉각 알아차리기 힘든 내상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상이 인물들의 내면을 조금씩 파괴하다 끝내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작품으로 말하자면 갈등이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이 되면, 이 상처들은 끔찍한 외상이 되어 모두에게 드러납니다. 요진이 공동주택을 떠난 일, 떠나기 전에 정목이네 집 현관 고리에다 걸어 두고 간 쇼핑백 속 물건 같은 것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외상의 흔적입니다.


이 모든 내적/외적인 상처들은 (이 실험의 결과에 의거해 말하면) 다소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같이 산다는 건, 애초부터 비극이었으리라는 무기력의 주조가 작품 전체에 퍼져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 모든 상처뿐인 결말이 인간의 본성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기원한다면, 이 작품 <네 이웃의 식탁>이 인간 본성에 내제된 악성에 대한 실험적 증명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이 실험이 필연적으로 비극에 도달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험 대상자인 그들은 이 비극적 결말에 대해 항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고, 그것을 거부할 방법은 없습니다.

실험장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 외에는요.






4. 공동

- 나를 제외한 모든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공동'.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웬만한 소음은 배경음악으로, 어수선한 광경은 손 닿지 않는 액자 속 풍경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10p


'공동'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화자의 말마따나 소음을 당연한 배경음악 쯤으로 여기는 것.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공동이라는 말은 무던해진다는 말과 동의어인 셈입니다. 개인의 예민함과 명징함을 잃고 공동체의 일부로서 뭉툭해지는 것, 무난하고 원만한 사람이 되는 것, 늘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공동'을 이해하고, '공동'을 실천하기에 개인의 존재는 너무나 유약하기만 합니다.

공동체가 집채만한 몸을 이끌고 거칠게 움직이는 반면, 개인은 작고 연약합니다. 공동체라는 한 마리 거대한 곰 옆에 개인이라는 신생아를 놓아 둔다고 생각해 봅시다.공동체의 작은 움직임에도 개인은 상처입기 쉽습니다. 뒷걸음질 치다 실수로 밟는다면? 공동체의 아주 사소한 실수도 개인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작가가 이와 같은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지시키려 했던 점일 것입니다. 공동체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그 미묘한 폭력 말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는 어떤 미묘한 선 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관심이 참견이 되거나 나눔이 계산이 되기도 하는 등, 이웃은 쉽게 공포가 되고 굴레가 될 수 있습니다.

애초에 '공동'이란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이 성립되는 즉시, 공동은 개인을 억압한다는 아이러니.


개개인이 모여 공동이 되지만, 잘 들여다보면 공동 속에 개인은 없습니다.


…… 그럼에도 눈앞의 식탁은 이 주택에서 제일 오래갈 듯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향후 몇 가구가 들고 나든지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것만 같은, 이웃 간의 따뜻한 나눔과 건전한 섭생의 결정체처럼.
-191p


덕분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원목 식탁은 이 작품에서 아주 탁월한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위치도 애매하고, 자리를 많이 차지하며 그 쓰임새도 불분명하지만 강력한 존재감으로 공간을 거의 지배하다시피하면서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식탁은 대화의 장이자 모임의 장소, 모든 이웃들을 하나로 모으는 공동체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뒤뜰의 이 거대한 식탁을 상상하면서 우리가 쉽게 기괴함 혹은 다소간의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탓입니다.

우리 존재가 집단 속에 집어삼켜질지 모른다는 불안……. 공동체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런 불안과 꺼림칙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이런 소설을 읽은 것입니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입주민들은 1)잃어버린 것으로서의 꿈과 2)이미 정해진 것으로서의 미래를 짐처럼 어께에 얹은 채, 3)거부할 수 없는 비극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끝내, 4)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서의 '공동'에 좌절합니다.

<네 이웃의 식탁>은 이 모든 것들을 적절하게 버무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을 창조하고, 섬뜩하고 서늘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포괄할 단 하나의 단어를 찾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 이야기를 다 읽은 분들께 가혹한 질문 하나를 해 보겠습니다.



-"무엇이 현실입니까?"






5. 현실

- 믿고 싶지 않은 것.


이 소설을 다 읽은 뒤에 다시 맨 처음, 제목으로 돌아오게 되면 ' 이웃의 식탁' 이라는 2인칭의 문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 라는 인칭대명사는 화자가 이 글을 읽는 우리를 가리키는 표현이며, '네 식탁' 이라 말하면 그것은 곧 이 글을 읽는 '우리의 식탁'이 됩니다.

<네 이웃의 식탁>. -이 표현으로 인해 순식간에 이 이야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일로 읽힙니다.


그래 봤자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남들 이야기였지만, 아니 어쩌면 남들 이야기였기 때문에 여자는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니 사람 사는 데가 어디나 똑같기란 여지없다고 실소하며.
-190p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독자들 중 누구라도, 이것이 그저 '얼굴도 모르는 남들 이야기'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서 벌어지는 일은 믿기 힘든 기상천외한 사건도, 흔하지 않은 유별난 사건도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픽션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보통의 현실에 다름없으며 가장 보통의 우리들이자 가장 보통의 현실입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보여 주는 것은 '진짜 현실' 인 것입니다.


그동안 소설을 '현실에 있을 법하지만 실제는 아닌 가상의 이야기' 라고 정의해왔다면, 이 작품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실제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엄연히 현실인 이야기' 입니다.

비교하자면, 기존의 소설을 두고 '현실임직한 비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은 '비현실임직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네 이웃의 식탁>은 우리가 사실로 믿을 수 있을 만한 가상의 픽션을 꾸며내 보여주는 게 아니라, 결코 믿고 싶지 않은 비현실적인 현실을 차갑게 제시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어 보입니다. 이 작가가 바라보는 '진짜 현실'의 모습이 너무도 차갑고 냉혹하기에, 이 작품 역시 잔인하고 가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연한 현실의 모습이라면, 비록 절망적이고 불편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설물의 냄새, 정확히는 아무리 매일같이 물로 씻어 내도 완전히 지울 수 없으며 그대로 그 공간의 주인이 되어 버린, 축사 그 자체의 냄새였다.
-160p


작품 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악취' 의 존재는 현실에서 어떤 폭력을 감지한 인물이 느끼는 환각의 일종으로 보이며 이는 곧 말하자면 현실의 악취, 혹은 악취 나는 현실이라는 메타포입니다.

화자가 이 공동주택이 얼마나 악취로 가득한 곳인지를 강변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실에서 그 악취의 근원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무엇이 현실입니까?" 하고 물었고 이 작가는 <네 이웃의 식탁>이라는 소설로 그에 답했습니다. 질문이 가혹했던 만큼 대답도 가혹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 소설은 차갑게 날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하고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날카로움과 대면해야 합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었다기보다 견뎌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문장은 김 찬자 교수의 저서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읽기 -존재와 그 부조리한 일상의 풍경>에서 빌려 왔습니다.





1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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