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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Feb 06. 2022

난해해서 무해한 놀이

#38. 서른여덟 번째 책) 문 보영, <책기둥>


읽기란 노동이다,라는 말을 어디서 처음 읽었더라.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이 문장에 유달리 공감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어렵고 난해한 시를 읽을 때가 특히 그렇다. 시도 소설도 언제나 해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당연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작품이 해석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그 시는(혹은 소설은) 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날 함부로 규정하지 마, 라고 강변하는 것만 같다. 이처럼 해석에 적대적인 작품들을 만나면, 그때부터 독서는 '감상'이 아니라 '연구'의 일종이 되어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울고 웃는 일이 중요하던 독서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중요해진 독서로 바뀌는 것. 우리의 '읽기'는 이렇게 진지해진다. 아주 진지한 노동이 된다.

그런 진지함으로 문보영 시인의 <책기둥>을 읽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바로 그 '진지함'이 문제였다……. 문보영의 모든 시는 내게 해석의 대상이어서, 이 시집의 난해함을 돌파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오로지 성실한 노동뿐이라 믿고,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이해를 궁리하기에 바빴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도서관은 언제나/오후 1시이거나 오후 3시이며/오후 1시와 오후 3시답게/진정성이 없다
-61p, <역사와 신의 손>中


<책기둥>은 이런 문장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면 사실 못할 것도 없지만,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억지'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시집을 두 번 읽고 나서야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 해석하지 말기.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을 이해가 안 되는 채로 놔두는 일 말이다. 해석의 의무감에 빠진 '노동자'들은 이 일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러나 이 작가의 다른 작품 <하품의 언덕>(알마, 2021)을 읽어 보면 힌트가 될 만한 문장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보다 세상을 지어내는 게 더 편했던 거야." 이 의미심장한 말이 일러 주는 것은, 그녀가 왜 시를 쓰는가와 관련 있다. <책기둥>의 첫 페이지를 펴니 이런 문장이 보인다.


콘페니우르겐의 임신 기간은/사십 년으로/ 지구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콘페니우르겐의 평균 수명이/이십칠 년인 것은/하나의 수수께끼다
-<책기둥> 첫머리에


이 짧은 글에서 그녀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요컨대 이런 것들이다. 현실의 부조리함, 이상한 세계, 아이러니, 수수께끼와 역설, … 한마디로 세상이 너무도 이상해서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것이 놀라운 게 아니다. 같은 지적을 한 시인들이 이미 많이 있다. 다만 문보영 시인의 개성은 이 같은 오래된 질문에 누구도 시도해 본 바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독특한 방식이란 위에 인용한 그녀의 말이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을 이해할 바에는 차라리 세상을 지어내겠다는, 그 말.

왜 시를 쓰는가. 시인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시인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 대답 중에는 겹치는 것들이 많겠지만, 문보영 시인의 대답만큼은 어쩐지 유일할 것만 같다. 세상을 지어내는 한 방편으로서의 시라니. 이 같은 내용을 훨씬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이 있어 아래에 옮긴다. 시인 문보영의 <책기둥>에 대하여, 박상수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지구는 계속 돌아야 하고 이야기는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현실이 있고 그다음에 시가 있는 게 아니라 시가 먼저 발명되어야 현실이 생긴다'라고.
-184p, <기기묘묘 나라의 명랑 스토리텔러> -박상수


그렇다. 이 말에 따르면, 시는 현실을 조달한다. 그리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하고 비정한 세상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말하자면 문보영의 시는 현실로부터 탄생한 시가 아니고, 새로운 현실을 탄생시킬 시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는 신(<오리털파카신>), 신의 부하들이 나누어 주는 코스트코 빵(<입장모독>),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리면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까 봐 책을 읽지 않는 사람(<호신>),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뇌(<뇌와 나>), … 이런 세계가 그녀의 시에 있다. 논리도 설명도 필요 없는 감각의 세계이자 시적 판타지의 세계. 그렇게 현실이 새롭게 창조되고, 그 안으로 그녀가 피신한다. 시 속으로 숨는 것.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시가 또 다른 현실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창조'와 '현실 이동'의 일환이다. 그녀는 시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지어내고, 그녀가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 세상은 문학적 '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그녀의 '현실'로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문보영의 문학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컨대 이런 의미이다. 이해 안 되는 세상을 이해하지 않고도 살아가기 위해 그녀가 시를 쓴다면, 이제 그 시를 읽는 우리들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말인즉 문보영의 난해한 시들을, 그렇게 난해한 채로 남겨 두자는 뜻이다.

진지한 노동으로서의 독서는 그녀의 시집 앞에서 쉽게 무력해진다. 설명되는 것들보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은 그녀의 시를 두고, 당신이 그저 '난해하다'는 간단한 말로 모든 것을 작품 탓으로 돌리는 데서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 번 이렇게 읽어보는 건 어떨까. 해석하려 할 것이 아니라 경험하려 할 것, 분석에 공들일 것이 아니라 감각에 집중할 것, 의미의 발견이 될 것이 아니라 무의미의 감상이 될 것. 다시 말해 그녀의 시를 읽는 일이, '노동'이 아니라 '유희'일 것. 이 대목에서 한 번 더, 박상수 평론가를 인용하자.


그녀의 작품에서 신은 세계에 입장하는 이들에게 "코스트코 빵"(<입장모독>)을 나눠 주는 존재일 뿐이다. '신'과 '코스트코 빵'이라니! 신화와 일상, 최대의 관념과 가장 사소한 물건을 결합시키는 이와 같은 상상력은 어쩐지 진지함의 기운을 빼놓으려는 명랑의 습격처럼 느껴진다.
-178p


같은 뉘앙스를 이번에도 그는 '명랑함'이라는, 훨씬 정확한 단어로 설명해 주었다. 내가 '노동으로서의 읽기'/'유희로서의 읽기'의 대비로 구분한 것을, 그는 '엄숙과 진지함'/'사소함과 명랑함'의 대비로 구분했다. 둘을 합치면 이런 표현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시 쓰기라는, 명랑한 유희'. 이렇게 '성실한 노동'으로서 읽는 게 아니라 '명랑한 유희'로서 읽기 시작하면, 시는 무해해진다. 누구도 이 난해한 시를 읽느라 골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무용하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시에 대한 오래된 어떤 믿음처럼, 이 시들은 난해한 게 아니라 무해하다. 아니, 난해하므로 무해한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 시집을 두고 '해석하지 말기' 운운해놓고서는, <책기둥>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나 길게 써 놓았다며 따질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변명하자면, 나의 해석은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해석이다. 해석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해석의 가능성이었다. 내겐 문보영 시인의 <책기둥>에 관해서라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한 가지 예시로 마무리하자. 이 시집의 표제작인 <책기둥>에서 일부 옮긴다.


(…)
서가에는 책만이 있다. 책은 기둥 모양으로 쌓여 있다. 그 주변을 난쟁이들이 서성인다. 난쟁이들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가로로 비틀어 책의 제목을 살핀다. 책기둥의 가장 아래쪽을 살핀다. 읽고 싶은 책은 늘 기둥의 가장 아래쪽에 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그러자 그 책은 가장 아래에 위치한다.
(…)

-165p, <책기둥>中


'책기둥'이란 무엇인가. 이 괴상망측한 도서관에서는 기둥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책을 보관한다. 그래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가로로 비틀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맨 아래에 있는 책을 읽으려거든 책기둥의 맨 위에서부터 한 권씩 책을 빼내야 한다는 점인데, 도대체가 이렇게 비효율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싶다. 그 와중에 책 주변을 서성거리는 '난쟁이들'이란 표현이 또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책기둥의 꼭대기에 손이 닿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왜 하필이면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언제나 책기둥의 가장 아래에 있는 건지…….

이 이야기가 어떤 논리로도 끝내 봉합되지 않을 것임을, 어떤 알레고리의 형태로도 확장되지 않을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이 시는 논리가 아니라 놀이가 아닌가. 따라서 여기에서 얻어야 할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예감이라야 한다. 이 기묘한 시가 하나의 세계라면, 그곳에 들어가서 무슨 의미를 들고 나올 것이냐가 아니라, 그곳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 경험 자체가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자. 해석하려 할 것이 아니라 경험하려 할 것, 분석에 공들일 것이 아니라 감각에 집중할 것, 의미의 발견이 될 것이 아니라 무의미의 감상이 될 것. 그렇게 그녀의 시를 '성실한 노동'이 아니라 '명랑한 유희'로 대할 것. 여전히 <책기둥>에 관해서는,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0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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