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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r 02. 2022

마침내 시가 된 소설

#39. 서른아홉 번째 책)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1.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이 소설에서 슬픔과 아름다움은 닭과 달걀처럼 이어진다. 슬픔이 아름다움을 낳으면 그 아름다움은 자라서 슬픔이 된다. 슬픈데, 그 슬픔이 왠지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 때문에 또 슬퍼지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름답게 슬픈, 혹은 무참하게 아름다운, 그런 소설이다.

<작은 것들의 신>은 여러 얼굴을 가진 소설이고 좋은 소설이 으레 그렇듯 여러 화두를 끌어낸다. 여러 가지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소설인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책에서 매번 다른 모습이 보일 수 있다. 덕분에 하고 싶은(해야 하는) 말이 너무 많아 단 한 마디도 못하겠다. 그러니 선택과 집중. 이 글에서는 내가 포착한 이 소설의 표정 중 단 한 가지에 대해서만 쓰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이 소설을, 언어적 관점에서 읽었다.






2.


어떤 소설은, 오래된 단어를 재정의한다. 탁월한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종종 그런 마술 같은 일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기도 한다. 그들은 너무나 널리, 오래, 그리고 함부로 쓰여온 바람에 이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케케묵은 단어를 데려와서, 씻기고 때를 벗겨 재탄생시킨다. 좋은 예로 밀란 쿤데라가 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단어를 멋지게 재정의하지 않았던가.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들은 이 소설을 통해 전혀 새로운 옷을 입게 됐다. 말하자면, '의미'의 옷을 말이다. 통상적인 관용어가 철학적인 관념어로 바뀌는 순간. 형용사 '가볍다'는, (문학적인 관점에서) 비로소 그때 진정으로 태어난 셈이다.

이 소설은 어떤가. 지금으로부터 이십오 년 전에, 인도의 한 신인 작가가 해낸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룬다티 로이, 그녀는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첫 소설을 통해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대표작에서 해냈던 것처럼, 남용되어 죽어가는 단어들을 살려낸 바 있다. 예컨대 '작은'과 '큰'이라는 단어를. 이 소설은 '작은 것들'과 '큰 것들'이라는 빈곤한 단어에 풍요롭게 새 옷을 입힌다. '의미'의 옷.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너무 많이 써서 퇴색되고 빛바랜 그 단어들에게 새로운 색을 칠하는 일을, 이 소설은 해냈다. '작다'라는 말은 얼마나 평범한가. 얼마나 쉽고, 당연하고, 얼마나 재미없는가. 그러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이 '작은 것들'이라고 새로운 입으로 새롭게 발음할 때, 이 단어는 비로소 다시 신선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작은 것들'이라는 단어를 따라가 보는 일은 유용하다. 이 단어가 맨 처음 등장하는 13페이지로 가면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또한 그녀가 기억할 턱이 없는 다른 기억들도 기억한다.
예를 들면 (그 자리에 없었음에도) '오렌지드링크 레몬드링크 맨'이 아브힐라시 탈키스에서 에스타에게 한 행동을 기억한다. 마드라스행 마드라스 우편열차에서의 토마토 샌드위치 -에스타가 먹은 에스타의 샌드위치-의 맛을 기억한다.
이런 것들은 그저 작은 것들일 뿐이다.

-13~14p


'그저 작은 것들'-이라고 작가는 썼다. 여기서는 이 말이 그리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는다. 사소한 것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 그쯤 되려나. 이때의 '작은 것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작은 것들'이다. '작다'라는 형용사가 아직 재정의되기 전이다.

이후 400여 페이지에 걸쳐, 소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 뿌리 깊은 카스트 제도 아래에서 불가촉천민인 '파라반' 계급의 남자가 감히, 가촉민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둘 중 한 쪽만 그랬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문제는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점. 이제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사랑만의 문제는 아니게 됐다. 제도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이고, 정의의 문제이자, 더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문제 속에서, 그들은 무얼 할 수 있을까. 이제 소설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 보자.


더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번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 '작음'에 집착해야만 함을.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작은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내일?"
"내일."

-461~463p


'거대한' 문제 앞에 놓인 그들은 '작음'으로 도망치려 한다. 다가올 파국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실책이 아니라 유일책이다. 그들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엉덩이에 난 개미 물린 자국을 보'고 즐거워하거나 '잎사귀 끝에서 미끄러지는 어설픈 애벌레' 혹은 '뒤집어진 딱정벌레'를 보며 유난히 웃거나 하며. 왜? 그들 앞에 너무도 거대한 비극이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보지 않는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하면서 간신히 살아간다. '내일'만 바라보며. 앞으로 다가올 정말 '큰 것들'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로 '큰 것들'을 가리려 했던 것이다. '큰 것들'이 몰려오는데 '작은 것들' 뒤에 숨었던 것이다. 그 외엔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한다. '작은 것들'만이 그들을 잠시나마 구원할 수 있었다고. '작은 것들'만이 그들의 유일한 신이었다고.

이제 소설의 말미에 도달한 우리는 '작은 것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른 대답도 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이 단어가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압도적이고 자명한 비극 앞에서 유약한 존재들이 그들의 유일한 도피처로 삼는 것,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도 없는 낭떠러지 끝에 몰렸을 때 발휘되는 일종의 광기 같은 것, 시간을 잠시 멈추는 찰나의 무한함 같은 것……. 아룬다티 로이는 이 모든 것들을 '작은 것들'이라고 썼다. 소설이 끝나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작은 것들'이라는 단어에 붙잡힌 새로운 예감, '큰 것들'이라는 단어가 품게 된 새로운 속성이다. 이 단어들은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남는다. '재정의'란 이런 것이다. 어떤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입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 속에는 이런 예시가 수도 없이 많다. '작은 것들'과 '큰 것들'이라는 단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을 구성하는 거의 대부분의 단어들이 그렇다. 그녀가 평범한 단어에 방점을 찍는 순간, 그 단어는 무섭게 의미심장해진다.

요컨대 문학은 언어로 구성되고 언어에서 출발하는, 언어라는 기반 위에 세워진 건축물 같은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기반을 부정하는 데서 완성된다. 이 역설을 두고 평론가 신형철은 '언어에 대한 의심'이라고 썼다.(<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진정한 시인이라면 언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시가 자기 자신을 최선을 다해 의심하며 한 줄 한 줄 겨우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미학적인 '진보'의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내게는 <작은 것들의 신>이 그 '언어에 대한 의심'의 가장 훌륭한 예시처럼 여겨진다. 그녀가 평범하고 지루해진 단어들을 의심하고 새롭게 호명하면, 그 단어들은 기꺼이 다시 태어난다. 누군가 자신들을 새롭게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3.


이렇게 해서 이 소설은 비로소 시가 되었다.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얄팍한 구별이겠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집중한 글은 소설이 된다. 소설에는 서사와 메시지가 있다. 반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더 집중하면 그 글은 시가 된다. 시에는 실험과 투쟁이 있다. 소설에서는 '서사'가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일이, 시에서는 언어와 '투쟁'하는 '실험'이 벌어진다. 요컨대 소설가의 역할이란 매력적인 이야기를 통해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일일 테고, 시인의 역할이란 말의 관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언어 양식을 찾아가는 일일 테다. 따라서, 지나친 개괄이겠으나, 좋은 소설은 독자를 고민에 빠트리고, 좋은 시는 독자를 충격에 빠트릴 것이다. '소설적인 것'이 질문-고민의 양상으로 나타난다면, '시적인 것'이란 충격-낯섦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물론 이 둘은 이율배반적이지 않으므로, 장르를 막론하고 이 두 가지가 모두 발견되는 작품들도 있다. 말하자면 시적인 소설, 혹은 소설적인 시가 있는 것이다.

<작은 것들의 신>에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뇌한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매력적인 서사가 있고 그 안에는 우리를 곤경에 빠트릴 매서운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풍부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전달하는 데에 이 작가는 멋지게 성공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성공적인 소설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 소설에는, 언어와 싸우고 대결하는 치열한 실험의 흔적 역시 발견된다. 말하자면 '의심'이 보인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기존의 관습적인 언어를 믿지 않았음이, 그것과 투쟁한 흔적이, 그 결과 그녀만의 방식으로 새 옷을 입고 나타난 언어들이 보인다. 때문에 이 소설을 소설이라고만 부르면 이것이 가진 '시적인 것'을 외면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 <작은 것들의 신>을 '시가 된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무언가 땅 밑에 묻혀 있다. 풀밭 아래. 23년간 내린 6월의 비 아래.
잊힌 작은 것.
세상이 전혀 그리워하지 않을 것.
시곗바늘이 그려진 어린아이의 플라스틱 손목시계.
두시 십 분 전.
어린아이들 한 무리가 걷고 있는 라헬을 뒤따랐다.
"안녕, 히피" 하며 아이들이 25년이나 늦어버린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뭐예요?"
그때 누군가 라헬에게 작은 돌을 던졌고,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 가느다란 두 팔을 마구 흔들면서 달아났다.

-179p


이런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 책에 빼곡하다.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열 페이지는 참혹하도록 아름다워서 읽는 도중에 자꾸만 멈춰 서야 했다. 여러 번을 다시 읽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고 마무리하자. 이 작품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문학만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 오직 언어의 매체만이. 예컨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은 물론 가능하다. 우리의 편견과는 다르게 아주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질 지도. 그러나 영화 <작은 것들의 신>에서는, 소설 <작은 것들의 신>에서처럼 케케묵은 단어들이 새 의미로 재탄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텍스트로만 가능한 일이 있다. 영상도 음악도 좋지만 그 안에서 '시적인 일'은 벌어지기 힘들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가 아름답게 호명하는 '작은 것들'이 뭔지,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없다. 오직 언어만이 보여줄 수 있다. 아룬다티 로이는 영화 시나리오와 TV 시리즈 극본을 써본 적 있고, 심지어 그녀의 남편은 인도의 영화감독이다. 그런데 왜 '소설'이겠는가? 비극을 맞은 작중 인물들, 암무와 벨루타와 라헬과 에스타…… 이들을 구원할 '작은 것들의 신'은 소설 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침내 시가 된 소설 속에만.





0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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