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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r 06. 2022

신비한 언어 사전

#40. 마흔 번째 책) 진 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1. 시인의 사전


이 시집은 그녀의 사전이다. 시인 진은영의 사전. 사전이 무엇인가? 사전에 '사전'을 검색하니 이렇게 나온다.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 그러나 정녕 그뿐인가? 아마도 시인의 사전이란 우리의 사전과는 꽤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전은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을 때 펼쳐지지만, 그녀의 사전은 아는 단어의 뜻을 고칠 때 펼쳐진다. 우리의 사전은 정해진 의미들로 구성돼 있지만 그녀의 사전은 정해지지 않은 무의미들로 구성된다. 우리의 사전이 언어를 '해설'할 때, 그녀의 사전은 언어를 '해석'한다. 이러한 그녀의 '사전 제작 과정'을 우리는 '시 쓰기'라 부른다. 그녀는 사물과 사람과 세계에 새 이름과 새 뜻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진은영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뒤늦게 읽었다. 2003년에 나온 시집을 2022년에 읽었으니 정말로 늦은 셈이지만, 이 시집이 출판된 직후에 읽었더라도 아마 한참 늦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시가 진작에 있었어야 했다고, 왜 이제야 이런 시를 읽게 되었느냐고 투덜대며. 한 편 읽어 보자.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14~15p,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표제작 전문을 옮겼다. 제목 그대로 일곱 개의 단어(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로 된 사전이다. 모호한 단어를 명확하게 명명하는 것이 사전의 본질일 터, 그러나 이 시인의 사전은 그 반대에 가깝다. 그녀는 혁명, 자본주의, 시…와 같이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있던(혹은 알고 있다고 믿어 왔던) 단어들을 모호한 상태로 되돌린다. 모호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아름답게 모호한 상태로 되돌린다. 예컨대 그녀는 '혁명'을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라고 사전적 정의대로 '해설'하는 대신,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이자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이라고, 아득하리만치 시적인 표현으로 '해석'한다. '해설'은 하나의 자명한 길이고, '해석'은 여러 갈래의 가능한 모든 길이다. 때문에 이 시인의 사전에서 단어들이 다양한 가능성으로 '해석'될 때, 우리는 단어의 자명성을 잃어버린다. 당연한 단어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나. 단순하게 이야기하자. 그녀의 '단어 다시 쓰기' 작업이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시의 궁극적인 목적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란, 당대 언어 규범의 학습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 규범의 파괴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시다. 단순히 '시적 허용'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서른 살>이라는 시에는 이런 마지막 문장이 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23p, <서른살>중). 이 구어도 문어도 아닌 기묘한 발화를 보라. 저주처럼 들리기도, 각오처럼 들리기도, 아니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당돌하게 대드는 한 젊은이의 맹랑한 목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시란 바로 이러한 언어들로 쓰인다. 불명확하고 모호한 언어, 부적절하거나 무의미한 언어, 무엇이 됐건 어쨌거나, 여태껏 쓰인 적 없는 언어로 말이다. 이미 존재하는 언어로 쓰인 시는 시시하다. 전위(前衛)도 없을뿐더러 감동도 없다. 이 둘은 언제나 같이 다니며, 존재한 적 없는 언어로 쓰인 시만이 진정 이 둘을 모두 가질 자격이 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를 다시 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잘 쓸 수가 없게 된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단 한 문장도 편히 쓸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언어 규범을 파괴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라면, 새로운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세상 모든 시들과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들에게 언어는 적(敵)이고, 벽이다. 싸워야 할 상대고, 무너뜨려야 할 존재다. 그런데도 그들은 쓴다. 괴로워하면서도, 또 쓴다. 왜? 시인이라면,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의 시인 이야기로 돌아오자. 시인 진은영의 단어 사전을 다시 보니, 이제 비로소 그 싸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가? 그녀가 기존의 언어들과 투쟁한 흔적, 기를 쓰고 기존의 언어를 부정하고 해체한 흔적 말이다. 일곱 개의 단어만 그런 게 아니다. 시집의 거의 모든 단어가 그렇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19p, <가족> 전문


이 시는 그녀가 '가족'이라는 단어와 싸운 결과다. 섬뜩하고 서늘해지는 이 시에서 우리가 알던 '가족'을 찾기는 어렵다. 그녀의 '단어 다시 쓰기'는 결코 평화롭지 않다. 그녀는 수많은 관습적인 언어와 외롭고 괴롭게 싸워가며 신선한 표현 한 가지씩을 얻는다. 싸움에서 승리한 자에게 겨우 주어지는 소박한 전리품 같은 거랄까. 그때 흘리는 피(血)가 시(詩)가 된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전위(前衛)에는 필연적으로 감동이 따라오는 것이다.






2. 세계의 발명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왈,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이 유명한 명제의 뜻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우리의 오래된 믿음과는 달리 내가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지배한다는 것, 언어가 사유의 매체인 게 아니라 사유가 언어를 전제(前提)로 한다는 것, 따라서 나의 세계란 곧 나의 언어이고, 내가 모르는 언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라는 것. 진은영의 시를 읽으며 이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언어를 발명할 때, 그녀의 세계도 함께 발명되었다는 것을.

시인은 자신이 '발견'한 세상의 모습을 시로 쓰는가? 아니, 시인은 자신이 '발명'한 세상을 시로 쓴다. 반대로 말해도 좋다. 시인은 시를 씀으로써 세상을 발명한다. 새로운 언어는 시인의 새로운 세상이 되어 그를 그 안에 살게 한다.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나에게 맡기신 창세기
수리수리 사과나무 서툰 주문에,
자꾸만 복숭아, 복숭아나무

내가 만든 사과 한 알을 따기 위해
이브는 복숭아가 익어가는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다, 잠이 든다
에덴 동산의 시간에 출현한 무릉도원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윌리엄 텔은 아들에게 독화살을 날리는
비인간적인 일에서 해방된다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마치고
왕비는 여전히 질투심에 불탔지만 한 알의 사과를 구하지 못했네

복숭아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유인력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

-48~49p, <견습생 마법사> 일부


이 시집 2부에 실린 <견습생 마법사>라는 시의 일부를 옮겼다. 하느님이 화자에게 잠깐 세상을 맡겼다. 이제 이 견습생 시인의 손에서, 새로운 세상이 막 탄생할 참이다. 수리수리 마수리. 그런데 에덴동산 한가운데를 위풍당당하게 장식해야 할, 선과 악을 판가름할 그 사과나무가 없다. 초보 마법사의 실수다. 사과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웬 복숭아나무가 생겨버린 게 아닌가. 그러자 간교한 뱀에게 속아 선악과(사과)를 따 먹어야 할 이브는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에서 평화롭게 잠들 뿐이고 이후로도 많은 일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들의 머리 위에 올릴 사과가 없으니 윌리엄 텔은 자식에게 독화살을 쏘지 않아도 되고, 백설 공주도 왕비의 독사과에 독살될 위험에서 벗어났다. 시인의 이 유쾌한 상상력은, 사과가 떨어지지 않으니 뉴턴도 만유인력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는 명랑한 전언에 이른다. 애틋할 정도로 발랄한 시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났다면 그저 귀엽고 생기 넘치는 시구나 하고 말았을 것을, 이 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정말 중요한 부분이 마지막 연에 기다리고 있다.


(…)
사과의 역사책을 얼른 덮고,
빈 사과 궤짝을 타고 나는 도망가야겠다
하느님이 돌아오시면 화내며 세상을 멸망시키실까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

-49p, <견습생 마법사> 마지막 연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이 시는 힘 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느님이 화 내시더라도, 세상을 내 멋대로 만들어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 그러나 이 다짐 자체가 놀라운 게 아니다. 내겐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라는 표현이 놀랍고 절묘하다. 이것은 곧 새로운 말이 새로운 세계라는 뜻이 아닌가. 시인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면 그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과나무 대신 '복숭아나무'를 심는 일이 된다. 그 복숭아나무는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것이다. '만유인력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없는 세상. 화자가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라고 쓰는 순간, 우리는 이 견습생 마법사가 창조한 새로운 세상이 한낱 복숭아나무로부터, 즉 한낱 '말(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면, 언어의 발명이 곧 세계의 발명인 것이다. 시인 진은영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3. 나 아닌 내가 되기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시인이라면 자신만의 '사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낡은 언어와 싸워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발명은 곧 제 세계의 발명이 되리라는 것. 요컨대 이것이 시인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 지수하는 시론(詩論)이다. 그러나 마지막은 이러한 시의 보편적인 논의가 아니라 시인 진은영이라는 특수적인 논의를 이야기하며 마치고 싶다. 이를테면 시론이 아니라 진은영론으로.

이 시집에서 화자는 쥐가 되거나(32p, <귀가>) 벌레로 변하거나(66p, <벌레가 되었습니다>) 달팽이로 변신하며(70p, <달팽이 대장>)… 줄곧 나 아닌 내가 되는 데에 골몰하는데, 이에 힌트가 될 만한 시가 시집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85p, <긴 손가락의 詩> 전문


이 마지막 시는 그녀가 왜 시를 쓰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신 대답해 볼까? 그녀는 왜 시를 쓰는가. 나 아닌 내가 되기 위해서다. 시를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쓴다는 말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문장은 시 쓰는 일이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라 육체적인 활동에 차라리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일러 줌과 동시에, 시란 나에게로 더욱 깊이 침잠해 들어가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사실 역시 지적한다.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긴 손가락'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나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가겠다는 의지이고, 그 실천이다.

어쩌면 시 쓰는 일은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가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듯이. 다른 시에서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시란 '내게 주려 했는데/실수로 꽝꽝 얼린 한 컵의 물'이거나 '쓰임을 알 수 없는 약'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시인들은 이 시의 무의미함에 대해 저마다 하나씩의 답변을 강구해 두고 있다(있어야 한다). 시인 진은영에게는 어떤 대답이 준비되어 있을까. 아마도 마지막 시 <긴 손가락의 詩>가 그녀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되겠다. 쓸모없고 잘 부러지는, 여리고 제일 먼 손가락. 그녀는 그 손가락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림 그리면서 살아가는('시간의 잎들을 꽃피우는') 사람이다. 어떤 그림을?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운 손가락을
(…)

-42p, <그림일기> 일부


바로 이런 그림을. 물고기에게 옷을 입혀 주고 강물에게 다리를 달아 주고 돌멩이에게는 날개를, 하늘에게는 손가락을 선사하는 그런 그림을. 크레용과 물감이 아니라 언어와 텍스트만 가지고 그리는 그림이다. 아주 긴 손가락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렇게 그녀는 나 아닌 내가 되고, 이 세상이 아닌 세상을 만든다. 이런 그녀의 시집을,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뒤늦게 읽은 게 아닌가 싶다.





0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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