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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r 23. 2022

사랑의 시작부터 실패까지

#41-1. 마흔한 번째 책)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김금희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사랑학개론'이다. '연애를 글로 배웠다'라는 말이 조롱으로 사용되듯, 사랑은 경험하는 것이지 공부하거나 암기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분들도 계실 것 같다. 대개의 연애 소설들이 바로 그런 점에서 무가치하거나 유치한 것으로 치부된 적도 많을 것인데, 이런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할 의향은 있지만, 그것이 김금희의 소설에 관한 경우라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소설집을 두고 '사랑학개론' 운운한 것이, 사랑의 지침서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연구서로서의 성격을 떠올리게 했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그녀는 사랑을 가르치는 대신 탐구한다. 사랑을 정의 내리지 않고 해석한다. 2016년도부터 18년도 사이에 그녀가 쓴 단편소설 아홉 작품을 모은 이 소설집에서,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들을 읽었다. 이를테면 사랑에 대해 쓰면서 사랑을 더 알아가는 모습, 사랑에 괴로워하면서도 여전히 사랑을 믿는 모습, '사랑'을 사랑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아홉 편의 작품들을 다 읽고 나서 보니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로 분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시작'과 '사랑의 실패'로. '사랑의 시작'은 <새 보러 간다>라는 작품을 통해, '사랑의 실패'는 <체스의 모든 것>과 <누구 친구의 류>라는 작품을 통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나머지 수록작 역시 좋은 소설들이 많았지만 다른 지면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이번 글에서는 위 세 작품에 대해서만 쓰기로 한다. 그녀의 작품 중 몇 개를 선택하는 일은 곧 다른 나머지를 포기하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따라서 김금희에 대해 쓰는 일은 오히려 김금희에 대해 쓰지 않는 일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다.






1. 사랑의 시작



사랑이 시작될 조건 -<새 보러 간다>, 2015


김수정과 윤. 김수정은 ‘반에서 가장 차분하고 착한 편이었던’ 아이, 윤은 ‘터지기 직전의 팝콘 같은 사람’이자 그녀가 ‘그동안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이상한 남자’. 둘의 첫 만남을 김수정은 이렇게 회고한다. "이런 인간과는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165면) 이들의 운명을, 소설은 ‘자라’를 등장시킴으로써 조심스럽게 예견하는 듯 보인다. 자신과는 전혀 맞지 않고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은 남자애가 선물한 작은 자라 두 마리를 그녀가 생각지도 못하게 꽤 ‘열심히’ 키웠던 추억.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끌림과 정듦 같은 것들을, ‘자라 두 마리’로 상징하며 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심지어는 상대에게 ‘적의와 분노를 드러낸’ 적도 있는 두 사람이, 이상하지만 당연하게 사랑에 빠지는, 그 이상하고 당연한 사랑의 한 면을 보여 준다.

하나 주목할 단어는 ‘오리지널리티’다. “원래 예술가들이 그래. 오리지널리티 같은 것, 그런 것에 대한 망상들이 다 있지.”(168면) 김수정과 윤의 관계는 편집자와 필자의 관계, 여기서 하나의 비즈니스적 갑을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김수정은 윤과의 첫 만남에서 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그의 언변과 거침없는 행동에 어이없어하면서도 그것을 막거나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이들 사이의 갑을 관계는 비즈니스적일 뿐 아니라 개인적이기도 한 셈. 둘은 계약 관계로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로서도 갑과 을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갑을 구조가 계속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설이 진행되며 이 단순한 갑-을의 층위 구조가 이른바 '전복'을 맞게 되는 것인데, 그 첫 번째 전복은 이들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일어난다. 김수정이 (물론 일부 실수였지만) 윤의 얼굴을 때리고 코피를 나게 함으로써, 그리고 다짜고짜 반말을 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잘난 척 하지마”(176면) 갑이었던 사람이 코피를 슥 닦으며 민망해하고, 을이었던 사람이 휴지를 건네며 무안해하는 미묘한 상황, 이제 두 사람은 각각 갑과 을의 역할을 하나씩 떠맡는 게 아니라 그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렇게 말하자, 이들의 관계는 갑-을 구조가 아니라 갑-갑 구조가 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갑이 된다.

그러나 이 구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복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진짜 갑’을 만났을 때 발생한다. 저명한 현대 미술 작가 현석경을 만나러 간 두 사람은 그의 앞에서 무력하다. “아니 읽지도 않으시고. 일단 읽어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일단 읽어만 주시면요. 선생님.”(186면) 함께 갑이었던 그들은 함께 을이 된다. 을-을 구조다. “현석경은 노쇠한 몸으로,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도 그저 침묵만으로 윤을 압도했다. 참으로 냉정한 오리지널리티였다.”(189면) 그렇게 압도적 ‘오리지널리티’ 앞에 놓인 무력한 둘은, 이제 서로에게서 ‘을’의 모습만을 보는 것이다. 작중 현석경의 대표 작품으로 설정되는 <운디드 버드>(상처입은 새)라는 제목이 이 둘의 모습을 더욱 외롭게 그린다. 김수정 대신 윤을 만나고 온 팀장이 “굉장히 샤이한 친구더군”(180면)이라고 그를 평가하는 장면이나, 김수정을 만나기 전에도 출간 제의는 있었으나 그가 책 한 권을 펴낼 만큼 글을 쓸 능력이 없어 결국엔 쓰지 못했다는 에피소드 등도 애초에 ‘갑’으로 설정되었던 윤이 실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피력하는 데 기여한다. 윤과 김수정은 서로에게 각각 갑과 을이었다가, 역할을 뒤바꾸었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갑이 되었다가, 현석경을 만난 뒤로는 둘 다 을이 된다. 이 사회의 진짜 오리지널리티 앞에서, 그들은 강한 척하지만 보이지 않게 상처를 입은 새처럼, 한 마리 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사회가 어떤 곳인가. 김수정은 비싼 주차료를 받는 비싼 도시의 한 건물 주차장을 생각하며 “주차장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데 그 비어 있음을 유지만 해도 돈을 얻다니” 하며 우울해한다. 이 사회는 그런 곳이다. 또 자신은 다섯 개가 먹고 싶은데 꼭 일곱 개만 살 수 있는 국화꽃빵집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천 원을 내고 일곱 개를 샀는데 열어 보니 여섯 개가 있는 곳이다. 요컨대 이 사회가 너무도 이상하고 부조리하지 않느냐는 것, 그런데도 개인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그래서 늘 당하면서도 그저 견디기만 할 뿐인 이들은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사회에서 나약한 개인은 언제나 을이다. 그리고 이런 '을'들에게 없는 것이 바로 오리지널리티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쓴 것은 유명하다. 김금희는 <새 보러 간다>에서 톨스토이의 저 말을 다음과 같이 뒤집어 돌려주는 것만 같다. "'갑'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웃을 때 '을'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을'들의 표정은 얼마나 닮아 있는가. 그들은 그들이 '을'이라는 사실로만 기억되므로, 전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오리지널리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오리지널리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때 사랑이 그들의 해결책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하는(발견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대체 불가능한 오리지널리티를 본다. 을인 누군가가 또 다른 을의 오리지널리티를 알아보는 일. 사랑은 그렇게 시작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들은 그렇게 '을'로 연대한다. 그렇게 이들의 을-을 구조는 사랑의 구조가 된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일 '새 보러 가는' 장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을이 되는 장면이자, 한 을이 또 다른 을을 발견하는 장면이고, 그들이 함께 을이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벅차게 깨닫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이제 당연해 보인다. 이상해 보여도, 당연한 것이다.

이제 결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사랑을 시작할 가능성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사랑이 시작할 가능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 소설에서 말하는 가능 조건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상하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오리지널리티를 잃어버린 채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그들이 어쩔 수 없는 ‘을’이라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비로소 그들의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될 때, 사랑은 가능해진다는 것. 한 번 더 말하자면, 사랑은 그렇게 시작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그들이 함께 ‘새를 보러 가는’ 이유가 아닐까.






2. 사랑의 실패



사랑이 실패했다는 증거 -<체스의 모든 것>, 2016


먼저 소설 <체스의 모든 것>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나’, ‘노아 선배’, 그리고 ‘국화’다. 먼저 ‘노아 선배’가 누구인가, ‘어딘가 다른 중력에서 사는 듯한 느낌’을 주며, 늘 진지하고 ‘실수하면 지나치게 자책’하는 사람, ‘동기나 후배들과는 잘 지냈지만 교수나 선배들과는 자주 싸웠’던 사람, 그러면서도 ‘우울증, 정동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물론 불합리하지만 그래도 굳이 써 보면, 자기만의 견고한 세상에서 사는 고집불통의 청년이 아닐까.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1999년의 세기말 분위기와 잘 어울"(11면)리는. 그런데 그 고집불통보다 더한 고집불통이 있다. ‘국화’. 그녀는 ‘대단히 무심한 애’, 심지어는 "저 무심함은 어딘가 공격적인 데가 있지 않은가"(13면) 생각이 들 정도로 남의 사정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게 노아와 국화라는, 이 색채 강한 두 사람이 만났다. 둘은 언뜻 보기에 상극일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이 둘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이를테면 그들은 ‘언제나 이기는 사람’이다. 그들은 ‘이기는 법’을 고민하고 어떠한 타협도 없이 실천한다. “국화는 난데없이 자기는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25면) 물론 차이는 있다. 요컨대 노아에게는 ‘자신이 옳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고, 국화에게는 ‘누가 이기는지’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이기는 사람’이자, ‘이겨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이 둘의 체스는 체스의 싸움이 아니라 체스가 아닌 것들의 싸움이 된다. 노아와 국화의 싸움, ‘이기는 사람’과 ‘이기는 사람’의 싸움이다. 항상 이기는 두 사람이 만나면 누가 이길까. 이들은 체스는 안중에도 없고 ‘체스가 아닌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 “둘은 여전히 체스에 대해 얘기했지만 정작 체스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고 체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만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대화가 저렇듯 열띠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공허한가 생각했다.”(21면) 이 싸움에 대한 ‘나’의 관찰은 틀렸다. ‘나’의 말처럼 그들의 대화는 공허하지 않았다. 전혀 공허하지 않고 차라리 과도한 의미 때문에 변질된 것에 가깝다. 그 순간 그들에게 체스는 이미 체스가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었으므로.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이 세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가다. 두 가지로 정리하자. 첫째, ‘파괴’한다. “나는 내 안에 무언가가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 국화가 입을 열 때마다 선배는 힙하고 쿨한 우울한 청춘에서 어딘가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흔한 이십대로 달라졌다.”(22면) ‘세기말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고집불통의 신념으로 무장한 소신 있는 젊은이가 파괴되고 남은 건, ‘더치페이 할 때 잔돈을 돌려주지 않’거나 ‘다 함께 햄버거를 먹고 있을 때 유난히 ‘감자튀김을 많이 먹는’ 쪼잔하고 찌질한 남자일 뿐이다. 그런데, 왜 계속하는가. 이 상처뿐인 싸움을, 자학적인 체스를. 둘째, ‘사랑’ 때문이다. 싸우다가 정든다거나,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그런 말들로는 진부하다. 소설가라면, 이렇게 쓴다. “그만하면 화낼 법도 한데 노아 선배는 이상하게 분노에 휩싸이지도 속을 끓이지도 않았다. 선배는 국화를 참아냈고 그렇게 선배가 참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서늘했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22면)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다섯 페이지는 그들의 체스가 단순한 ‘사랑싸움’이 아니라 ‘싸움으로서의 사랑’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과거 워킹 홀리데이로 외국에 나간 노아 선배가 외국 농장에서 도둑으로 누명을 쓰고도 농장주에게 불려가 거짓 사과를 해야 했던 이야기, 그때 느꼈던 공포와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 귀국하고 나서도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그가 스스로를 학대해야만 했던 이야기. 이 에피소드가 소설의 마지막 즈음 등장한다. 아마도 이 일을 겪은 뒤에 그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이기는 일’이란, 그렇게 중요해졌을 것이고, 그렇게 그는 잘못된 일을 못 견디고 실수에 민감하며 강박적일 만큼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국화를 만난 후에는 더욱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부끄러움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운지를 봤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도 그렇게 했다. 그는 싸우면서, 어떻게든 이기려 하면서, 사랑했다.

이제 결론, 그래서 누가 이겼는지? 내 결론은 이렇다. 둘 다 졌다. 국화는 국화대로 졌고, 노아는 또 노아대로 졌다.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노아의 얼굴은 이렇게 묘사된다. “네 얼굴이 이긴 사람의 얼굴이라서.”(35면) 언제나 ‘이기는 것’에 목매던 우리의 청년은 이제 중년이 되며 드디어 ‘이긴 사람의 얼굴’이 된 것인가.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진 것이다. 어린 시절 대학 영미 잡지 읽기 동아리에서 사람들과 토론하고 교수님께 대들던, 바로 그 ‘열도’가 사라졌으므로, 이젠 ‘결국 내가 이겼다’며 얼굴에 써 놓은 듯한 그 완결성으로 말미암아, 기어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힘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수년 만에 노아가 다시 국화를 만나 체스를 두지만, 그 재회가 얼마 못 가 이어지지 않게 된 것도 당연하다. 이십 대 시절, 국화와 체스를 둘 때의 그는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긴 사람의 얼굴’을 한 채 열정 없이 걸어 다니는 쓸쓸한 남자다. 그의 얼굴이 ‘이긴 사람의 얼굴’이라 할 때, 그 얼굴은 얼마나 무표정한가. 그러니 그는 이긴 사람의 얼굴을 한 진 사람이다. ‘이기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긴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졌다.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체스에 관해서는 자기가 다 틀렸던 것 같다고.”(36면) 수년 만에 만난 국화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 그들의 체스가 어떤 체스였나. 그 체스는 둘 다 이기는 체스였다. 뜨거운 체스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둘 다 지는 체스를, 견딜 수 없게 외로운, 차갑게 식어버린 체스를 둔다.

<체스의 모든 것> 속 이들이 두는 체스는, 그렇게 쓸쓸한 승부로 끝난다. 아무도 이기지 못했으니 무승부인가? 아니, 둘 다 진 것이다. 이런 소설을 읽으며 든 생각. 사랑이 변했다는 것은 그 사랑의 결과로 둘 다 이기지 못하고 둘 다 지게 되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실패한 사랑은 모두를 지게 만든다.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 지는 게 아니라 둘 다 지게 한다. 그들은 둘 다 이길 수도 있었는데 둘 다 졌다. 아니, 그러고 보면 그 삶의 ‘열도’라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 더 있지 않은가? 이 체스는 국화와 노아 선배만의 게임이 아니었다. 둘에게는 관찰자 역할로만 보였겠으나 실은 그 누구보다 깊이 그 사랑에 관여했던 ‘나’를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니 둘 다 진 게 아니다. 셋 다 졌다.





사랑이 실패하는 순간 -<누구 친구의 류>, 2017


다음은 <누구 친구의 류>. 이 소설, 실패한 사랑 이야기다. 당연히 ‘현경’과 ‘류’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래도 한번 따져 볼까. 첫째, 왜 ‘사랑’인가. 부잣집 여대생이 한 한심한 남자에게 빠져 가출한다. 자신의 꿈이고, 집안의 재산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저 이 사람만 있으면 된다며, 무모하지만 아름답게 집을 박차고 나간 그녀를 이틀 뒤에 오빠가 잡아온다. 다음은 오빠의 말. “뭐하고 있었는지 아냐? (…) 김밥을 말고 있더라니까. 그 남자랑 PC방 돌면서 판다고.”(240면) 여자의 오빠는 이 계획을 거의 실소하며 조롱하지만, 아니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조롱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지만, 그녀에게 이 계획은 앞으로 남은 삶 전체를 걸 만한 것이었고, 자신이 가만히만 있어도 물려받게 될 그 모든 집과 재산과 장밋빛의 안락한 미래를 충분히 가릴 만큼 거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잠깐 콩깍지가 씌었던 것뿐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자. 콩깍지는 한 사람만 달리 보이게 만들지만, 그때 그녀는 그 사람과, 자신과, 심지어는 그들의 삶과 미래까지도, 완전히 다르게 보았으므로. 이것을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으로도 부를 수 없는 것 아닌가. 비록 가난에 고통받을지라도 사랑하는 남자와 김밥을 말며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이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방책이라는, 어떤 신념과도 같은 믿음이 생기려면, 그것은 희생이나 초월 같은 개념들과 결부될 막강한 힘을 필요로 할 텐데, 그런 정도의 힘이란, 분명 사랑 말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왜 그 사랑은 ‘실패’했는가. 두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안의 사나운 반대로 헤어지게 된 후, ‘현경’은 ‘류’에게 이런 쪽지를 보낸다. “너를 잃는 오늘이 앞으로 내게 남아 있는 날들 중 그나마 가장 행복한 날일 거야”(241면) 이런 아름다운 문장으로 두 사람은 결별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헤어졌기 때문에 이 사랑은 실패한 사랑이 되는가? 아니, 두 사람이 또 만났기 때문에 이 사랑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엄밀히 말하면 결별이 아니고 재회 때문에 실패했다. 십칠 년 뒤에 우연히 다시 만난 ‘류’는 택배 사원이 되어 있었다. “십칠 년이면 어떤 축적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류에게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244면) ‘결혼에 실패하고 딸까지 잃었으며 오랫동안 해 오던 시민단체 쪽 일도 그만두’고 나서 지금은 택배 배달을 하고 있는 류는 십칠 년 전 김밥을 말던 모습과 놀랍게도 똑같아 보인다. 현경은 어떤가. 그녀는 매일같이 수십만 원어치의 식사를 하고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지만 어딘가 고독을 풍기는, 그런 여성으로 자랐다. “현경의 삶은 종교생활과 쇼핑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226면) 그녀는 영화나 뮤지컬을 보러 가서 불평만 하다 오지만 인스타그램에는 꼭 게시물을 올리는, 서울의 몇억이 넘는 집에서 사는, 여의도의 비싼 뷔페에 가서 해감이 잘 안됐다느니, 너무 달고 싼 맛이라느니, 누가 이런 델 잡았냐느니 하며 트집을 잡는, 그리고 이런 삶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누릴 수 있는, 그런 여성으로 자랐다. 이런 그녀는, 십칠 년 전 사랑을 위해 스스로 포기하려 했던 그 미래로부터 벗어났는가. 어리고 철없던 십칠 년 전의 그 여대생과 똑 닮아 있는 것은, 현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동안 여전히 달라진 게 하나 없는 두 사람이 재회했을 때에는, 십칠 년 전 그 당시와 똑같은 일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그 사랑이 그들의 믿음처럼 필연적이고 영원하고 자명한 것이었다면. 다시 만난 그들은 그때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처음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헤어지던 날의 “너를 잃는 오늘이 앞으로 내게 남아 있는 날들 중 그나마 가장 행복한 날일 거야”라는 문장은, 십칠 년이 지나 현경의 입에서 거꾸로 뒤집혀 튀어나온다. “아저씨, 아저씨가 앞으로 오십 년을 산다면 오늘이 가장 불행한 날일 거예요.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예요.”(233면) 그녀는 류를 보기 위해 한 달에 오십만 원을 받으며 한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먹지 않던 즉석떡볶이를 먹거나, 읽지 않던 잡지를 읽기도 한다. 이 변화는 고무적이다. “현경의 얼굴에서 어떤 빛, 그간은 보지 못했던 다른 결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234면) 그녀의 어두운 얼굴에서 조금씩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것인가.

그러나 유통 기한이 십칠 년이나 지난 사랑이 그렇게 쉽게 환생할 수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화자 ‘윤아’가 냉철한 시선으로 보고한다. 이럴 때, 사랑을 행하는 이의 시선보다는 사랑을 관찰하는 이의 시선이 훨씬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쿠바에 가게 된 ‘윤아’는 그곳에서 ‘류’를, 혹은 류인 듯하지만 류가 아닐 수도 있는, 반대로 류가 아닌 듯하지만 류일 수도 있는, 어떤 남자를 만난다. ‘나’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 남자(류인지 아닌지 모르는)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살이 빠져서 양볼이 움푹 패고 깊은 주름이 뚜렷해서, 어떤 분노 같은 것으로 형형해진 눈빛을 빼고는 완전히 노쇠한 사람”(248면). 도저히 사랑할 수 있거나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 사람, 아니 그보다는 이 사람의 사랑이 전혀 궁금하지가 않은 사람이다. 그가 정말 류인지 아닌지는 이 소설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류와 현경의 재회를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윤아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현경의 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248면) 그는 ‘현경의 류’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이 말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실제의 류’라는 것도 떠올리게 된다. 십칠 년 전의 류, 한 여자와 ‘성공적인 사랑’을 했던 그 남자는 이제 현경의 기억 속에만 있다. ‘현경의 류’는 십칠 년의 세월 동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완전히 노쇠한’ ‘실제의 류’만 남았다. 지금 윤아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정말 류가 아니라 해도, ‘현경의 류’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나쁠 것도 좋을 것도 비극도 희극도 없는 얼굴로 노래하는, 그냥 흔한 어느 친구의 류일 뿐이었다.”(249면)라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비정하고 냉정한 사랑의 실패를 선언하는 문장이 된다. 첫 번째로 헤어졌을 때, 류와 현경의 사랑은 사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들이 비록 연애(혹은 결혼)에는 실패했을지언정, 사랑에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이들의 사랑은 사랑으로 남을 수 없게 됐다. 사랑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 단 한 사람, 오직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러니까 평범한 한 사람의 단독성(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있어서 실패란 그 반대의 경우, 즉 한 사람의 단독성이 무너져서 평범성 사이에 묻힐 때, 그러니까 나에게 유일했던 ‘이 사람’이 그냥 흔한 ‘어느 사람’으로 돌아갈 때 발생한다. 류는 현경에게 어떤 존재였나.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열렬히 사랑했던, 이 세상에 흔하디흔한 어느 남자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단독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십칠 년이 지난 후, 류를 두고 “그냥 누구 친구야”(230면)라고 말할 때, 류는 순식간에 평범해졌다. 평범해지는 것. 사랑은 이때 비로소 실패한다.





03.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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