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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r 24. 2022

김금희 소설로 보는 삶의 세 가지 모습

#41-2. 마흔한 번째 책)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은 많아도 좋은 소설집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우선 확실한 건, '좋은 소설' 몇 편을 모아 둔다고 그냥 '좋은 소설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몇 개의 짧은 소설을 모아 하나의 단행본으로 묶는 일에는, 각각의 단편소설들에게는 없던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소설집은 각 소설들의 총합보다 크다. 표현하자면, 소설집은 몇 개의 단편소설들을 그저 물리적으로만 모아 묶은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한데 모아 묶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비슷한 주제의 소설들만 묶는다면 죄다 거기서 거기라며 지루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 그렇다고 이 얘기 했다가 또 저 얘기 하는 식이라면, 통일성 없이 중구난방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니 적절히 배합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단순히 좋은 소설'들'과는 다른, 좋은 소설'집'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김금희의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를 읽으면서 하게 됐다. 좋은 소설집이라면 좋은 소설들이 실려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소설들이 단순히 '집합'되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소설집에서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은 그저 '모여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만난다'.

이전 글에서는 책에서 세 편을 뽑아 '사랑'의 서사로 정리했다. 발표된 순서대로 <새 보러 간다>와 <체스의 모든 것>, <누구 친구의 류>를 각각 '사랑이 시작될 조건', '사랑이 실패한 증거', '사랑이 실패한 순간'으로 대응시킬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책을 구성하는 나머지 작품들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삶'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다른 세 편의 작품을 뽑아 '삶'의 서사로 정리해 보려 한다. 이 소설집에서 사랑은 삶으로, 삶은 또 사랑으로, 연쇄되고 결합되면서 더 커지고 깊어진다. 그렇게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이 책 속 아홉 단편 소설들의 총합보다 커진다. 이 아름다운 소설집을 소중히 읽었다. 이 책은 최근 읽은 가장 '좋은 소설집'이다.






1. 슬픈 광대의 비겁한 농담 -<문상>, 2016


이 소설을 마치 무슨 범죄 소설처럼 읽었다. 작품 어디에도 범죄는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 인물인 '희극배우'는 꼭 범인 같다. 이 소설에서 희극배우는 우리의 순진한 기대처럼 웃음을 선사하지 않는다. 그의 부친상을 조문하기 위해 문상을 간 ‘송’에게 그는 무엇을 주었나. 농담 하나를 준다. 그를 깊이 찌를 칼 같은 농담을, 목을 조일 올가미 같은 농담을.

희극배우를 깊은 내면의 우울과 연관시키는 것은 흔한 비유가 됐다. 내면에 상처를 가진 광대의 이미지나, 활짝 웃는 그 모습이 오히려 소름 끼치도록 섬뜩한 삐에로의 이미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소설 속 희극배우 역시 그런 오래된 상징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김금희는 조금 더 구체적이다. 이 광대는, 그저 슬픈 광대가 아니라 자신의 슬픔에 타인을 초대하는 슬픈 광대다. 그는 웃음을 주는 데 실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울을 주지 않는 데에도 실패한다. “희극배우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상처받은 것 같았고 상처 주고 싶은 것 같았다.”(138면) 그래서 그의 농담은 자신의 상처를 웃음으로 승화할 줄 아는 어떤 희극의 경지에 도달한 농담이 아니라, 자신의 것만큼의 상처를 타인에게서도 발견하기 위해 웃음을 무기로 사용하는 일종의 비겁함의 단계까지 추락한 농담이다. 그는 송에게 “아버지를 잃어봤습니까? (…) 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를 잃겠지요? 송형도 아버지를 잃을 거라는 말입니다.”라고 말하거나 “송형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 적이 있습니까?”라고 무례하게 질문하며 자신의 것과 똑같은 상처를 송에게서도 보려 한다.

희극배우 왈, “인생은 잘못된 선택의 연쇄다” 이 소설에서 이 말은 거의 진리처럼 보인다.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으로만 드러나고 있다. 아버지를 치매 환자로 위장하여 지원금을 받으려 한 희극 배우의 형제들, 어릴 적 조모의 죽음에 슬퍼하던 송의 뺨을 때리던 송의 아버지. 이들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라고, 이 희극배우는 비극적으로 믿고 있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149면) 따라서 다시 말해야 한다. 이들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피해자’들이 아닌가. 이제 소설의 관심사는 ‘송’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진다. 4년 동안 ‘양’과의 연애, 한 번의 낙태, 그리고 이별. 희극배우의 농담은 바로 이런 것들을 끄집어낸다. 송은 과거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난폭해지곤 했”(135면)거나 “마음이 엉망이 되곤 했”으며 “그것을 모멸하고 난폭하게 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잘 ‘지우며’ 살려 한다. 그의 말마따나, 잘못된 선택일 수밖에 없는 과거를 잘 지우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므로.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149면


그렇게 희극배우의 불운을 위로하기 위해 떠난 문상길에서, 송은 제 자신부터 위로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만다. 홀로 군밤을 씹으며 돌아가는 기차 상행길에서, 송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이 소설은 끝난다. 그가 웃었으니, 어쨌든 농담은 성공한 셈인가. 그러나 그 웃음이 얼마나 공허한가.

그런데 진짜 공허한 것은 따로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희극배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제가 나쁩니까? 내가 이번에도 나빴습니까?” 이 질문을 듣고 있자면, 뭔가 무시무시하게 공허해지는 기분이 든다. 과연 그런가?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상처를 갖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그가, 물론 비겁한 건 맞겠으나, 정말로 나쁜 걸까? 그렇게 말해도 좋은가…… 이렇게 묻는 이 소설이 너무도 신랄하다.






2. 99%의 절망과 1%의 희망 -<오직 한 사람의 차지>, 2017


어쩜 이리 매정한가.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인물이 나오는데(‘나’, 와이프 ‘기’, 장인, ‘낸내’), 단 한 명의 삶도 비극이 아닌 것이 없다. 삶이란 분명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을,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곳이라는 말을, 누구도 해 주지 못한다. 아니, 해 주지 않는다. 담담하게 절망하는 소설이고 묵묵히 좌절하는 소설이다. 매정하게 실패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제목이 말하는 ‘오직 한 사람의 차지’란, 다름 아닌 ‘상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인즉 우리가 온전하게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실뿐이라는 것. 제목처럼 이 이야기는 네 명의 인물들이 겪는 상실의 이야기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화자는 그들이 어떤 상실을 겪고 그 수많은 상실들이 어떻게 연쇄되는지를, 결국 그들의 삶이 하나의 길고 거대한 상실 그 자체임을 말하는 데에만 관심 있다.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모든 에피소드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상실과 관련되고, 공통적으로 실패를 이야기한다. 실패의 매정한 기록이다.

예를 들어 보자. 먼저 ‘나’가 있다. “세상에는 이상한 천 명의 독자가 있어서 무슨 책을 내든 그만큼은 팔린다”(63면)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뛰어든 1인 출판의 길은 험난했다 결국 엄청난 빚과 결국 팔리지 않은 책 더미를 빼고는 몽땅 잃고 만다. 실패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에게는 아직 이런 자부심이 남아 있다. “1인 출판을 하려는 여러분은 독학자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차가운 책상머리에 앉아 고독하게 세계를 해석하는 소수의 선지자들과 양서를 내고 그것을 알아보는 이상한 천 명의 독자들과 지성을 매개로 연대하는 것입니다.”(64면’’) 그러니 그의 장인이 ‘생활의 장인’ 계모임 사람들과 자수성가 스토리를 담은 자서전을 출간해 달라고 할 때, 그가 이렇게 단호해지는 것이다. “제 출판사에서는 그런 건 안 냅니다.”(72면) 그러나 이 자부심마저 영원하지는 못하는데, ‘낸내’를 만나며 그렇게 된다. 다짜고짜 환불을 요구하는 ‘낸내’를 만난 후, 예술과 교양과 지성에게 품던 마지막 희망의 끈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게다가 ‘나’는 ‘낸내’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결국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거나 속되게는 바람이 났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지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문득 혼자 있고 싶어지면서 기에게서 좀 떨어지게 몸을 돌렸던 게 사실이다.”(84면) 그는 돈을 잃고, 출판사를 잃고, 신념(양서를 내고 독자들과 지성으로 연대하겠다는)을 잃고, 이제는 가정이 주는 정신적 안정감도 잃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책이 남지 않았던가. 출판사가 망한 뒤로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 두었던 그의 책 더미. 이 소설은 ‘나’에게서 그 마지막 남은 책들마저 빼앗아 가고 나서야 마무리된다. 젖고 썩어버린 책들을 훨훨 불태워버리는 장면이 이 소설 마지막 페이지쯤 등장한다. 이것이 상실로 시작해서 상실로 마무리되는 ‘나’의 서사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대학교수 자리가 나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인 ‘기’에 대해 말해 볼까. ‘나’를 대하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 가시가 돋쳐 있는 것은, 첫째로는 자신의 무력한 상황에 대한 열패감일 것이고, 둘째로는 1인 출판사를 하겠답시고 이상한 책들만 고집하다 결국 빚을 지고 망해 버린 남편의 모습에서 늘 자신의 것과 똑같은 열패감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수성가한 제 아버지의 눈물겨운 성공 스토리라는, 혹은 그런 사람의 딸이라는, 어딘가 비뚤어진 자부심뿐인 듯 보인다. 제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자부심도 잃은 채. 그녀가 “원래 교수가 목표는 아니었어.”(92면) 하고 씁쓸하게 말할 때, 우리는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 어떤 상실감의 깊은 흉터 자국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역시 절망의 서사다. 그녀의 아버지, ‘나’의 장인은 어떠한가. 그는 먼저 죽은 아내를 추억하며 넋두리를 하는 사람, 사위에게 담배를 권하지만 거절당하고 민망해하는 사람, 딸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 집 앞에 삼 미터짜리 트리를 세울 계획을 하지만 돌아오는 딸의 차가운 말 –“헛돈 쓰지 마, 아빠” 만을 듣게 되는 사람…이다. ‘낸내’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회초리로 맞곤 했으며, 온갖 거짓말을 하며 살다가 이제는 자신의 삶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 그런 사람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한없는 절망과 상실로 점철된 이야기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자. 어쩜 이리 매정한가. 소설에서 이들의 상실은 매우 덤덤하게 그려지는 바람에 더욱 쓸쓸한 상실이 되고 마는데, 그것은 그들이 상실에 아파할 감정마저 상실한 듯 보여서다.


희망을 말하는 시에 마음을 내어준 적이 별로 없다. 크게 부르짖는 희망은 미학적 파탄을 가져오기 쉽고, 낮게 읊조리는 희망에는 어딘가 타협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문학이 희망을 줄 수도 있을까. 문학은 절망적인 세계 앞에서 사력을 다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은가. (…)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

신형철,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 2007


위의 인용문은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문장이다. 이 말에 공감하기는 했으나 명확하게 부합하는 하나의 사례를 찾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김금희의 소설 <오직 한 사람의 차지>야말로 여기에 꼭 들어맞는 퍼즐 조각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이 마지막에 가서 ‘겨우’ 희망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이토록 한없이 실패하고 상실하는 절망의 서사의 끝에 이르러 무심하게 등장하는 두 단어 때문이다. ‘곰의 자서전’(74면)과 ‘나비의 상실’(91면)이 그것이다. “나는 캐나다 불곰 네 마리가 동면에서 깨어나 산등성이를 오가며 봄을 축복하는 것을 전율과 감동 속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긴 시간 견뎌야 했던 겨울의 엄혹함에 대해서는 모르는 체했다. 다가올 행복으로 충만한 순간에 그런 과거는 무용하다는 듯이.” 이는 ‘망각’의 능력을, 비극을 해맑게 잊어버리는 그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억만큼이나 망각도 중요한 능력이다. 우리는 상실 속에서 영원한 상실만을 보장받은 채 살겠지만, 그 명랑한 망각으로 인해 ‘곰’처럼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 어렸을 적의 기가 ‘나비 의상실’을 ‘나비의 상실’로 읽었다는 에피소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나비의 상실’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이미 상실에 대한 조롱이 아닌가. 그러나 영악하지 않고 순수한, 매섭지 않고 순진한 조롱이기에 앞서 말한 ‘곰의 해맑음’과 아름답게 일맥상통한다. 내게는 대놓고 힘주어 말하는, 연설에 가까운 그런 희망보다는, 이 소설처럼 조용히 혼자 되뇌는, 혼잣말에 가까운 이런 희망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소설은 99%의 절망과 1%의 희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이런 소설을 읽고 나면 드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두고 매정하다고 말해도 어쩔 수가 없다. 한없이 절망해야만 희망에 겨우 닿을 수 있듯, 소설가는 한없이 매정해져야만 겨우 다정한 말 하나를 건넬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물들 앞에 한없이 매정한 작가 김금희는 무슨 다정한 말을 건넸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 밤안개가 가득 낀 위험천만한 도로에서, 기는 ‘이 곡예운전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말한다. “뭐야 저 차들을 좀 봐, 저렇게 다들 안개등을 켜고 가니까 꼭 별빛 같잖아.” 이 아이 같은 마지막 대사는 ‘곰의 해맑음’이자 ‘나비의 상실’이 갖는 순진함이다. ‘별빛’ 같다니, 당장 사고가 난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말이다. 이것이 1%의 희망,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수 있는 희망이다. 그렇게 주구장창 실패하고 주구장창 무너지는 인물들의 삶을 말함으로써, 오히려 겨우 이기고 겨우 일어서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것.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이 소설은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3. 사랑도 아니고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닌 -<레이디>, 2018


“어쩌면 세상의 많은 일들은 그런 사소한 변별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생각해왔다.”(99면) <레이디>를 읽고 나면 뭐라고 할까, 단순했던 것들이 아주 복잡해진다고나 할까. 남극 있으면 북극이 있듯, 사랑이 있으면 사랑 아닌 것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몸이 있다. 합쳐질 수 없는 이런 대립항들 사이의 압도적 거리를, 이 소설은 아주 ‘사소한 변별’로 축약한다. 예컨대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은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한 끗 차이에 불과해진다. 사랑일 수도 있고 사랑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일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에는 그러한 ‘차이의 무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지구는 남극과 북극이 ‘한 끗 차이’로 뒤집히는 곳으로, 차이가 무화된 혼란스러운 곳으로 바뀌게 된다. 이를 가변성과 모호성이라는 용어로 요약하자. 남자가 아니면 여자고, 바다가 아니면 육지고, 행운이 아니면 불행인 그런 세상은, 그런 고정성과 명료성의 세상은 얼마나 단순하고 쉬운가. 하지만 소설가는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대신 소설가는 모든 것이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는 이 가변적이고 모호한 말,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들리는 이 말에 근거를 달아 줄 필요가 있겠다. 소설에서 이 가변성/모호성이 처음 등장하는 부분은 ‘유나’가 ‘나(정아)’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노래를 불러줄 때이다. 유나는 애들을 웃기려고 갑자기 평서형 문장으로 노래를 마치는 장난을 치곤했는데,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애절하게 부르다가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 하고 갑자기 선언하듯 마치는 식이었다.”(98면) 다들 알고 있듯 원래 가사는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이다. 고작 맨 마지막의 ‘면’이라는 한 글자가 빠졌을 뿐인데 이 쓸쓸하고 비정한 노래 가사가 실없이 웃겨진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그 ‘한 끗 차이’에 의해, 페이소스는 순식간에 유머러스로 변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 <기억의 습작>은 슬프고 애달픈 노래이기도 하거니와, 유나가 바꾼 저 가사 부분을 떠올리면 어딘가 웃음이 튀어나오게 되기도 하는, 슬프면서 웃긴, 혹은 웃긴데 슬픈, 그런 노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변성이 불쾌한 사람도 있다. “유나가 그렇게 노래를 절단 낼 때마다 애들은 웃긴다며 와르르 엎어졌지만 나는 불쾌했는데 그 사랑 노래들을 사랑 노래인 채로 더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이 그렇게 시시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98면) ‘나’가 바로 그런 사람인데, ‘나’는 가변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고정적이고 명료한 것을 원한다. 예컨대 애절한 사랑 연가를 웃음과 유쾌함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에서 어떤 모욕감을 느끼거나, 자신은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며 그 둘과 모두 미세하게 다르다,고 말하는 ‘요시키’를 재수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그런 요시키가 보내는 “그 얼치기 같은 편지를 코웃음을 치면서도 열독했는데 다 읽고 나서는 매번 고개를 흔들면서 유치하군, 아주 소름 돋도록 유치해, 하고 혹평”(105면) 하는 등의 모습 말이다. 따라서 비교하자면 ‘유나’가 경계와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쿨하게 인정한, 그런 타입의 사람이라면, ‘정아’는 경계에서 모호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경멸하고 이것, 아니면 저것일 뿐이지,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하다면 그게 대체 뭐란 말이냐, 하며 짜증을 내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 아닐까.

그런 와중에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여숫골’ 이야기는 상징적이다.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천여 명을 기리는 성지인 이곳은, ‘예수 마리아’의 발음이 꼭 ‘여수(여우) 머리’처럼 들려서 붙은 지명이다. “들리는 이에 따라 마리아가 여우가 되고 여우가 마리아가 된다는 것. 어느 밤 누군가들에게는 여우가 그토록 간절하고 여우가 그렇게 힘이 세며 여우가 그렇게 귀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는 것. (…) 그 작은 착각이 이 무자비한 학살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사는 게 으스스 해졌다.”(100면) ‘예수’가 ‘여수’(‘여우’의 사투리)로, ‘마리아’가 ‘머리’로 변했다. 말할 때 나는 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야말로 ‘한 끗 차이’ 때문에 말이다. 종교 행위와 반역 행위, 신념을 지키겠다는 것과 정신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이런 것들은 정말로 고작 한 끗 차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끗 차이로 인해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가변성과 모호성이 지배하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화자의 말대로 이런 세상에서 사는 건 너무 으스스 한 게 아닌가.

하지만 ‘나’에게 진짜 으스스 한 일은 지금부터 벌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아와 유나의 사이는, 이 가변성의 세상에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사랑이 아니라 부를 수도 있는데, 사랑이면서도 동시에 사랑이 아닌, 그 부조리한 동시성이 정아에게는 진짜로 으스스했던 것이다. 이 둘의 으스스 한 관계는 으스스한 대화 양상으로 (무의식적이지만) 전개되는데, 다음과 같다.


"정아야."
"어."
"왜 어, 라고 해. 응이라고 하지 않고."
"어, 나는 어가 좋아."
"어가 좋아?"
"응."
"야 너 지금은 왜 응이라고 해?"
"지금은 응이 좋아서."
"정아야, 재닛 잭슨이 사실은 마이클 잭슨이 여장한 거래."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지?"
"안 돼.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 스케줄을 어떻게 다 소화해?"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신기하지 않겠어?"
"뭐가 신기해?"
"마이클이기도 하고 재닛이기도 하다면 말이야."

111면


‘어’가 좋지만 ‘응’도 좋고, ‘마이클’이기도 하면서 또 동시에 ‘재닛’이기도 하다. 얼핏 보고 지나간다면 그저 막역한 두 친구의 실없는 대화 같지만, 여기에는 이 세계의 가변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식이 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챕터의 소제목이 ‘진흙’인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가. 물도 아니고 흙도 아니지만 물이기도 하고 흙이기도 한, 어쩌면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닐지 모르는, 그것이 바로 ‘진흙’이다. 그렇다면 이 ‘진흙의 수사학’을 빌려 말하면, 세상은 온통 진흙투성이인 셈. 또 동시에 이들이 여름휴가를 떠난 곳이 밀물과 썰물이 오가며 ‘갯벌’이 드러나고 특정한 날에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열리는, 그런 곳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하다. ‘갯벌’, 혹은 ‘바닷길’은 육지인가 바다인가?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지만 육지이기도 하고 바다이기도 한… <진흙> 챕터의 마지막 문장이 ‘진흙’, ‘갯벌’, ‘바닷길’ 등으로 이루어진 이런 가변적인 세계의 으스스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이 지금 저 광경처럼 아주 거대한 반구 모양의 세숫대야에 불과하다면 손을 담그고 마구 흔들어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함께, 그런 맹렬한 적의와 분노로 이제 모든 게 철저히 망가지거나 훼손되어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125면)

정아와 유나의 관계 역시,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이도 저도 아니게 혼합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진흙’과 같은 것이었다. 물과 흙이 섞여 있듯, 사랑과 사랑 아닌 것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계에는 사랑의 모습도 있었고, 사랑 아닌 것들의 모습도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이 관계는 사랑도 아니고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닌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불행인가? 이 소설의 문법으로 말하면 불행이기도 하고, 행운이기도 하며, 둘 다 아니거나 둘 다일 수도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당시를 추억하면서 유나가 그리워지던 날, 정아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재회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기적과도 같은 불행이었다고 생각했다."(129면) '기적과도 같은 불행'. 이 말을 이해했다면, '사랑이 아닌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03.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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