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마흔두 번째 책) 박민정 <미스 플라이트>
“왜 아저씨는 예나 지금이나 불행하기만 해요?”(29면) 이토록 사무친 대사 한 줄이 이 소설을 요약한다. 왜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불행하기만 하냐고, 예나 지금이나 불행하기만 한 ‘유나’가 묻는 장면이다. 아마도 소설을 읽는 일이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그 시간만큼은 타인을 나의 삶 속에 들여보내도 좋다는 의미일 수 있다. 타인의 환희를, 타인의 외로움을, 타인의 사랑을 기꺼이 내 삶 속에 침투시키는 일이고, 그 때만큼은 그들의 것도 나의 환희이며, 나의 외로움이며, 나의 사랑이 될 수 있는 일이다. 문학이 놀라운 점은, 심지어는 비극이나 불행마저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럴 때 타인의 비극은 나의 비극이 된다. 너의 불행은 내게도 불행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 혹은 우리가 이렇게 말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면. 그렇다면 <미스 플라이트>의 저 대사를 곰곰 씹어보면 이렇게도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불행하기만 해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훈’의 불행은 곧 ‘유나’의 불행이고, 그것은 ‘정근’의 불행이자 ‘주한’의 불행이자 ‘지숙’의 불행이고, 그것은 나의 불행이고 너의 불행인, 결국 우리 모두의 불행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그런 불행이 지극하고 섬세한 언어로 쓰여 있다. 예컨대 유나의 죽음을 괴로워하는 정근의 모습은 이렇게 표현된다. “정근은 미치지 않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미치는 게 예의 같을 때가 있었다. 이런 순간에 혼절하지 않는 게 무례가 아니라면 뭘까.”(35면) 압도적인 비극 앞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제 자신이 증오스러운 것이다. 이런 문장 앞에서는 어차피 다 소설일 뿐이라며 냉정해지기 힘들다. 박민정의 섬세한 문장들을 통과하면 이제 ‘그들’의 비극은 어느새 ‘우리’의 비극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 이야기부터 해 볼까. 육군 대령인 ‘정근’부터 해 보자. 그는 이른바 ‘KF-16 비리 사건’으로 불리는 방산 비리에 연루되었고, 방산 비리에 연루된 것뿐 아니라 한 사람(윤 대령)의 죽음에도 연루되었다. 윤 대령의 죽음은 엄밀히 말하면 자살이었으나 정직히 말하면 타살이었다. “아빠, 아직도 몰라요? 아빠가 잘못한 거예요. 윤 대령 아저씨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189면) 자신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는 딸 ‘유나’를 무차별적으로 때리면서도, 그는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유나야, 모두 아빠를 욕할 때 너는 아빠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니?”(173면) 결국 그 일로 불명예 제대한 후,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딸 유나와도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만다. 그는 유나가 자살한 뒤, 끔찍하게 공허한 말만 속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나는 유나에 관해 자격이 없다.”(21면)
과거 정근의 운전병이었던 ‘영훈’. 대학 병원에서 아내 ‘혜진’을 간호하며 대학생들의 자유로움과 시끌벅적한 생기를 증오한다. “과한 젊음과 아무도 허락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 같은 자유분방함이 넘쳤다. 영훈은 대학 캠퍼스 특유의 뽕이라도 맞은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불편했다.”(27면) 그는 이제 병실의 가습기마저 질투하는 사람이 되었다. “영훈은 특히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가습기를 볼 때마다 힘이 빠졌다. 죽은 자나 마찬가지로 그저 누워 잇는 혜진의 곁에서 대신 맑은 숨을 내쉬고 있다.”(27면) 과거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혜진은 과로로 인해 유산을 했고, 그 때 그녀 옆에 있어 주지 못했던 영훈에게는 이것이 평생의 죄책감이 된다. 이후 혜진은 뺑소니를 당했고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그녀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 와중에 영훈은 억울한 일로 회사에서 정직 처분을 받는다.
유나는 승무원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노조 활동을 펼치다가 회사의 미움을 산다. 회사에는 팀원 중의 한 명을 이른바 ‘엑스맨’으로 배치하여 평소 생활을 상부에 보고하도록 만든 제도가 있다.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123면) 유나의 가장 가까운 승무원 동료는 자신의 실적과 성과를 올리기 위해 거짓 보고를 한다. 그녀가 유부남 부기장과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 물론 진실이 아니었다. 어쩌면 유나가 이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공동체라는 말에 어떤 기쁨도 위안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요.”(133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상처를 입고 무너져 버린 유나는 자살하고 만다. “그때처럼 지금도 유나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뭔가 숨긴 채 괴로워서 죽고 말았다.”(106면) 유나는 무엇을 숨겼나. ‘진실’과 ‘진심’을 숨겼을 것이다. 그 유부남 부기장과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는 진실과, 가장 친한 승무원 동료와의 우정이라는 진심을 숨긴 채로 말이다. 진실과 진심 둘 다로부터 배반당한 유나가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다.
이 외에 다른 인물들, 예컨대 유나의 남자친구였던 ‘주한’이나 유나의 어머니 ‘지숙’과 같은 인물들의 불행도 묘사되지만,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세 인물의 비극만 정리해 보았다. 정리해 쓰면서도 왠지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요약될 수 없는 불행이고 요약되어서는 안 될 슬픔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이들의 비극은 너무도 집요하게 엉켜 있어서 각각의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 차라리 이 모든 게 하나의 거대한 비극이었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은 것과 비슷한 정도의 불행조차 나는 경험해본 바 없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들의 불행을 공유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라든가, 뱃속의 아기를 유산했을 때의 심정이라든가, 애인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기분 같은 것들을. 책을 덮고 나면 사라질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그런 감각을 체험했고 이해했다.
이런 소설을 읽는 일은 일종의 자학에 가까운 일 아니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묻는 것도 사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누군가의(비록 가상의 인물일지라도) 불행한 인생사를 알기 위해 공들이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처럼 보이기는 한다. 왜 굳이 슬픈 이야기를 찾아 읽고 슬퍼지려 하는가.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으나 내 경우는 이렇다. 굳이 슬퍼지려 하지 않으면 슬퍼하는 법을 까먹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픔이나 불행에 대해 기본적인 방어 기제를 다들 갖고 있는 듯해서, 타인의 불행이 우리 삶에 침투해오려 하면 무의식적으로 막아 낼 줄 안다. 우크라이나 시내 한 광장에 빈 유모차 100여 대가 모여 있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봤다. 다들 짐작하다시피 전쟁으로 그곳에 타 있어야 할 아기들이 죽었고, 주인을 잃은 유모차들은 그들을 추모하며 그 광장에 모여 있는 것이었다. 마땅히 슬퍼해야 할 그 장면에서 순간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는 사실이 내겐 충격이었다. 내 것도 아닌 타인의 비극에 슬퍼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의 슬픔이 어느 순간 내 슬픔이 되어버릴 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재빨리 그 장면에서 눈을 돌렸는데, 그러고 나자 분명해졌다. 나는 남의 일에 슬퍼하는 법을 까먹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소설이 아니라면, 특히나 이런 종류의 소설이 아니라면 아마도 영원히 타인의 비극을 거부하며 살지 모른다. 슬픔도 공부해야 한다. 내 일에 슬퍼하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듯이 남의 일에 슬퍼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으므로, 소설 읽는 일은 누군가의 불행에 대한 공부이고 체험이고 연습이다. 아니, 공부이자 체험이자 연습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너의 불행은 내게도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유모차를 보며,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미스 플라이트> 같은 소설들을, 계속해서 읽을 것이다. 그건 아무리 많이 읽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03.30.22.
instagram : 우리 시대의 책읽기(@toonoisylonelinesss)
naver blog : blog.naver.com/kimhoey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