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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Apr 05. 2022

죽음이 사는 삶, 침묵이 내는 소리.

#43. 마흔세 번째 책) 문인수, <적막 소리>


1. 죽음의 시학 (무심하게, 정확하게)


그는 죽음으로 시를 쓴다. 시집을 여는 시 <죽은 새를 들여다보다>도 죽음의 시고, 닫는 시 <최첨단>도 죽음의 시다. 처음과 끝이 그러할 뿐 아니라 1부에서 출발해 2, 3, 4, 5부를 통과하는 동안, 이 시집이 꿋꿋이 진행되도록 추동하는 힘은 언제나 죽음의 그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간혹 희망처럼 보이는 시들도 있지만, 그조차 죽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일 뿐. 그들 역시 '생명'의 시라기보다는 '죽음이 아닌' 시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 죽음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경유해 죽음으로 끝마치는 시집이다.


저, 고인을 보내는 첫 동작이다

한 무리의 문상객들이 이제 일어서는 것이다.
여럿이, 둥글게 몸 구부리며 빈소를 나가는 것이다. 어디쯤 가서 그 짐 부리며 잊기 시작할 것인지, 불룩한 등짝마다 우선
망자가 묻힌 게 분명한 것이다.

한 죽음의 참 여러 뒷모습이다.

-32p, <우르르 몰려나가는 무덤들> 전문


1부에서 한 편 뽑아 옮겼다. 짧지만 결정적인 시다. 장례식장의 풍경, 함께 문상 온 사람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그들의 굽은 등에서, 시인은 '무덤'의 모습을 본다. 나이가 들어 점점 등이 굽어가는 일이 마치 제 안에 봉분을 쌓아 가는 과정인 듯, 머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될 그들이 저마다의 무덤 하나씩 등에 지고 다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이 얘기를 그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슥, 쓰고 만다. "불룩한 등짝마다 우선/망자가 묻힌 게 분명한 것이다." 무심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그의 무심하고 정확한 표현들은 무심하기 때문에 더욱 서늘하고, 정확하기 때문에 반박하기 어렵다. 우리들 등짝마다 망자가 하나씩 들어 있다는 말은, 괜히 섬뜩해지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이 아니라서 거부할 방도도 없지 않나. 화자의 마지막 선언-"한 죽음의 참 여러 뒷모습이다"-는 그 무심함과 정확함의 극단에 도달한 누군가의 목소리다. 그는 죽었지만, 우리는 살아 있나? 아니, 그는 죽었고 우리는 곧 죽을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무심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덕분에 그의 시에서 죽음은 미화되지 않고, 동시에 폄하되지도 않는다. 대신 직시된다. 시인은 죽음에 절망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인식한다. 그가 죽음을 이런 식으로 다루기 때문에, 시집이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차 있어도 여기에는 자기 파괴적 체념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뭐랄까, '서정'이 있다.


고분군과 인접해 사는 이곳 불로동 사람들은 오히려 담담하다.
이 오랜 죽음에 대해 별 관심 없다. 다만 여름밤이면 웅성웅성 뭔가 둥글게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지, 이 집 가족들
만삭 같은 수박을 쪼갠다. 수박 세로줄 무늬가 줄줄이 시퍼렇게 살아나는 밤,
저 여러 봉분들도 잘라 전부 뒤집어놓고 싶은 밤, 그 수박 속 다 파먹으면 일가족이 타고도 남을 커다란 배가 되겠다. 일가족을 모두 두고 혼자 떠나온 먼 항해,
뒤집어쓰고 누운 것이 저 봉분들 속 독거다. (…)

-86p, <수박 먹는 가족> 부분


비교해 읽으면 좋을 만한 작품을 5부에서 한 편 골랐다. 무덤가에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죽음에 대해 담담하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도, 죽음은 무심하게 처리되고 있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무덤들>에서 문상객들의 '굽은 등짝'이 '무덤'이 되었다면, <수박 먹는 가족>에서 무덤이 되는 것은 '수박'이다. 반으로 쪼갠 수박의 속을 다 파먹으면, 그것은 커다란 하나의 배가 되겠고, 그 배를 가족들을 버린 채 홀로 타고 떠나다가 언젠가 그것을 뒤집어쓰고 고독하게 누우면, 그것이 곧 무덤 아래 파묻힌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것. 죽음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도 있는가. 이 표현이 아름답다면, 정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껍질 안쪽에/붉게 발린 기억"이나, "흰 달빛 또한 고분군 위에 식칼처럼 환한 밤"과 같은 문장들이 '수박'이라는 비유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무심한 채로 정확해진 표현 속에서, 죽음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화되지 않고 직시되며, 절망되는 대신 인식된다. 죽음은 그저 거기에 있다. 마치 무슨 풍경처럼. 그리고 그 풍경이 문인수의 마음에 포착되면, 그것은 서정이 된다.






2. 침묵의 시학 (시끄럽게)


그는 침묵으로도 시를 쓴다. 소설을 쓸 때, '쓰는 일' 보다 '쓰지 않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소설가 김영하는 했다. 소설가의 고민은 '무엇을 말할 것인지' 보다는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지'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요지의 말이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분별 없이 죄다 써 버리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산만하고 두서 없는 수다에 불과할 것이니, 따라서 소설 창작이란 '쓰기'의 과정이라기보다는 '빼기'의 과정이라는 말도, 그는 덧붙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소설이란 잘 '빼야' 하는 것, 즉 '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쓰지 않기'를 잘해서 탄생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소설뿐 아니라 시도 마찬가지 아닐까. 문학의 어떤 장르에서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일에 비하면 쉬울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는 일도 물론 어렵지만, 때로 그보다 어려운 것은 의미있게 침묵하는 일이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일. 누군가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소설에서는 김영하가 그랬다면, 시에서는 문인수가 그랬다.


허공에, 입이 홀로다.

빈 비닐봉지가 제 딴엔 시꺼멓게 최고로 떴다, 너무 오래 가라앉는……

무지몽매는 배고프다.

일평생이 참

저, 심호흡 한번이다.

-91p, <삶> 전문


제목부터 보자, 무려 '삶'이다. 아마 시인은 바람에 훅 날려 떠오른 까만 비닐봉지 하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 비닐봉지는 쫙 벌린 '입'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봉지는 뜰 때는 순식간에 붕 떠올랐어도 가라앉을 때는 갈지자로 휘청이며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것이 시인에게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날숨으로 내뱉는, 어떤 깊은 한숨처럼 보였을 것이다. 삶은 저렇게 허공에서 가라앉는 일일까, 시꺼멓고 속이 텅 빈 비닐봉지같은 것일까. 우리는 다 '배고픈 무지몽매'들일까. 삶은 아주 길게 쉬는 한 번의 심호흡일까…….

이 시는 삶을 다섯 줄로 써낸 게 아니다. 삶에서 다섯 줄의 문장만 남기고 지운 것이다. 써서 만든 시가 아니라 지워서 만든 시라고 해도 될까. 표현하자면, 무언가를 말하는 시가 아니라 그 무언가를 위해 나머지를 말하지 않는 시다. '침묵'으로 쓴 시. 이 시에서 말해진 부분은 말해지지 않은 부분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가.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이 곧 가장 큰 소리로 말하는 일임을,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해 두자. 그의 침묵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잘 생략했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부분을 오히려 생략해서 전달한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이 시에서, 우리는 '삶'에 대해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읽는다. 이상해 보여도, 읽고 나면 정말 그런 일을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그의 시가 '침묵의 시'가 되는 것이다. 시의 언어가 설명적이지 않고 함축적이라는 것은 이미 당연한 얘기겠지만, 문인수의 언어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그의 언어는 요약으로서의 함축을 넘어서 침묵으로서의 함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조용한 침묵이 아니고, 시끄러운 침묵이다. 그가 만드는 '적막'에는 '소리'가 난다.






3. 역설의 시학 (불가피하게)


이렇게 두 가지 -'죽음'과 '침묵'이라는- 관점으로 문인수의 아홉 번째 시집 <적막 소리>를 읽어 봤다. 흔히들 그를 두고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서정시의 본류와도 같은 시인께 '서정'이라는 말과 가장 안 어울리는 두 단어('죽음'과 '침묵')를 거론한 것이 영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삶'을 '노래'해야 할 서정시에서 '죽음'에 '침묵'한다니.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마지막 단락을 '역설의 시학'이라고 이름 붙여 봤다. 아마 그는 삶을 삶답게 만들기 위해 오히려 죽음에 그토록 집착했을 것이다. 삶과 살아 있음을 말하기 위해 오히려 죽음을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너무나 간절히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오히려 침묵했을 것이다.


고물 프라이드, 달리던 차 엔진이 끝내 천천히 꺼져버린다.
다행히 아주 미미하게 경사가 져 있는 데여서
고가도로 그늘 아래 널찍한 공간으로 차를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핸드브레이크를 당겨 차를 세웠다.

(중략)

구겨진 프라이드는 이제 폐차될 것 같다. 견인차가 도착하고
핸드브레이크를 풀자 움찔, 저를 푸는
이 프라이드는 또 무엇인가.
내리막엔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고 싶은 힘이 있다.

-25p, <내리막의 힘> 부분


마지막으로 한 편 더. 언뜻 평범한 시라서 그냥 넘어갈 뻔 했지만, 맨 마지막의 한 구절 때문에 이 시를 좋아하기로 했다. 너무 분명하고 단순해서 거의 완전해 보이는 문장이다. "내리막엔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고 싶은 힘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또 '힘이 있게' 말하니까, 이건 뭐 도저히 반박할 수 없겠다는 느낌이다.

곧 폐차될 고물 자동차, 엔진마저 꺼져 버리고 이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리막길뿐. 그런 상황에서 도달하는 화자의 마지막 선언은, 좀 지나치게 낭만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무슨 희망을 발견하고 위로를 받거나 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 관심사는 이 시의 마지막 행이 문인수의 시작(詩作) 방법론과 연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엔진이 망가진 자동차를 억지로 고치거나 되살려서 다시 한번 달려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왕 그렇게 된 김에, 영영 내리막으로 치달으며 내가 여전히 달릴 수 있음을 확인하겠다는 식. 이걸 다르게 보면 이렇다.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에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그렇게라도 내 살아 있음을 확인하겠다는 식. 혹은, ('삶'이나 '죽음'처럼)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누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얘기하겠다는 식. 이것이 그가 '죽음'과 '침묵'을 '서정'과 결합하는 과정이다. 내게 이것은 선택의 문제였다기보다는 불가피한 결과처럼 여겨진다. 삶을 이야기할 하나의 방안으로써 죽음에 다가간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리막길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고물 프라이드'처럼, 시인 문인수 역시 삶을 노래하기 위해서 죽음에 근접하는 일이 불가피했던 거 아닐까. 마지막으로 시집의 끝에 짧게 실려 있는 '시인의 말'을 일부 인용하며 마치겠다. 시인은 '시인의 말' 마저 한 편의 시처럼 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시집엔 죽음이 참 많다. 그러나 이 시집이 껴안고 있는 그것들은 오히려 가장 생생한 '산 증거'들로 읽히면 좋겠다. 방금 나무 베어낸 자리처럼, 손바닥에 닿는 그루터기의 그 축축하고도 서늘한 촉감처럼……

-121p, <시인의 말> 중


생전 그가 출간한 무려 열한 권의 시집 중에서, 나는 이제 겨우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그의 나머지 시집들을 뒤늦게 찾아 읽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0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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