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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Apr 13. 2022

젊은 작가의 젊은 소설

#44.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최근 이만큼 빠르게 주목받고 신속하게 제 입지를 다진 신인 작가가 또 있을까. 이번에는 박상영을 읽었다. 젊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젊은 작가, 라고 그를 요약해도 좋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독자들로부터 열성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들었다. 책을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는 이 작가. 88년생으로, 일단 그부터가 젊다. 최근에는 두 번째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22년 인터네셔널 부커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놀라운 성과까지. 이쯤되면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미루는 일은 나에게 손해일 뿐이겠다 싶어 한발 늦게나마 그의 첫 소설집을 펼쳤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단히 젊은 작가의 대단히 젊은 소설이었다. 젊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젊은 소설이란 도대체 뭔가. 그저 그가 젊은 소재들을, 예컨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대학 생활, 비아그라, 동성애 와 같은 소재들을 건드리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설명이다. 그런 젊은 소재들을, 젊은 상상력을 발휘해, 젊은 표현으로 써낸 소설이라야 젊은 소설이라 부르는 일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세계를 상상하되, 그 상상이 젊은이다운 상상이어야 할 것이고, 또 그것을 표현할 때는 신세대다운 참신함과 신선함을 보여줘야 한다. 과연 박상영이 그랬나? 먼저 첫째로, 표현을 보자.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단편의 제목이다. 조용하고 쓸쓸하게 농담하는 소설인데, 그 농담의 최초 시작점은 바로 제목이다. 악동 같은 장난기랄까, 젊은 유머 감각이랄까, 그런 것들이 그가 구사하는 수사법에서 드러난다. (이 제목을 보고도 과연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농담이 그저 제목에 그칠 뿐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제목만 그럴듯하고 내용은 별 볼일 없는 소설들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평범하지 않은 제목으로 평범한 내용을 어떻게든 포장해 보겠다는 의도가 보이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껍데기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속의 알맹이도 '젊은 유머 감각'으로 꽉 차 있는 소설들이었다. 그의 소설은 우선 재미있고, 쉽고, 유머러스하며 유쾌하다. 그런데 좋은 소설가라면 여기에서 그치지 말아야 하고, 박상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 데 성공한 좋은 사례처럼 보인다. 그의 대부분의 소설은 유쾌함으로 시작하지만 쓸쓸함으로 끝난다. 웃기고 가볍고 발랄한 인물들이 나와서 웃기고 가볍고 발랄한 이야기를 해 나가지만, 마지막은 어김없이 그 웃음 때문에 남몰래 흐느껴 울거나, 그 가벼움 때문에 더할 수 없이 무거워졌거나, 그 발랄함 때문에 텅 비어버린 결말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단순히 '유머와 재미'라는 일차원이 아니라, '농담과 그 이면'이라는 두 차원의 성격을 품게 된다. 그의 농담은 예리한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묵묵하게 울리는 공명을 만든다. 그의 소설을 '재밌게' 읽고 나면 왜 '쓸쓸한' 여운이 남는가. 찔러서 상처 입히는 농담이 아니라 벗겨내서 쓸쓸하게 만드는 농담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카로운 촌철의 농담이라기보다는 뭉근한 능청에 가까운, 박상영식 농담이 탄생했다. 아마도 이런 표현과 문체를 시도한 것이 그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선례로는 그의 선배 소설가인 김중혁이 있지만, 박상영은 훌륭하게 이 스타일을 자기화했다. 그가 구사하는 단어, 말투, 분위기, 억양, 문체…는 틀림없이 우리(젊은이)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젊은이의 발화다. 우선은 우리를 즐겁게 만들지만, 끝에는 우리를 쓸쓸하게 만드는, '젊은 수사법'이다.

둘째로, 상상력을 보자. 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들은 각기 다른 무언가를 조롱하는 듯하다. 데뷔작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는,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으로 집약되는 모든 거짓 위선과 허세를 조롱하고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모습과 다른 얼굴이나 몸매,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왜곡된 동물 사랑도 있다. 그 자아 도취를, 작가는 쓸쓸하게 조롱한다. <세라믹>에서는, 사이비 종교에 무시무시할 정도로 몰두한 이들이 '신의 뜻'을 등에 업고 무자비한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는 거짓된 종교와 맹목적인 믿음이 조롱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의 방>이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왜곡된 사랑이자, 욕망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했던 욕망이 가시가 되어 돌아오거나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감추려 했던 사랑이 역시 가시처럼 드러나는 것을 보여 주며, 박상영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쓸쓸하게' 조롱한다. 그것은 비판이 목적인 조롱이라기보다는, 공감의 한 측면으로서의 조롱이다. 그의 조롱은 잘못을 지적하기도 하거니와 상처를 발견하기도 해서, 상대를 울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운다. 그래서 그의 조롱은 공격적이지 않고 쓸쓸하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된다.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사실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상상력의 한 형태일 수 있다면, 박상영의 상상력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의 거짓 자아를 깨뜨리고, 잘못된 종교와 그 믿음을 허물고, 사랑과 욕망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그 쓸쓸한 조롱의 상상력을 '젊은 상상력'이라 부르자. 왜냐하면 불만이 가득하고 에너지가 넘쳐 제 힘으로 뭔가 다 바꾸어놓고 싶지만 번번히 벽에 부딪혀 실패하고 몇 번의 좌절을 겪다 문득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뒤에 고독해지고 쓸쓸해지는… 것은, 다른 어느 시절도 아닌 오직 젊은 시절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소설에도 세대교체가 있나? 당연히 그럴 것이다. 박상영이 혼자 힘으로 그것을 해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소설이 그 세대교체의 시류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소설을 쓰는 일에는, 아직 말해진 적 없는 것을 최초로 말하는 길이 있고, 이미 말해진 것을 아직 말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이미 말해진 것을 이미 말해진 방식으로 말하는 길 따위는 없다.) 가장 좋은 의미에서, 나는 박상영에게 전자를 기대한다. 아직 말해진 적 없는 말들이 그의 안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아직 나오지 않은 그의 젊은 소설들을 기다린다.





0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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