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마흔다섯 번째 책) 문인수, <동강의 높은 새>
#43. 마흔세 번째 책)
우선 피 흘리며 시작된다.
섬진강 가 동백 진 거 본다.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동백 져 비린 거
아, 마구 내다버린 거 본다.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
낭자하구나.
나는 그러나 단 한번 아파한 적 없구나.
이제 와 참 붉디붉다 내 청춘,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
-13면, <동백> 전문
시집을 여는 시 <동백>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동백꽃들은 뚝 뚝 흘리는 핏방울이 된다. 꽃이 피가 되는 은유는 그리 놀랍지 않지만, 시인이 져 버린 동백을 보며 “낭자하구나” 하고 읊는 구절은 좀 놀랍다. 그는 꽃이 왜 피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그냥 선언하는데, 그것도 아주 간결하고 정확하게 선언한다. 5연의 단 한 줄, “낭자하구나” 만으로 (다른 은유의 가능성도 갖고 있었던) 동백은 이제 ‘선혈’ 이외의 다른 뜻으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된다. 힘 있는 비유는 두 대상을 붙여 놓지만, 더 힘 있는 비유는 그 둘이 절대로 떨어질 수 없게 한다. ‘낭자한 동백’이라니. 너무나 명쾌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구절이다.
그런데 이 피의 주인은 누구인가? 마지막 7, 8연을 읽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는데, “이제 와 참 붉디붉다 내 청춘,/비명도 없이 흘러갔다.”에서 보듯, 바닥에 낭자하게 피 흘린 이는 바로 화자의 ‘청춘’이다. 아마도 시인은 섬진강에 갔다가 채 시들기도 전에 져서 바닥에 쌓인 동백꽃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 버려진 동백꽃들의 선명한 혈색에 놀랐을 것이고, 그게 시인의 눈에는 낭자한 유혈로 보였을 것이다. 그때, 그것이 누군가 피 흘린 흔적이라고 생각하자, 실은 그게 다 ‘내 청춘’이 흘린 피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청춘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단 한번 아파한 적 없”이 살다가, 낭자한 동백을 보고서야 뒤늦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의 청춘이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 죽었고, 저것이 그 사체임을. 7, 8연에서 자신의 청춘이 “이제 와 참 붉디붉”으며,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는 말은 아마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알고 보면 참 무서운 시가 아닌가. 요약하자면, 제 청춘의 죽음을 꽃을 통해 재확인하는 시다.
이 시집 <동강의 높은 새>는 문인수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자 그의 나이 56세에 출간한 시집이다. 청춘을 다 지나 보낸 중년의 시인이 시집의 문을 여는 첫 시로 이런 시를 내놓았다면, 그것은 이 시집에서 청춘과 그 이후, 즉 과거와 미래, 그러니까 계속해서 흘러가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명상하겠다는 어떤 포부로 읽히지 않겠는가. 읽어보니, 실제로 그랬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난히 ‘길’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시집이었고 몇몇 시들에서는 정선, 우포늪, 섬진강이라는 실제 지명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갈 예정인지 보여 줬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길을 걸어갈 예정이라는 점을 새삼 상기하게 했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고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중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 길지만 아래 옮겨 본다.
시인들이 쓰는 시의 주제는 각기 다르고, 쓰는 기술도 다르지만, 그들이 시의 길에 들어섰던 계기나 방식은 거의 같다. 한 젊은이가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시 같은 것'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재능이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막연하게 느낀 이 재능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그가 이제까지 이루려 했던 일의 가치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순결한 그 젊은이는 자기가 꿈꾸어온 좋은 삶도 그 가치를 저버리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에 그 재능은 일종의 의무가 된다. 그는 떨면서 그 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한다. 서정주가 그렇게 시인이 되었고 김수영이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38면, <30만 원으로 사는 사람>
여기에 한 명을 더 보태자. 문인수도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그는 생전 무려 열한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시에 일생을 바쳤다는 말은 이럴 때에만 쓸 수 있을 것 같다. 시 쓰는 게 좋아서? 아니, 쓰지 않고는 못 배겨서 그랬다는 말이 더 정확해 보인다. 시를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황현산 선생이 지적한 대로, 그것은 처음에는 재능의 발산일지 모르나 어느 순간부터는 의무의 이행이 된다. 그런 이들에게 시란, '재미있는 일'이거나 '잘하는 일'이기도 할 테지만, 그 이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러한 의무감을 고통스럽게 짊어지는 게 아니라 기꺼이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시라는 의무는 짐이 아니라 힘이다. 시 쓰는 일이, (진정한)시인에게는 유일하게 살아갈 힘이 된다. 그렇게 시인들은 (위 인용문의 제목처럼) '30만 원으로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 그러나 작년에 돌아가신 이 시인은 이제 시를 '포기한 적 없는' 사람으로 완결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의 시가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어쩌면 위에서 쓴 문장 -시인은 시로 말한다, 라는 말은 반만 옳다. 어떤 시인을 보면 시인이 시로써 말할 뿐 아니라 시로써 살아가기도 한다는 걸 아득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문인수의 시집을 읽으며 이 사실을 또 한번 수긍한다. 시인은, 시로 산다.
이렇게 문인수의 작품 세계를, 피와 길과 시와 힘이라는 줄기로 가닥을 잡아 보았다. 이제 이 줄기들이 뻗어나온 공통의 뿌리로 수렴하며 마무리를 짓고 싶다. '뿌리'라는 단어는 이 시집에서 눈에 띄게 자주 등장한다. 아래에 옮긴다.
먼저 <동강의 높은 새>에서는 '산의 뿌리'가 등장한다. "동강 높이 새 한 마리 떴다./저,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산의 뿌리가 다 만져진다." 산에도 뿌리가 있으며, 그 단단하고 깊게 박힌 산의 뿌리 끝까지, '동강'이 어루만지며 흐른다는 표현이다. 그만큼 까마득하게 강물이 흐른다는 것. 하나 더 보자. <비의 뿌리>에서는 제목부터 '비의 뿌리'가 등장한다. "비의 뿌리가 지금 막 깊이 숨었다." 소나기가 와서 잠시 밖에 나왔던 지렁이가 비가 그친 후 해가 갑자기 쨍쨍하게 비치자, 그 열기에 데어 화급하게 흙 속을 파고들며 숨는 장면이다. 지렁이가 숨은 자리에 난 구멍이, 시인의 눈에 비가 뿌리내린 자리로 보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달뿌리풀>에서는 '달의 뿌리'가 등장한다. "달뿌리, 달뿌리풀을 아시는지요./강변에 많이 박힌 달의 발자국, 달의 뿌리를 보셨는지요." 어느 날 달이 환하게 떴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가 달빛에 홀리듯 이끌려 나와 강변을 걷는다. 그 강가의 물 먹은 모래 위에 찍히는 그리움의 발자국들. 달이 끄집어낸 그리움이고 달이 끄집어낸 걸음이니, 시인은 그 발자국들이 '달의 뿌리'라고 말한다. 무엇 하나 빠짐없이 셋 다 참 아름다운 감수성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뿌리'란 단어를 저렇게 활용할 수 있었을까. 아름다운 일인 동시에 고마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시야말로 그의 뿌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피' 흘리며 걸어온 아득한 '길' 위에서 그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시' 쓰는 일만이 유일하게 그가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니까. 따라서 그는 '산의 뿌리', '비의 뿌리', '달의 뿌리'를 말했으나, 우리는 그가 말하지 않은 뿌리 하나를 더 읽어낼 수도 있겠다. 그것은 '시의 뿌리'다. 그 시의 뿌리가 자라서 그의 삶이 되었다고, 혹은 시에게 단단히 뿌리내린 덕분에 그가 살아갈 수 있었다고. 그렇게 이해한다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벌판엔 보물 제 46호인 고려시대 석불입상 2기가 2백여 미터 간격으로 오래 마주보고 서 있다.
이제 손 흔들고 서로 돌아설 것인가.
(…)
나에게 하염없이 너를 그려넣고 있다.
그립다는 내용의 저 다리 힘, 그렇게 여전히 마주보고 서 있다.
-95면, <이별> 부분
이 시가 제일 마음에 걸렸다. 몇 번을 읽어도 "그립다는 내용의 저 다리 힘"이라는 저 마지막 행에서 덜컥 하고 걸리는 게 있다. 이런 문장은 한 번 읽으면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그리워하는 사람은 오래오래 서 있는 사람이고, 그 그리움은 그의 다리 힘으로 증명되는 것이라고. 어쩌면 이 멋진 문장을 그에게 이렇게 돌려 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살겠다는 내용의 저 뿌리 힘, 이라고. 즉 살아가려는 사람은 아무리 휘청여도 끝내 쓰러지지는 않는 사람이고, 그 삶은 그의 뿌리 힘으로 증명된다고.
04.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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